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장. 변화
- 저기… 떨어뜨리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퍽 곤란할 뻔했어요.
신후는 계절이 바뀌기 전 자신의 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비형랑의 환생을 떠올렸다. 정체를 감쪽같이 숨긴 채 눈을 속인 남자는, 나아가 가장 눈에 거슬리던 지국천왕을 제거하고 건우마저 포획해 갔다.
정체를 파악한 이상 더는 눈 뜨고 당할 일은 없겠지만 이미 입은 피해가 너무 컸다. 전생에는 이쪽이 기습을 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반대가 된 것이다.
그는 신라의 방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갔다. 집으로 돌아온 뒤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계속 침대 위에 웅크려 앉아만 있는 그녀였다. 혜령과 다른 조교들이 한참을 위로했지만, 신라의 얼굴에는 한 점의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만 남은 집에는 적막함만 자리했다.
“물 좀 마셔.”
신후가 그녀의 앞으로 물이 든 컵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퍼석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는 수분이 모자라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물을 거부할 것만 같았다. 신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놈이 무슨 말을 하든 앞으로는 믿지 말아야 하고. 믿지도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한 말만큼은 내 생각도 같아.”
“…내가 없었어도, 벌어졌을 일이라고요?”
“그래.”
신라는 자조적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신후를 올려다봤다.
“내가 좀 더 빨리 눈치챘다면요? 바보처럼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중간에서 막을 수도 있었다면요?”
“그건 불가능했을 거야.”
“왜 불가능했다고 단정 지어요? 내가 쓸모 있을까 봐 연구실로 데려온 거 아니셨어요? 결과를 봐요. 내가 최악으로 만들어버렸어. 나만 없었어도 준호 오빠도, 건우 선배도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나만 없었어도…”
신라의 눈에서 또 맺혀 있던 눈물이 떨어졌다. 신후는 물 잔을 내려놓고 침대에 걸터앉아 신라의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특이한 연월일시를 타고 태어나 부모도 일찍 여의고 외롭게 살아온 여인은 무언가가 잘못되면 스스로를 탓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모양이었다.
“널 질책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히려 내 탓이지. 네 주변을 더 살피지 못하고 그런 위험한 놈이 접근할 동안 알아차리지도 못했어.”
“흑….”
“울지 마. 어떻게 널 달래줘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날 더이상 쓸모없는 남자로 만들지 마.”
그의 품은 따뜻했다. 더 나은 위로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신라는 잠시 후 그를 천천히 밀어냈다. 자신은 아직 위로받을 자격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건우 선배를 더 빨리 구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든 할게요.”
신후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손을 붙잡았다.
“널 너무 몰아붙이지 마.”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건우 선배가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 녀석은 생각보다 강해. 강하고 영민하지. 우리가 구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
“……”
“이미 이쪽도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아직 상대는 모를 테니까.”
신후는 신라의 붕대 자리를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형랑이 왜 신라에게 유독 집착하는지 아직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필요에 의해서’라고 하기에는 그녀의 힘을 갈취할 수 있는 수단과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 나를 위해서 싸워줄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지켜줬듯이.
진심… 그래. 거짓말 같지만, 놈에게도 반은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다. 먼 옛날에는 인간의 악한 내면에 초점을 두고 오로지 본능적 욕망만을 추구했다면, 지금은 좀 더 다차원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상대를 내면부터 쟁취하려고 하고 있다. 요괴들에게 한정됐던 그의 소유욕이 인간으로까지 확장됐다는 소리다.
‘어림없지….’
갖고자 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에게 대적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만만치 않게 집요해져야만 했다.
신후는 주먹을 꽉 쥔 채 다른 손으로 신라의 이마에서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무거운 눈빛에는 결코 이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내어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 * *
건우는 머리 위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오래 감겨 있었던 눈꺼풀을 억지로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고급스러운 남성화가 들어왔다. 신후가 신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브랜드이지만 확실히 달랐다.
이 사악한 남자를 고작 구두로 알아보는 자신이 우스워 건우는 기침 같은 웃음을 흘렸다. 몸이 흔들리며 이미 감각이 사라진 팔이 쇠사슬에 더 옥죄여 올라갔다.
“많이 괴롭지?”
영혼의 뿌리가 같아서인지 목소리는 예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겉모습이 달라졌다고 그 잔혹함이 사라진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건우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강 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건우는 알고 있었다. 저 얼굴이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이라는 걸. 그리고 그다음에는 항상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었다.
“왜 날 죽이지 않지? 두 번은 더 쉽지 않아?”
“범죄잖아. 돌이킬 수 없는.”
“하… 지국천왕의 현신은, 사람이 아니었고?”
“우리 사이에서 신에 대한 얘기는 빼기로 하자. 뭐든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인간의 생이 좀 더 빨리 마무리되는 게 뭐 대수라고.”
“……”
“나에게 더 큰 존재는 내 눈앞에 있는 너나, 날 지옥으로 떨어뜨렸던 어둑시니, 그리고 유신라… 정도지.”
건우는 피딱지로 덮인 눈을 찡그리며 게슴츠레 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신라가 왜 당신에게 큰 존재지?”
예전에 미명귀를 포획했을 때도 신라를 향한 비형랑의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낸 적이 있었다. 이 남자가 어떤 천성을 갖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었다.
강 현은 허공을 응시한 채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와 함께 있으면 색다르고 즐겁거든.”
“……”
“마치 내가 보통의 인간 남자가 된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묘한 기분이 들어. 그래서 자주 찾아갔지. 필요 이상으로.”
