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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장. 신경전 (56/126)

55장. 신경전

“멈춰-! 멈추라고, 이 간사한 여우 놈아!”

추병귀는 절뚝이는 발로 필사적으로 내달렸지만 계속 벌어지는 격차에 결국 포기하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뜩이나 처치 곤란인 쓰레기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 마당에 길달마저 빼앗겼다는 것을 알면 비형랑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분함에 절규하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우선을 핏발 서린 눈으로 노려봤다.

평소라면 무시했을 우선은 달려오는 화비의 등에 죽은 듯이 업혀 있는 건우의 상태를 보고 두 눈에서 살기를 뿜으며 한 발 나섰다. 추병귀의 사지에서 흐르는 피를 모두 말려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동주가 그의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참아, 우선아. 일단 건우 형을 안전하게 데리고 가는 게 우리 목표였잖아.”

“……”

동주의 말에 겨우 살기를 억누른 우선은 무사히 다다른 화비와 건우를 먼저 승합차에 태웠다. 운전석에는 동주가 올라탔고, 혜령이 건우와 같은 시트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건우의 몸을 자신에게 기대 앉히고 더 이상의 충격이 가해지지 않도록 끌어안고 있었다.

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조수석에 타 있던 우선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신라의 전화였다. 그는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신라야, 무사히 빠져나왔니?”

「네. 택시 타고 연구실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그자는?”

「쫓아오지는 않는 것 같아요. 건우 선배는요? 무사히 구했나요?」

“그래. 지금 데리고 돌아가고 있어.”

「다행이다….」

이번 작전은 조연사에서 아영의 모습으로 둔갑해 강 현의 외관을 빠르게 본딴 화비의 공도 물론 컸지만, 바깥에서 강 현의 주의를 끌며 시간을 벌었던 신라의 공이 컸다.

“그런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 괜찮은 거니?”

우선의 걱정 어린 물음에 신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신후가 알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일이기에, 신라가 강 현을 만나고 온 것은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괜찮아요. 마주하기는 힘들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요. 이제 미련 없이 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교수님께는 비밀로 했지만 아마도 은연중에 알고 계실 거야. 책임을 물으시면 내가 질 테니까 걱정 말고.”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어서 돌아오세요. 다들 보고 싶어요.」

신라의 말을 듣고 조교들이 모두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한시라도 빨리 모이고 싶은 것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먼저 연구실에 도착한 신라는 들어와서 문을 닫자마자 벽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붙잡을 생각도 없이 바닥에 떨어뜨린 그녀는 손을 들어 펼쳐봤다. 잠깐이지만 단검을 움켜쥐고 있었던 손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느새 지척으로 다가온 남자가 떨리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신라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결국 만나고 온 건가.”

신후가 물었다. 질책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신라는 그저 힘없이 웃었다.

“죄송…”

말을 끝맺기도 전에 웃음은 처량한 울상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신라는 입술을 깨물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한 걸음 더 다가온 신후가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눈물을 닦아냈다.

“너무 분해…. 하필이면 기대고 위로받았던 사람이 준호 오빠를 그렇게 만들고, 내 주변 사람들을 해치려고 했던 남자라니….”

“그 배신감과 좌절감이 놈이 바라던 거겠지.”

“이제 정말 끝이에요. 다음번에는 망설임 없이 찌를 거예요.”

“미리 말해두지만, 네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신후는 더 말하려는 신라를 저지하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감싸 품에 넣었다. 고요한 와중에 들리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신라의 어지러웠던 머릿속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상처 주지 않아…. 그렇죠.”

“그래.”

“맹세해요.”

“……”

신후는 신라를 품에서 떼어내고 시선을 지그시 마주쳤다. 그 진심 어린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되었지만, 그는 더 나아가 그녀의 이마에 천천히 입 맞췄다. 차분히 감기는 신라의 두 눈에서 마지막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내가 만약 널 상처 준다면, 그때는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을 때일 거야.”

