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51장. 옛 주인 (52/126)

목차

51장. 옛 주인

52장. 아니길 바랐다

53장. 변화

54장. 협동 작전

55장. 신경전

56장. 가까이에 있다

57장. 방어 실패

58장. 가을밤 소나타

59장. 가을 축제_上

60장. 가을 축제_中

61장. 가을 축제_下

62장. 인형

63장. 나태(懶怠)

64장. 해(解)

65장. 스쳐 가다

66장. 바다의 귀인

67장. 때로는 진실이 가장 괴롭다

68장. 스토커

69장. 균열

70장. 어긋나다

71장. 감금

72장. 전환

73장. 보고 싶어

74장. 재물귀

75장. 감춰두었던 것

51장. 옛 주인

비형랑은 진평왕의 사촌뻘이었다. 비록 그의 아비가 귀신이나, 그 귀신이 전대 왕이니 그렇게 보는 게 맞았다.

달빛이 내리쬐는 누각 아래에서 두 남자가 술잔을 기울였다.

“숙부께서는 짧게 재위하다 가신 것에 한이 많으셨나 보오. 당신 같은 귀신의 자식을 남겨서라도 정사를 붙들고 있으려 하시니.”

지금 왕은 전대 왕의 조카였다. 왕이 하는 말을 듣고 비형랑이 술잔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과찬이 날로 느십니다. 죽어서도 아랫도리를 주체 못 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무너뜨린 잡귀에게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시다니.”

“본인 스스로를 잡귀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요?”

“귀신에게는 귀천이 없습니다.”

온몸에서 귀티를 뿜어내고 있으면서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하는 비형랑을 보고 왕은 그저 웃었다.

“내 아비가 일찍 죽어 어린 나이에 눈앞에서 왕위를 뺏기는 걸 보았던 게 한으로 맺혀, 어렵게 얻은 왕위를 역대 가장 오래 영유해보고자 하는 꿈이 있소.”

“조정이 뒤숭숭해 쉬워 보일 것 같지는 않군요.”

“귀신의 무리 중에 인간계에 와서 조정의 일을 도울 만한 이는 없소?”

곰곰이 생각하던 비형랑이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영민하고 재주 많은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비형랑이 부른 것은 도깨비 길달이었다. 길달은 여느 철없는 도깨비들과 달라서 한 가지를 시키면 알아서 열 가지를 해결하고 왔다. 왕은 길달을 보고 만족하여 집사의 벼슬을 주고 국정을 보좌하게 하였다.

‘성미에 맞지 않구나. 어느 정도 장단만 맞춰주다가 시기 맞게 빠지면 되겠지.’

그러나 길달의 생각과는 달리 왕은 그를 관리의 양자로 만들고 대가 끊이지 않도록 후사까지 잇게 했다. 비형랑에게 이를 전했지만, 그는 왕이 원하는 대로 따르라고만 일렀다.

‘귀신으로 태어나, 인간인 척 인간계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큰 죄다.’

길달은 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곧 비형랑의 뜻 또한 거스르는 일이니, 그의 충신으로 사는 것도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비형랑의 눈은 도처에 깔려 있었다. 여우로 둔갑해 달아나던 길달은 얼마 못 가 붙잡히고 말았고, 그의 손에 모진 고문을 받았다.

“왜 도망쳤지?”

비형랑이 나무 기둥에 밧줄로 묶인 채 피 흘리고 있는 길달에게 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한 살갗이 없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길달이 피로 물든 입술을 더듬더듬 열었다.

“귀신으로 태어나… 귀신으로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오….”

“네가 보기에는 내가 주제 모르고 인간계를 넘보고 있는 것 같았느냐?”

“당신은 실패한 왕의 자식이야…. 지도자로 군림하려는 욕망은 그 그릇된 출생에서 비롯된 것이지.”

“……”

비형랑은 어떤 분노도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갛게 웃으며 길달을 바라봤다.

“역시 날 가장 잘 알아주는 것은 길달 너뿐이다.”

“……”

“아무래도 널 그냥 보내는 게 아쉬우니, 명줄이 끊길 때까지 너를 위한 성대한 연회를 열어 주마.”

비형랑이 큰 연회를 연다고 하니 얼굴을 비추지 않는 요괴가 없었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은 귀신들이라 연회는 밤낮없이 이어졌고, 길달은 그 연회장 한가운데에 묶인 채 손님들의 유희 거리가 됐다.