건우는 강 현에게 아무런 경계심 없이 기대 있던 신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쯤 그녀가 갖게 됐을 배신감을 짐작하자 이가 절로 갈렸다. 타고난 불운 때문에 정을 주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는 여인이었다. 그것조차 정 많은 행동이라는 걸 본인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남들이 조건 없이 주는 사랑에 유달리 취약한 가련한 여인이기도 했다. 그런 여인의 마음에 침입하는 것쯤, 비형랑에게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 현이 스스로의 입으로 말했다.
“울더군. 자라경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어떤 일에도 결코 눈물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여자가 아주 괴로운 표정으로 무너졌어. 생각보다 나에게 의지를 많이 했던 거겠지.”
건우는 본인의 생각에 사로잡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강 현의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탐색의 눈길에 초조함이 더욱 짙어졌다.
“길달아… 넌 나 때문에 울어본 기억이 없지?”
“……”
“인간은 어쩌면 그렇게 나약할까. 그 내면에 조금만 침범해도 마치 거미줄에 걸린 먹이처럼 내가 흔드는 대로 흔들려오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야 그 사실이 보이더란 말이야.”
건우는 참지 못하고 이를 짓이기듯이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강 현의 초점이 돌아와 건우에게 꽂혔다. 그는 미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신이 왜 인간계를 그렇게 끔찍이 여기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는 소리야. 이렇게 재미있게 만들어놨으니, 이계의 존재들이 눈독을 들이는 건 당연지사지.”
인간을 이용하고 내기의 장기 알 마냥 생각하던 예전의 비형랑과 비교한다면, 너무도 다른 모습에 소름이 돋는 얘기였다.
하얗게 질린 건우의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 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주머니에서 연고와 반창고 같은 것들을 꺼냈다. 그리고 건우의 턱을 쥐어 들어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윽…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건우가 바르작거리며 손길을 피하려 하자 강 현은 그의 턱을 더 세게 쥐었다.
“가만히 있어. 덧나지 않게 해줄 테니까.”
“…빌어먹을… 역겨우니까 그만해!”
“네 반응을 보니 확실히 알겠네. 내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믿기지 않겠지만 해주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거거든.”
건우는 힘이 모자라 그의 손길에 따라가는 대신 입으로는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 * *
신라가 강 현의 차 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던 덕분에 조교들이 그의 본거지를 찾아내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 게다가 그는 아직 핸드폰 번호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혜령의 인맥을 통해 위치추적을 해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아마도 신라가 자신에게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없애고 싶지 않았던 것일 터다.
신라는 방학이 끝나기 전 마지막 주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도심의 카페를 찾았다. 시험 기간에 찾은 적이 있었던 국립 도서관 근처의 카페였다. 이른 아침이지만 커피와 디저트의 수준이 괜찮다는 카페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중 눈에 띄게 말끔한 용모를 가진 남자가 창가 쪽 2인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아마도 저 잘생긴 남자가 혼자 온 것인지, 아니면 약속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자기들끼리 궁금해하고 있었을 거다.
신라는 말없이 그쪽으로 걸어가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남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신라 씨….”
강 현은 책을 덮으며 신라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신라는 그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정말 있었을 뿐이다. 맛이 괜찮은 카페를 찾아두고 종종 다닌다는 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말 있을 줄은 몰랐어요. 혹시 몰라서 찾아와본 거거든요.”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면 어디로든 찾아갔을 텐데.”
“혼자서 나를 의심 없이 찾아오긴 힘들었겠죠. 당신이랑 대화라는 걸 나눠보고 싶었어요.”
강 현이 찡그린 채 입꼬리를 당겼다.
“그동안 우리가 나눴던 건 대화가 아니었나?”
“비형랑이라는 자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한 번도 없잖아요.”
“……”
강 현은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음이 웃음기가 가신 그의 얼굴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하지 않았다. 가만히 신라를 바라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건우 선배는 지금 무사한가요?”
“잘 보살피고 있어요.”
“험한 짓을 한 건 아니겠죠?”
“글쎄요…. 신라 씨 기준에서 험한 짓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잔을 들어 커피를 마셨다. 저 천사 같은 얼굴로 어떤 잔인한 행동을 하고 있을지, 신라는 짐작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강 현의 오른손에 끼워져 있는 자색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내려다봤다. 연구실 사람들은 아마도 저 반지에 그의 반쪽인 귀혼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당신이 이번 생에서 얻고자 하는 게 뭐죠?”
“얻고자 하는 것이라….”
“뭔가 목적이 있어서 귀신들을 모으고 사람의 몸을 물건처럼 거래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강 현의 입가에 잠깐 웃음기가 스쳤다.
“특별한 목적이라기보다,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뿐이에요. 귀신이든 사람이든,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됐을 때의 환희는 관찰하기에 꽤 재미있는 것이거든요.”
“나는 당신의 욕망이 뭔지 묻고 있는 거예요.”
“태생이 그래요. 호기심이 가는 것, 갖고자 하는 것, 모두 내 손에 쥐어야 하죠. 요즘에는 인간에 흥미가 많아졌어요. 그들 내면의 복잡성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장난감 같달까….”
“그러면 건우 선배를 붙잡고 있는 건 옛날 일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인가요?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떤지 궁금해서?”
“미움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배신했는데.”
신라는 평소에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건우가 간혹 불안감에 사로잡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 내막을 모두 알게 됐고, 비형랑이라는 존재가 그에게 얼마나 힘든 기억일지 이해하게 됐다.
‘조금만 더 버텨요, 건우 선배….’
그녀는 속으로 말하며, 테이블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했던 시간까지 앞으로 30여 분이 남아 있었다.
강 현은 그런 신라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지그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