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장. 협동 작전 (55/126)

54장. 협동 작전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이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두고 있던 신라는 다시 강 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표정 없이 앉아 있는 남자는 왠지 세상에서 동떨어진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평소에 늘 머금고 있던 옅은 미소도 연극의 일부였을까.

“당신이 존재했던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이해하기에는 난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죠. 하지만 알 수 있어요…. 오래 묵혀진 감정일수록 그건 자기도 모르는 새에 행동에 묻어 있게 되거든요.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곧 당신의 해묵은 감정의 표증이에요.”

“……”

“왜 당신이 나에게 필요 이상으로 잘해줬고, 깊이 이해해줬는지 알 것 같아요. 당신은 나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본 거예요. 동정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당신의 모습을.”

신라의 말에도 강 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신라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기로 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그를 찾아온 것이었으니까.

“당신은… 외로웠던 거예요. 아무리 억지로 손에 가져도 결국 그것들은 모두 당신 곁에서 떠나가 버렸으니까. 건우 선배… 길달을 포함해서. 욕망만을 맹목적으로 좇으면서 살아온 당신의 삶은 결국 늘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겠죠.”

“……”

“천 년이 지나서야 어렵게 환생했으면서 왜 또 본질을 보지 못하는 거죠?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사람을 만들고 싶다면 억지로 묶어둬서는 안 돼요. 진심을 보여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지. 당신이 하고 있는 방식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요.”

“길달이 내 진심을 모르고 있을 것 같아요?”

강 현의 입가에 형식적인 미소가 자리 잡았다. 매끄러운 대화를 위한 장치이지만 눈가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신라는 그 얼굴이 오히려 더 그답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녀석만큼 날 잘 아는 자는 없어요. 어린아이 같은 욕망덩어리에, 이 내면에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죠. 진심을 보이면 그 사람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큭큭 거리는 웃음을 흘렸다. 참는다고 참아낸 것이지만 주변 테이블의 시선이 한 번쯤 그에게 닿아갈 정도였다.

신라는 무릎 위에 놓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신라 씨…. 감출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내면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이상 그만 파고들어요. 당신의 그 순수함을 될 수 있으면 오래 지켜주고 싶거든.”

“……”

“맞아요. 당신이라는 인간에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관심이 갔어요.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고, 파헤쳐보고 싶었죠. 조금만 이해하고 다가갔는데도 당신에게 내가 꽤나 큰 존재로 자리 잡는 걸 보고, 그다음부터는 당신을 흔들어보고 싶어지더군요.”

“그래서, 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만족했나요?”

“말했잖아요. 내 갈증은 채워지지를 않는다고.”

그 말은 흡사,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소리였다. 신라는 이유 없이 가빠오는 숨을 골랐다. 왜 건우가 이 남자를 그토록 트라우마처럼 여기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눈앞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을 옥죄어 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버티고 있었다. 버텨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다시 이 남자의 얼굴을 맨정신으로 마주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고 싶었던 말들은 모두 했고, 또 하나의 중요한 목표까지 달성했다.

그녀는 또다시 테이블 아래로 보이지 않게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했던 시각에 10분 정도 못 미쳤지만, 그 정도는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제 내가 괴물 같은가요?”

뜻밖의 소리에 신라의 시선이 다시 강 현의 얼굴로 향했다. 질문을 한 남자의 눈빛이 사뭇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죠?”

“그냥, 지금 당신의 생각이 궁금해서.”

늘 먼저 어떤 마음일지 헤아리고 조언해 주던 남자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다시금 원망감이 비집고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신라는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내 생각쯤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거 아닌가요?”

“대답이 되는 것 같네.”

덤덤히 수긍하는 강 현을 보고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파고들지 말라고 했으면서, 나에게서 답을 얻으려고 하지 말아요. 난 이제 더이상 당신을 위해서 고민하지 않을 거니까.”

그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신라의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더이상 위해주는 척도 하지 말아요. 날 이용해서 당신의 악행을 달성했으면서, 이제 와서 내가 없었어도 벌어졌을 일이라고 말하면 아 그랬구나, 하고 안심할 줄 알았어요?”

“적어도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질 거라고 생각했죠.”

“앞으로는 당신 계획대로만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날 이용하고 내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아간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만들어줄게.”

“……”

이것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끝이었다. 신라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바깥의 날씨는 화창했다. 그 이면에서 무슨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서둘러 연구실로 돌아가기 위해 핸드폰 어플로 택시를 부르려던 신라는 갑자기 뒤에서 붙잡아 세우는 손길에 반 바퀴 돌아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거 놓…!”

“지금 하게 해줄게요.”

갑자기 손에 쥐어지는 것을 보고 신라의 얼굴이 굳었다. 강 현이 그녀를 벽에 가둔 채 서로의 사이에 날카로운 단검을 들이민 것이다. 조금만 찔러도 살갗을 깊게 파고들 것 같은 서슬 파란 칼날이 그의 심장 쪽을 향하고 있었다.

“자, 찔러요. 그러고 싶다면.”

“……”

“날 원망하고 있잖아요. 어디 날 후회하게 만들어 봐요.”

크기가 작은 단검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신라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신라 씨. 기회는 지금뿐이에요.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더 벌일지 모르잖아요.”