신라는 속으로 답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나에게는 상처일 거라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 조교들이 연구실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건우 선배가 와요…!”

신라는 먼저 연구실 문을 열고 조교들을 맞이했다. 동주가 건우를 업은 채로 들어왔다. 창백하게 질려 있는 건우의 얼굴을 보자마자 신라가 또 울상을 지었다. 조연사 뒷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던 건우의 마지막 모습이 또 한 번 그려지고 있었다.

“미안해요, 선배…. 나 때문에….”

소파에 눕혀진 건우의 눈이 느릿하게 반쯤 떠졌다. 그는 어지러운 시야에서 신라의 모습을 겨우 찾아냈다.

“그 바보 같은 소리 때문에… 잠이 확 달아나네….”

“선배!”

신라가 당장 소파로 달려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건우는 힘없이 웃으며 신라의 이마를 접은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모양만 꿀밤이지, 그냥 가져다 댄 수준이었다.

“이건 먼 옛날 있었던 일의 연장일 뿐이야…. 오히려 내가 먼저 알아채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많이 다쳤어요? 병원 안 가 봐도 돼요?”

“됐어… 이대로 쉬면 나아….”

건우는 가쁜 숨을 내쉬다가 몽롱한 시선의 마지막 정착지로 소파 근처에 서 있는 신후를 바라봤다. 신후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묵직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멀쩡한 꼴로 돌아와서 신기하죠?”

“그게 어디가 멀쩡하다는 거야?”

“옛날에 비하면야 소꿉장난 같은 정도죠….”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고는 하나 넝마가 된 옷자락마다 붉게 물들어 있는 핏물은 그가 겪었던 고초를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혜령은 속상함을 감춘 얼굴로 피가 굳어 있는 건우의 머리칼을 이마에서 쓸어 넘겨주었다.

“이제 좀… 자겠습니다….”

눈을 감는 건우에게 신후가 나지막이 말했다.

“푹 쉬도록 해. 휴가는 원하는 만큼 줄 테니까.”

“나이스….”

그는 그다운 추임새를 중얼거리고 나서 곧바로 숙면으로 빠져들었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고서야 신라의 얼굴에 조금 안도의 기운이 서렸다.

* * *

강 현은 지하 창고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의 무미건조한 시선 끝에는 건우가 흘렸던 피의 흔적만이 자리했다. 혼자의 몸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으니 분명 동료라는 자들이 와서 구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저택에 없는 듯이 숨어 지내고 있던 추병귀가 사라진 걸 보면 그걸 보고도 눈앞에서 놓친 것이 분명했다.

우우웅, 그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가 되지 않는 걸 보면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그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조용히 귓가로 가져갔다.

「기분이 어때.」

누구의 목소리인지 단번에 알아챈 것은, 자신이 우연을 가장했던 한 번의 마주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곧 직접 모습을 드러내거나 혹은 이런 식으로 전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기분?”

「어울리지 않는 인간 탈을 뒤집어쓰고 사는 기분.」

“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셀 수도 없는 수족들을 부리고 살았던 네가 어울리지도 않게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꼴이 가여워서.」

강 현은 벌려 앉은 다리에 팔을 걸쳐 놓고 다소 위험한 느낌의 미소를 내지었다.

“그렇게 가여울 거였으면 애초에 나를 그 지옥 불에 던져 넣지 말았어야지.”

「그곳에 널 가둔 건 신들이지 내가 아니야.」

“하하…. 말은 참 쉽군.”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다소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건우가 사라지고 흐리멍덩해졌던 그의 눈이 다시금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너야말로 그만 발악하고 인정하지 그래. 어차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감정 한 덩이가 없는 불완전한 인간인 채로 살 텐데, 사람 시늉을 해서 뭐하게?”

