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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장. 재회 (51/126)

50장. 재회

지국천왕인 준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주말마다 조연사를 찾는 것은 어느새 신라의 고정된 생활 패턴으로 자리 잡았다. 단조로운 패턴이 얼마나 노려지기 쉬운 것인지 잘 아는 신후이기에, 매번 기회가 되면 그녀를 데리러 오려고 했던 것이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놓고 불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신라는 아까부터 계속 반짝거리는 핸드폰의 불빛을 보지 못했다. 기도를 끝마치고 바깥으로 나와서야 그녀는 다섯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 목록을 발견했다. 대부분 건우에게서 온 것이었다.

“건우 선배가 무슨 일로….”

그때 합장을 한 승려 하나가 웃는 얼굴로 신라에게 다가왔다.

“기도는 잘 마치셨습니까.”

“네, 스님. 덥지 않으세요?”

“오히려 날이 환해 좋습니다. 이런 날은 꼭 새로운 만남이 찾아올 것 같아서 설레지 않습니까?”

“맞아요. 날씨는 그날 기분에 영향을 많이 주니까….”

그때 승려가 아차차, 혀를 차며 허둥거렸다.

“왜 그러세요?”

“‘새로운 만남’ 하니까 손님이 오시기로 했던 게 생각이 났습니다. 안채의 청소를 아직 안 해놨는데. 이거, 혼자 힘으로는 시간에 못 맞출 텐데 어떡한다….”

조연사는 절이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친한 친구인 형철의 집이기도 했다. 신라는 그 승려에게 자신이 돕겠다며 기꺼이 나섰다. 그러자 승려가 반색하며 눈에 띄게 기뻐했다.

“이거 이거, 이렇게 감사할 때가 있나….”

신라는 승려를 따라 절의 뒤뜰 쪽으로 향했다. 깊숙이 걸어 들어가는 그를 보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은 형철도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이 안쪽으로도 건물이 있었나요?”

“예. 오래된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랬구나….”

그때 뒷산에서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형철이 돌계단 위에서 신라를 발견하고 반갑게 뛰어 내려왔다.

“신라!”

조연사 후문으로 들어온 그가 상쾌한 얼굴로 물었다.

“기도는 마쳤어? 네가 웬일이야? 절 뒤뜰까지 다 들어오고.”

“스님이 급하게 청소할 곳이 있다고 하셔서, 도우러 가는 길이었어.”

“응? 청소?”

신라 옆에 서 있는 승려를 바라본 형철은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를 지워냈다.

“이분이… 누구신데?”

“어?”

“이분은 우리 절 사람이 아닌데?”

이상한 기분이 든 신라가 그 승려를 돌아봤을 때였다. 어깨를 떨고 있던 승려는 이내 참지 못한 웃음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큭큭큭…. 머리칼이 다 타버린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승려 행세라니, 우스워 죽겠군!”

‘머리칼이 다 타버렸다’라는 말에 신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당신은, 설마….”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들어 뒷면에 붙어 있는 거울을 떼어내고 그 안에 숨겨놨던 자라경으로 승려의 모습을 비췄다. 자라경의 안에 머리칼이 다 타버린 요괴 한 마리가 서 있었다.

“형철아, 피해!”

신라가 외쳤을 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물리적으로 기습을 당한 형철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박형철!”

추병귀는 신라가 능력을 써 반항하기 전에 그녀의 양 손목을 등 뒤로 결박시키고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머리칼이 다 타버렸을 때부터 널 노리고 있었다…. 비형랑이 너만은 먼저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지. 이제 네가 나의 귀력의 원천이 되어주면 되는 거야. 큭큭큭….”

“윽… 누구 맘대로…!”

“인간을 굴복시키는 건 생각보다 쉬워. 육체적으로 고문을 하면 되거든!”

추병귀의 손이 신라의 손목을 세게 비틀어 쥐었다. 눈앞이 점멸할 정도로 큰 통증을 견디지 못한 신라가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시큰거리는 감각이 너무도 끔찍했다.

“쯧쯧쯧, 고작 이걸로 무릎까지 꿇으면 재미가 없지. 앞으로 괴로울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응?”