도깨비의 이빨이 탐이 나 송곳니를 생으로 빼 가는 요괴가 있는가 하면, 배가 고파서 살갗을 베어가는 무식한 요괴도 있었다.

비형랑은 가장 높은 전망대에서 그 광경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길달의 일부를 손에 넣은 요괴들은 그 대가로 비형랑에게 갖가지 보물을 바치고 갔다.

삼십 일째 되는 날에야 길달은 마지막이 될 숨을 내쉬고 있었다. 모두가 돌아간 뒤 조용해진 연회장에서, 비형랑은 길달의 앞으로 걸어가 그의 고개를 쥐어 들었다. 이미 원래의 얼굴을 잃은 처참한 몰골을 보고 비형랑의 입가에 아이 같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야 내 마음에 드는구나.”

“……”

“저런, 말할 수 있는 혀도 뽑혀버렸군.”

비형랑은 길달의 귓가에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봐라. 과연 그때에도 네가 그 경계 뒤에 숨어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자꾸나.”

비형랑의 아름다운 웃음이, 초점을 잃어가는 길달의 눈에 마지막으로 담긴 모습이었다.

그 후 길달은 새 왕조가 시작되어서야 작은 마을의 한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났다. 비형랑에 대적한 그의 용기를 칭찬한 염라대왕은 잘못된 주인을 섬긴 죄와는 별개로 원래 가지고 있던 도깨비의 능력을 빼앗지 않기로 했다.

동란의 시기가 지날 동안 새 왕조에 스며든 비형랑은 전보다도 더 활개를 치고 있었다. 언제고 비형랑이 다시 자신을 찾아와 유린하기 전에, 길달은 자신이 먼저 비형랑을 치기로 결심했다.

신의 사자가 그를 찾아와 그를 도울만한 귀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무리이기에 고구려의 유장이 세웠다는 북쪽의 이웃 나라까지 어둑시니를 설득하러 떠났던 것은 그 후의 이야기다.

* * *

“커헉….”

희미하게 바래진 줄만 알았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히 떠올랐다. 건우는 속에서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울컥 내뱉었다. 그것이 검붉은 피라는 것은 생리적으로 차오른 눈물 너머 아른거리는 붉은 색깔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고장 난 나사처럼 삐걱대는 목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서늘한 지하 창고 안이었다. 불시에 기습을 당해 내상을 입은 채로 놈의 근거지로 끌려온 모양이었다. 두 손은 팔뚝부터 쇠사슬에 휘감겨 천장에 고정돼 있었다. 어중간한 높이에 무릎이 접히다 만 모양새로 허공에서 흔들렸다.

끼익…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공간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차갑고 느린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림자부터 먼저 드러낸 남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건우의 앞까지 다가와, 그 앞에 놓인 원목 의자에 차분히 앉았다. 온몸에서 피 냄새가 나도 모자랄 남자에게서는 어울리지 않게도 현대인이 쓰는 은은한 남성 향수 내음이 났다.

“기분은 어때?”

건우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어 남자를 노려봤다. 남자가 측은한 듯 웃었다.

“두려움을 분노로 감추고 있구나.”

“넌…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해악(害惡)이야. 평범한 인간을 홀려서 귀력을 쓰게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인간계에 왔던 신의 목숨도 빼앗았어. 더 추락할 곳이 있기라도 한 건가?”

“저런…. 내가 가장 아끼는 심복에게 심한 말을 들으니 가슴이 아픈데.”

“난 더이상 네놈의 개가 아니야.”

“그럼 어둑시니의 개인가?”

“어둑시니의 환생은 개를 부리지 않아. 우리는 모두 그의 동료일 뿐이야.”

“동료라…. 인간은 역시 재미있네. 물리적인 힘의 차이쯤 나이, 식견, 돈, 인맥, 무엇으로든 메울 수 있지.”

“군림하려는 욕망이 넘치는 너에게 인간의 삶은 어울리지 않아.”

강 현은 팔짱을 끼며 한차례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어울리지 않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길달아. 우린 모두 평범한 인간은 될 수가 없단다. 네 꼴을 봐. 방망이를 휘두르고 저세상 것을 소환하는 네가 어딜 봐서 평범한 인간이지?”

“……”

“귀신이 인간계를 넘보는 것을 늘 경계하던 네가, 정작 한다는 일이 귀력을 써서 인간을 돕고 있잖아.”

“그건…!”

“요괴들에게는 한낱 유희일 뿐이야.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신 원하는 걸 얻어갈 뿐이라고. 그들이 소멸당할 정도로 잘못한 게 뭐가 있지? 이 세상이 오직 인간만의 전유물이라는 법이 있을까?”