「네가 인간으로 환생한 이유는 뭐지? 굳이 환생하지 않아도 훔쳐 간 ‘신의 죄’의 증표 뒤에 숨으면 됐을 텐데.」

“……”

「네 귀혼을 숨긴 ‘신의 죄’를 안고 살아가려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야만 했나 보지?」

“너무 그렇게 성급히 굴지 마….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이 있잖아?”

강 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하 창고를 나가 위층의 서재로 향했다.

2층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니, 한창 이삿짐이 옮겨지고 있었다. 장소가 발각된 이상 더는 이곳을 본거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근차근 네 주위부터 청소할 생각이야. 옛날처럼, 너와 길달, 둘만 남을 때까지.”

「……」

“그래야 예전 향수도 불러일으키고 좋지. 아아…, 물론 유신라는 예외야. 길달이 돌아오려 하지 않으니 내 쪽도 내 사람을 만들어야 공평하겠지.”

「경고하는데, 명줄을 조금이나마 길게 가져가고 싶다면 그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하하…. 사랑‘할 수 없는’ 여자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꼴이라니. 혹시 알아? 가망 없는 너에게 지쳐서, 결국 내 손으로 떨어질지.”

「직접 마음을 결정하게 만들기 위해 알고서도 보냈다만, 네 헛된 기대를 저버리기에는 부족했었나 보군.」

“내가 아직 본인한테 진심을 내비친 적이 없다고 하더군. 진심이 사람 마음을 움직인다고 그랬으니, 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거지…. 재미있는 여자야. 같이 있으면 질리지가 않거든. 인간으로 환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해.”

대답 없는 신후를 보고 강 현은 큭큭 대며 웃음을 삼켰다.

“환생하고 널 처음 봤을 때는 빨리 눈앞에서 없애고 싶었다만, 좀 더 지켜보고 싶어졌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질 수 없는 보물을 나에게 빼앗겼을 때의 그 모습을.”

「역시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있다고 여기는 그 어린 천성은 버리지 못했나 봐. 그러다가 신의 눈 밖에 나서 그 꼴을 당했으면서 말이야.」

입가에 걸려 있던 강 현의 웃음이 점차 희미해졌다.

“옛날에는 네 존재에 대해 무지했기에 방심했지만, 이번은 달라. 그 이름대로 어둠 속에 쭉 숨어 있지 않았던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 기대해.”

꽤 길어지는 대화에 신후는 집무 책상에서 일어나 창가에 기대서 있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신라가 소리 없이 교수실로 들어왔다. 신후는 그녀와 지그시 시선을 마주치며, 강 현에게 마지막 할 말을 전했다.

“그때에도 그 심장이 온전히 뛰고 있다면 그렇게 해봐. 이번에는 신이 뭐라고 하든, 그 심장을 내 손으로 직접 뜯어내고 그 자리에서 혼을 불사를 생각이니까.”

신후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쥔 손으로 가만히 창틀을 짚었다. 그의 머릿속에 불길한 가능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 신라를 놈에게 노출시킨 게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준호가 생전에 미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그때에는 당연히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말장난 정도라고 여겼지만, 신라를 향한 강 현의 비정상적인 집착은 아무래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 같았다.

만약 놈이 신에게 앙심을 품고 신라에게 접근했던 거라면 그녀는 일찍이 무자비하게 유린당해 몸과 마음이 망가져 버렸을 것이다.

표정을 굳힌 신라가 신후를 향해 조용히 다가왔다. 그가 방금 누구와 통화했는지 눈치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신후는 쓰게 웃었다.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결국 그 원인 제공을 해버린 격이었으니까.

“이렇게 한 사람을 증오해본 적이 없어요…. 그 남자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런데 두려워요.”

아래로 향한 신라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과정에서 또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될까 봐… 그게 혹여나 당신이 될까 봐….”

그녀의 한쪽 눈에서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후는 가슴 한켠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신라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에 그녀의 뺨이 닿기 전 어마어마한 통증이 심장을 할퀴어낸 것이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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