“……”

반대쪽 어깨에 멘 가방이 스르륵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내렸다. 신라는 벽에 겨우 기대선 자세로 강 현의 얼굴을 원망스레 노려봤다.

“날 흔들어 놓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감정이 잔뜩 담긴 목소리가 검을 들고 있는 손만큼이나 위태롭게 떨렸다. 신라는 자칫하면 이 감정에 휩쓸려 정말로 그를 찌르게 될까 봐 양손으로 손잡이를 더욱 꽉 움켜쥐고 있었다.

강 현은 그녀의 얼굴 곳곳에 시선을 뿌리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두려움이든, 원망감이든, 당신이 그 머릿속에, 심장에… 나만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면 좋겠어. 이걸로 날 찌르면 당신 마음도 조금 풀리지 않을까?”

“마음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래. 하지만 이렇게 쉽게 죽여 버리면 당신이 언제고 다시 돌아와 똑같은 짓을 벌일지 모르잖아.”

“어둑시니의 환생이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내가 이기게 만들 거야.”

강 현이 한숨과 함께 체념 조로 중얼거렸다.

“이것 봐. 진심을 내보여도 당신은 나에게 다가오려고조차 하지 않잖아.”

“진심…? 어린애 같은 독점욕? 가학심?”

“사랑을 할 수 없어서 그저 당신을 소유하려고만 하는 어둑시니와 내가 뭐가 다르지?”

“그 사람은 적어도 나에게 상처 주지 않아.”

카랑- 날카로운 낙하 음을 내며 단검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신라는 가방을 집어 들고 떠나기 전 이어서 말했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나와 공유하려고 하지. 당신은 아직 진심의 일면도 내비치지 않았어.”

강 현은 급하게 걸어 내려가는 신라를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두려움을 참고 자신의 앞에 앉아 있다가 한순간 원망의 기색을 숨김없이 내비치는 여인의 모습을 보고, 그 원망감이 더욱 뿌리 깊이까지 자리했으면 좋겠다고 원해서 붙잡아본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가 진심의 일면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거짓을 말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더 큰 진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는 보인 것일까?

“재미있네….”

진심으로 즐거운 미소를 내지은 강 현은 단검을 주워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있었던 일을 한시라도 빨리 가장 아끼는, 아니 아꼈던 심복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 * *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건우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지하 창고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다음 눈앞에 나타나는 이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눈을 뜨니 평소와 달리 정장 바지에 구둣발이 아닌 새하얀 운동화가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그는 좀 더 고개를 들어 상대의 정체를 확인했다. 강 현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너는…”

건우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읽어낸 강 현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역시 그자가 아닌 걸 눈치채는군. 어서 여기에서 나가자고.”

강 현은, 아니 강 현의 모습으로 둔갑한 자는 서둘러 건우의 팔을 옥죄고 있는 사슬을 끊어내고 축 늘어지는 몸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지하 창고에서 조용히 나갔다.

저택 바깥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1층 로비를 통과해야만 했다. 계단을 올라가 로비로 통하는 문을 여니, 들어올 때와는 달리 누군가가 로비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 어디 나가시는 겁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로비에 있는 것은 추병귀였다. 화비는 조금 안심했다. 둔갑을 하고 있는 이상 요기를 백 프로 숨기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력을 모두 잃은 추병귀로서는 그것을 눈치챌 정도로 예민한 감각은 아마 없을 터였다.

“감금하는 장소를 바꾸려고 한다.”

목소리마저 똑같이 따라 할 수는 없기에 짤막이만 대답한 화비는 건우를 고쳐 업고 문가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추병귀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화비의 뒷목으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겨우 문가에 다다라 문고리에 손을 가져간 순간 추병귀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무엇으로 옮기시려고요? 차는 없으시던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추병귀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화비의 발 쪽으로 향했다. 숨을 겨우 내쉬던 건우가 화비의 귓가에 속삭였다.

“구두… 그 남자는 어떤 옷이든 항상 구두를 신어.”

이미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화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잡고 있는 문고리를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나가기 전 힐끔 뒤쪽을 돌아봤다. 추병귀가 자라경을 들어 이쪽을 비추고 있었다.

“너는…!”

추병귀가 정체를 눈치챈 순간, 화비는 혀를 차며 재빨리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마당 정원은 왜 이리 쓸데없이 넓은지,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술인가!’

침입한 자가 쉽게 빠져나갈 수 없도록 뭔가 주술을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화비는 낭패를 봤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어?」

혜령의 목소리였다.

“다 나왔는데 정원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바깥으로 나오긴 했다는 소리지?」

“그래! 추병귀가 쫓아오고 있어!”

「그러면 일단 엎드려봐.」

“응?”

화비는 건우를 업은 채로 바닥에 무릎을 대고 숙여 앉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인간 여자…”

건우만이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잠시 후, 바람과 함께 요기를 가르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여러 개의 화살이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화비는 깜짝 놀라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화살이 지나간 자리로 요기에 가려졌던 진짜 공간의 모습이 드러나 있었다.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주술이 걷히자 출구 쪽에는 활을 들고 서 있는 혜령과 우선, 동주의 모습이 아른아른 보였다.

“어서 이쪽으로 와!”

동주의 외침에 화비는 이를 악물고 그들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더이상 강 현의 모습으로 있을 필요가 없어진 그는 원래 유지하고 있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예정대로 구출 작전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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