아주 먼 옛날, 이 그럴싸한 말주변에 속아 넘어가 그의 밑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건우는 그때를 죽을 만큼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정당화시키려 해도 네가 하고 있는 짓은 그저 심심풀이잖아. 요괴든 인간이든, 그들의 은밀한 욕망을 부추겨서 어떤 나락으로 치닫는지 관망하고 싶겠지. 이 변태 사이코패스 같은 놈….”

“입버릇이 많이 안 좋아졌구나.”

강 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쇠사슬로 휘감긴 건우의 양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네 술수에 넘어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됐었다고 조금 우쭐했었나 봐.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그때 얘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

“……”

건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날 결정적으로 제압한 건 어둑시니였지만, 더 큰 충격으로 와 닿았던 건 인간의 환생으로 돌아와서도 나를 배신했던 잔인한 너였지. 처음은 멋대로 나에게서 떠나가는 배신을 했고, 두 번째는 날 죽이는 배신을, 그리고 세 번째는 다른 주인을 섬기는 배신을 했어.”

세상 누구보다 잔인한 남자가 잔인함을 입에 담는 것이 우스웠다. 하지만 건우는 속대로 웃을 수 없었다. 손끝부터 천천히 떨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배신…. 내가 그 단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지?”

“……”

“걱정 마. 나도 인간으로 살아오면서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 배웠거든.”

강 현의 뒤로 다른 형상을 지닌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왔다. 그 손에 가시가 돋은 묵직하고 기다란 채찍이 들려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난 너에게만은 참 관대하다니까….”

지하 계단을 밟고 저택의 1층으로 올라온 강 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뺨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도시 안에는 없을 법한 대저택이었다.

옷에 이미 물들어버린 피를 본 그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하녀들이 다가와 새 옷을 바쳤다. 걸음과 손짓이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그들은 역시나 사람의 몸을 빼앗은 귀신들이었다.

“재회는 어떠셨습니까?”

그때 이질적인 목소리가 저택 안을 울렸다. 1층에 있던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있던 이들이 걸어 나온 것이다. 모두 세 사람이었는데, 한 명은 성인 남자였으며, 한 명은 젊은 여성,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어린 소녀였다.

강 현은 건네받은 새 옷으로 얼굴을 마저 문질러 닦고 바닥에 버리며 대답했다.

“즐거웠어.”

강 현과 마찬가지로 깔끔한 양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나지막이 웃었다.

“표정은 별로 즐겁지 않으시군요.”

“반가움의 도가 지나쳐서 지금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좀 거칠게 다뤘지, 뭐야…. 내가 아직 미워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시 그를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실 생각인 겁니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지만, 예전부터 자기주장이 강했던 녀석이라 쉽지 않을 것 같군.”

“회유라면 저에게…”

그때 저택의 문이 열리면서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절름발이가 걸어 들어왔다.

“제, 제게, 제게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씻지 않아 악취가 나는 추병귀를 보고 그 자리에 서 있던 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구겨졌다. 신라에게 멋대로 접근해 귀력을 갈취하려던 추병귀는 이미 강 현의 손에 머리카락이 날 수 있는 두피까지 모두 태워져 버린 상태였다.

“끈질기군요. 왜 여태 살려두시는 겁니까?”

남자가 물었다. 강 현은 추병귀를 벌레 보듯이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시키는 것을 어떻게든 해내는 걸 보면 쓸모가 아예 없지는 않았거든.”

추병귀가 비굴하게 웃으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번에도 분명 쓸모가 있을 겁니다. 길달을 회유하기 위해서는, 돌아갈 곳을 아예 없애버리면 됩니다.”

“돌아갈 곳을 없앤다…. 바보 같은 소리군요. 우리는 그러기 위해서 지금 모여 있는 겁니다.”

남자를 힐끔 올려다본 추병귀가 강 현에게 말했다.

“어둑시니의 무리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지켜봐 온 자가 저입니다. 그들의 특징과 약점들을 누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겠습니까?”

강 현은 지루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하품을 했다. 그의 기분을 눈치챈 남자가 추병귀의 목덜미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 얘기는 저와 따로 하실까요? 주군께서 당신과는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으신 것 같으니.”

“크윽….”

추병귀가 남자에게 어디론가 끌려가자 1층의 공기가 다시 쾌적해졌다.

그때 강 현의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금세 즐거워진 얼굴을 했다.

「 유 신 라 」

“지금쯤 눈치는 채고 있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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