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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장. 아니길 바랐다 (53/126)

52장. 아니길 바랐다

신라는 쓰러지고 나서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신후의 오피스텔 침대에서 일어났다. 뼈가 어긋났던 팔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몸 곳곳은 반창고투성이였다.

마지막에 어떤 광경을 보고 기절했었는지 떠올린 그녀는 이불을 걷어내고 당장 거실로 뛰어나가 봤다. 그곳에 신후와 건우를 제외한 모든 조교들, 그리고 화비까지 소파에 둘러앉아 있었다.

“신라, 깼니? 몸은 좀 괜찮아?”

혜령이 어색한 미소와 함께 신라를 반겼다. 무거운 분위기를 눈치챈 신라가 가만히 신후를 바라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이지만, 유독 가라앉은 그의 눈빛에서 그녀는 불길함을 느끼고 말았다.

“건우 선배는… 어디 있죠?”

“……”

“추병귀는요?”

“……”

“왜 아무도 대답을 안 하는…!”

답답함에 소리치려던 신라는 스스로 떠올린 한 가지 가능성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만약 건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상대는 몇 없었을 것이다.

“설마 비형랑이 나타났던 건가요? 그래서 건우 선배가….”

누구도 먼저 입을 열기를 꺼릴 때, 벽에 기대서 있던 신후가 움직였다. 그는 신라의 손을 붙잡고 다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문을 닫은 그는 신라의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일들을 얘기해봐.”

“추병귀에게 끌려가고 있었어요…. 귀력을 주는 척하면서 누구에게든 내가 어디 있는지 알리려고 했어요. 근처에 건우 선배가 있었는지 금방 달려와 줬고요.”

“또 누가 있었지?”

“형철이가 조연사 후문 쪽에서 먼저 습격을 당해서 쓰러졌고, 그다음 뒷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의사분이 나타나서 구해줬…”

말을 끝맺지 못한 신라가 굳어진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 사람이 왜… 거기에 있었지?”

“조연사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겠지?”

“네, 하지만 그 사람은….”

신라는 그동안의 강 현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자상하면서 사교성이 좋은 그는 직업과는 별개로 늘 고민을 들어주고 적절한 해결책도 제시해주었고, 어느새 자연스럽게 곁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 남자가 비형랑일 리 없어.’

신후는 신라의 생각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신라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선배들이 조사한 사실 중에, 그 사람이 비형랑일 수 있는 단서가 조금이라도 있었나요?”

“이전 집을 계약할 때의 계좌 명의가, 그 남자와 함께 일한 적 있는 병원장 것이었다더군.”

“또 없나요?”

“너는? 짚이는 게 없어?”

“……”

신라는 어두워진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비형랑에 대한 단서는 그녀의 주위에 있는 인물, 그리고 준호를 알고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또 귀력을 쓸 때마다 끼고 있다는 반지도…. 공교롭게도 강 현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요. 형철이는 어떻게 됐는지 아시나요?”

“영선 승려가 발견해서 방으로 옮기는 것까지 봤으니 걱정 마.”

“네….”

“그럼 좀 더 쉬어.”

신후가 조용히 방을 나서고, 신라는 생각에 잠긴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말 만에 하나 강 현이 비형랑, 혹은 그의 패거리 중 하나라면 사태가 이렇게 된 것에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건우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조연사로 왔다가 행방불명이 된 것이었다.

‘내가 나서야 해.’

신라는 옷가지 등 필요한 것을 챙기고 오겠다며 아래층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강 현의 번호를 찾았다.

“정말 그 사람이… 비형랑일까.”

그동안 들었던 얘기로는 천성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지금까지 봐 왔던 강 현의 모습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았다. 만약 강 현이 그 비형랑이라면….

저한테는 보이거든요. 모든 걸 혼자서 끌어안은 사람이 짓는 표정이 딱 그래요.

이렇게 현명한 사람이, 왜 모르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 위험하다는 일, 안 하면 안 되는 겁니까?

그 걱정의 눈길, 자상한 말투 모두 거짓이었다는 게 된다.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많은 위로를 받았었던 모양이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곧 용기를 낸 손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평소보다 길게 이어졌다. 벨 소리 한 번 한 번에도 마음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윽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신라는 긴장감을 감춘 목소리로 입을 뗐다. 상대의 차분한 숨소리가 들렸다.