“네 맘대로… 순순히 끌려갈 것 같아?” “저기에 쓰러져 있는 친구의 목이 어깨 위에 무사히 붙어 있기를 바란다면 지금 잠자코 날 따라오는 게 좋을 거다.”

형철을 걸고넘어지자 역시나 반항의 기운이 잦아드는 신라를 보고 추병귀는 사악한 미소를 내지었다. 그는 신라의 자라경이 붙은 핸드폰을 급한 대로 주머니에 쑤셔 넣고 그녀의 손을 포박한 채 뒷산으로 우악스럽게 끌고 올라갔다. 걸음이 자유롭지 못한 신라는 몇 번이나 넘어지고 말았다.

“잠자코 따라와!”

“윽….”

그는 신라가 말을 듣지 않으려 하면 이미 부어올라 있는 손목을 한 번 더 비틀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신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머릿속으로 바쁘게 생각했다. 만약 연구실 사람들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조연사의 근처에 있다면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당신… 그렇게 내 귀력이 탐 나?”

추병귀가 킬킬대며 웃었다.

“어리석은 계집. 그건 인간에게 밥이 먹고 싶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럼 어디 가져가 봐.”

그녀는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서 자신의 안에 있는 귀력을 바깥으로 뿜어냈다. 그동안 간절히 그리워하기만 했던 귀력을 오랜만에 피부로 느끼자 정신이 팔린 추병귀는 허겁지겁 그 귀력을 받아마셨다. 흉하게 그을려 있던 그의 두피에서 하나둘 머리칼이 자라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 머리가 나고 있어! 하하하! 머리가 자라난다!”

그가 기뻐서 날뛰는 바람에 손에서 놓쳐진 신라는 바닥에 쓰러져 시큰한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때 추병귀의 주머니에서 그녀의 핸드폰이 떨어졌다.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추병귀의 발이 더 빨랐다. 화가 난 그는 신라의 머리채를 잡아 다시 일으켰다.

“윽….”

“어디에서 허튼수작을 부려! 더, 더! 귀력을 더 내놓으란 말이야!”

“이거… 놔…!”

“이번에는 발목을 꺾어주랴?”

그가 소름 끼치는 말을 내뱉었을 때였다. 그들이 걸어왔던 길 쪽에서 한 그림자가 기척 없이 다가와 신라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추병귀의 손목을 확 꺾어버렸다. 완전히 반대편으로 꺾어진 손목을 보고 추병귀가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악―! 누구야―!”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의 손목을 비튼 자를 돌아본 추병귀는 옥황상제라도 마주한 것처럼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여자를 이렇게 막 대하면 안 되죠.”

나긋한 말투로 말한 남자는 그대로 추병귀를 걷어차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은 신라를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아요, 신라 씨?”

그녀를 구한 것은 다름 아닌 강 현이었다. 신라는 쓰러질 것같이 혼미해진 정신을 붙잡느라 그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선…생님…?”

“저런, 많이 다쳤잖아.”

“위험해요… 도망쳐요….”

“신라 씨를 두고 어디로 도망쳐요, 내가.”

강 현의 싸늘한 시선이 추병귀에게 가서 꽂혔다. 추병귀는 몇 올 자라난 자신의 머리칼을 숨기며 재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때마침 나타나 추병귀의 퇴로를 차단한 이가 있었다. 그를 보고 강 현의 입가가 만족스럽게 당겨졌다.

“드디어 잡았다.”

땀범벅이 되어 있는 건우였다. 그는 신라를 찾으러 조연사에 왔다가 그녀가 내뿜는 귀력을 느끼고 이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신라를 저렇게 만든 건 너겠지?”

건우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추병귀에게 물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면 답은 뻔했다.

방망이를 소환한 그는 분노를 담아 한 차례 지면을 내리치려다가, 신라를 부축하고 있는 강 현을 발견하고 화를 꾹 참았다. 어차피 일반인에게는 방망이가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 힘에 지면이 갈라지는 것까지 본다면 분명 기이한 현상이라 의심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건우는 대신 그 방망이로 추병귀의 머리를 가격했다. 인간의 몸을 갖고 있는 그가 죽으면 안 되니, 죽지 않을 정도로만 힘 조절을 했다.

건우가 추병귀를 제압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안심한 신라는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강 현이 그녀를 안전하게 품에 받아냈다.

“인간의 힘으로 용케…”

강 현에게 다가오며 입을 연 건우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바꿨다.

“아니, 아무튼 고마워요. 이제 이 친구는 내가 데리고 갈게요.”

“멋있네요. 저런 미치광이를 단번에 제압하고.”

“뭐, 원래 하는 일이 이런 거라서.”

건우는 강 현의 품에 늘어져 있는 신라를 조심스럽게 들쳐 업었다. 추병귀에게서 그녀를 구해냈다는 안도감이 평소 날카로웠던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건우는 신라를 업은 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녀의 핸드폰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업은 몸이 자꾸만 흘러내려 손을 내뻗기가 쉽지 않았다.

“저기, 홈닥터 씨. 이것 좀 주워줄래요?”

허리를 한껏 숙인 채로 부탁하는 건우를 보고,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강 현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날 기억하네요?”

“쉽게 잊혀질 얼굴은 아니라서.”

“그거 칭찬이죠?”

“본인이 더 잘 알 텐데.”

건우 근처로 다가와 멈춰선 강 현이 물었다.

“무겁지 않아요?”

그 질문에 건우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뭐 여자애 하나 업은 거 가지고….”

“아니, 이거 말이야.”

슥-

팔에 끼워뒀던 방망이가 빠져나가는 소름 돋는 감각에 건우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방망이를 가져간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강 현은 해맑게 웃는 얼굴로 방망이를 가지고 던졌다 받았다 하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이거에 맞는 바람에 기절한 채로 지하 감옥에 질질 끌려갔었지.”

쿵쾅…! 쿵쾅…!

건우는 미친 듯이 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천천히 시선을 내려 강 현의 발치에 있는 자라경을 쳐다봤다.

“…!”

그곳에, 꿈에서도 만나길 바라지 않았던 이의 모습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네 ‘진짜’ 주인과 인사를 나누는 건 오랜만이지? 길달.”

사내의 미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욱 잔혹하게 다가왔다.

잠시 후 조연사에 도착한 신후는 그 안을 샅샅이 뒤지다가 뒤뜰에 쓰러져 있는 형철을 발견했다. 혀를 찬 그는 바로 뒷산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는 산 위에서 나무 기둥에 기대 앉혀져 있는 신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신라….”

그녀에게 달려간 그는 가만히 숨부터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기절만 한 상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온몸이 까지고 손목도 퉁퉁 부어올라 있는 것을 보면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상황만은 아닌 듯했다.

신후는 일단 신라를 품에 안고 주위를 날카롭게 둘러봤다. 근처에는 혈흔 몇 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는 냄새로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너무 익숙한 체취였으니까.

“길달….”

건우의 옛 이름을 중얼거리는 신후의 얼굴에 보기 드문 초조함이 떠올랐다.

‘비형랑 그놈이 먼저 널 노릴 수도 있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는데.’

비형랑은 ‘배신’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였다. 누구든 다가올 때는 반갑게 맞이해주었지만, 떠나간다고 하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 없애야 만족했다. 그런 놈에게 건우의 존재가 얼마나 깨부수고 싶은 것이었을까. 환생해서 돌아온 심부름꾼에게 삶이 묵사발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지옥에 처넣어졌으니 말이다.

애초에 요력을 잃은 추병귀가 설치고 다니는 것을 가만히 놔둔 것은, 이렇게 건우를 사로잡을 미끼로 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신후는 비형랑을 옛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안일함을 탓했다. 자신이 오랜 속죄의 삶을 살면서 조금씩 변했듯이, 그쪽도 오랜 세월 지옥 불을 견디며 많이 변했을 텐데 말이다.

“으음….”

그때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신라가 정신을 차렸다.

“교수…님….”

“정신이 들어?”

“건우… 선배는요?”

건우의 안부부터 묻는 신라를 보고 신후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꽉 다문 채 다시금 복잡해지는 감정을 추슬렀다.

“일단은 무리하지 말고 잠들어도 좋아. 너에게 해줘야 할 얘기가 많으니까.”

“다들… 무사한 거 맞죠?”

“……”

신라는 신후의 대답을 듣지 못한 채 곧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만 남은 그늘진 산속 길에 한 차례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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