「…신라 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의 반응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신라 씨, 괜찮은 거죠?」

“…네, 지금 막 일어났어요.”

「다행이다. 같은 연구실 조교님이 믿음직해 보이길래, 저는 그 미친 남자 데리고 경찰서에 갔었거든요.」

“그랬…나요? 그러면 그 남자는 지금…”

「경찰서에 있으니까 안심해요. 다친 데는 좀 어때요?」

신라는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깨물며 갈등했다.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더라도,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강 선생님….”

겨우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목소리가 많이 떨리네요. 불안정한 상태인가요?」

“진찰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우리.”

「훗…. 그랬었죠.」

“궁금한 게 있어요.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그때 왜 조연사 쪽에 있었던 거예요?”

「나요? 아는 환자분이 그 절에서 일하거든요.」

“그래요? 우연이라기엔… 너무 거짓말 같네요….”

「그러게요. 내가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가길 천만다행이었죠.」

“……”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신라는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입을 틀어막았다. 강 현에게 처음 준호의 카페를 소개해준 것은 자신이었다. 만일 강 현이 비형랑이라면, 준호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준 것도 자신이라는 소리가 된다.

‘당신이 정말 그자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신라 씨.」

통화를 끊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강 현이 먼저 적막을 깼다.

“…네.”

「우리 만나요. 지금 당신 상태가 너무 걱정되니까.」

“……”

「목소리 들으면 걱정이 좀 줄어들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당신 주위에는 당신을 보살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없는 것 같아. 무리가 아니라면, 잠깐 나와 줄래요?」

신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나… 지금 선생님 의심하고 있어요.”

「알아요. 눈치챘어요.」

“뭘 의심하고 있는지는 알아요?”

「글쎄요. 그것도 만나서 직접 듣고 싶어서. 나한테 한 번만 해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줄래요?」

신라는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추슬렀다. 지금부터는 감정이 아니라 철저히 이성을 따라 움직여야 했으니까.

“좋아요. 만나요.”

* * *

이른 아침, 신라는 아영과 함께 조연사로 형철의 병문안을 갔다. 하루 만에 의식을 되찾은 형철은 아직 현기증에 시달려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있어야 했다. 두 사람이 그의 병수발을 들고 있을 때, 조연사로 손님이 찾아왔다. 신라의 손님이었다.

“누구야?”

아영은 마당까지 함께 따라 나왔다가 신라를 찾아온 손님이 젊은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조용히 다시 형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웃고 있는 강 현에게 신라가 천천히 다가갔다.

“오셨네요.”

“또 이곳으로 오라고 할 줄은 몰랐어요. 트라우마로 남지는 않았어요?”

과장되지 않은 걱정의 말투와 진지한 눈빛, 이 모든 게 연기일 수 있을까. 신라는 꽉 쥐어지는 주먹을 숨긴 채 시선을 내렸다.

“전 괜찮아요. 움직이지만 않으면 낫는 상처니까.”

신라가 의식적으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을 깨닫고 강 현의 미소가 사뭇 씁쓸해졌다.

“신라 씨가 나에 대해 뭘 의심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단단히 화가 났나 보군요.”

“……”

신라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강 현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그가 종종 끼고 있던 반지가 오늘은 검지에 끼워져 있었다.

“날이 좋으니까 천천히 산책하면서 내려갈까요?”

강 현의 제안에 신라는 말없이 그를 따랐다. 그녀의 바지 뒷주머니에는 핸드폰에서 분리해낸 자라경이 꽂혀 있었다. 기회를 봐 그것으로 강 현의 모습을 비춰볼 작정이었다.

아침부터 절을 드나드는 이들은 많았다. 먼저 계단을 걸어 내려가던 강 현이 돌아서서 잠시 신라의 속도를 확인했다.

“걷는 데는 불편하지 않죠?”

“네.”

“다행이네. 다시 화가 나네요. 그 미친 남자, 좀 더 손을 봐줄 걸 그랬나 봐.”

“……”

강 현은 다시 계단을 내디뎠다. 신라는 그의 동태를 확인하면서, 붕대를 감지 않은 왼쪽 손을 천천히 뒷주머니 쪽으로 가져갔다. 한 발자국 앞서서 걷고 있는 그의 사각에 있으니 별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추기만 하면 돼.’

그녀가 자라경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려는 찰나, 강 현의 걸음이 멎었다. 그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모두 절 안으로 들어가거나 떠나고 난 다음이었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생겼어요. 신라 씨한테.”

그가 반쯤 돌아서서 신라를 올려다봤다. 신라는 자라경을 다시 주머니에 꽂아 넣고 그를 긴장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뭔데요?”

“전쟁에 선악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신라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강 현이 말을 이었다.

“전쟁이란 애초에 양쪽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 서로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으키는 것이죠. 그 안에, 과연 순수한 선악이 존재할까요?”

“……”

왜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라진 강 현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대답해 봐요. 신라 씨.”

“…자신들의 이익을 갈취하기 위해 먼저 침입하는 쪽이 그릇됐다고 생각해요.”

강 현은 한 발자국 신라와의 거리를 좁혔다. 신라는 다시 왼손을 천천히 등 뒤로 숨겼다.

“당신이 지금 함께하고 있는 이들이, 침입을 ‘당한’ 쪽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요?”

“…무슨 의미죠?”

“만약 그들의 존재가, 상대로 하여금 두려움을 일으키는 ‘침입자’로 여겨지고 있다면? 당신은 선한 쪽에서 싸우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두근, 두근, 두근…

강 현의 집요한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점차 빨라지는 심장 고동을 느끼던 신라는 빠르게 왼손을 움직여 자라경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는 강 현의 손이 더 빨랐다. 거울은 애매한 방향으로 틀어져 그 누구도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이 거울로 나를 비추기 전에 당신 옆의 사람들을 제대로 비춰봐야 나중에 당신이 상처받을 일이 없을걸.”

“당신…”

“내가 누구인지 알기 전에 나는 당신한테 어떤 존재였죠? 나도 당신의 친구 아니었나요?”

“이거 놔요….”

“그렇다면 나를 위해서 싸워줄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지켜줬듯이.”

“……”

애절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서는 한 점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라는 자라경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손을 쳐다본 강 현은 붕대가 감긴 신라의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쥐어 들어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라면 내가 견뎠던 그 억겁의 시간도 지워줄 수 있을 것 같아.”

신라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일 당신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면, 그 말에 흔들릴 수도 있었을 거야.”

“……”

“강 현은 내 친구가 맞아. 하지만 비형랑은 결코 아니지.”

점차 분노가 서리는 신라의 어조에 감겨 있던 강 현의 두 눈이 조용히 떠졌다. 신라는 일부러 자라경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자라경에 강 현의 모습이 거꾸로 비쳤다.

신라는 그곳에 비친 그의 본 모습을 확인하고 참담하게 두 눈을 감았다. 실낱같았던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

강 현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남자를 덤덤하게 쳐다봤다. 마치 그곳에 있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는 듯이.

두 남자는 비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한차례 불고 지나갈 때까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리 와, 신라.”

나지막한 부름에 신라의 젖은 눈이 떠졌다.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자신을 끄집어내 줄 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조금만 헛디뎌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으로 돌아섰다. 한신후가 그녀를 향해 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교수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천천히 발을 떼어 그를 향해 걸어갔다. 강 현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신후는 자신에게 다다르자마자 힘없이 가슴팍에 기대 오는 신라의 머리를 감쌌다. 안도감과 함께 짙은 연민이 차올랐다.

“울지 마. 적어도 저놈 앞에선…. 그동안 널 무방비하게 드러냈던 게 미치도록 후회되니까.”

“미안해요….”

신라는 울지 않기 위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에도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은 막을 길이 없었다.

신라의 떨리는 어깨를 말없이 바라보던 강 현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없었어도 벌어졌을 일이니까, 자책은 하지 마.”

“저주할 거야…. 당신을 저주할 거야, 비형랑….”

신라가 신후의 품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쓰게 웃은 강 현은 마지막으로 신후와 눈을 마주친 뒤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두 남자 모두 조연사로 온 목적이 신라였기 때문에 오늘은 부딪치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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