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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장. 잊혀진 여인 (50/126)

49장. 잊혀진 여인

강화도에서 지낸 지 스물 닷새째, 매일 두드려지던 기와집의 문이 웬일인지 날이 저물 때까지 조용했다. 병색이 짙어진 재희가 결국 앓아눕고 만 것이다.

신후는 약재 방에서 진통에 좋은 약초를 사 들고 재희의 집을 찾았다. 식은땀에 젖은 이부자리 위에서 힘겹게 호흡을 하던 재희가 그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오…, 오셨습니까….”

그녀는 말 한마디 내뱉는 것도 숨이 벅차 힘들어했다. 이제는 정말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 것이 느껴졌다. 신후는 재희의 모친에게 약초를 달여오라 일렀다. 쓰디쓴 탕약을 삼켜낸 재희의 숨소리가 한 식경 정도가 지나자 잠잠해졌다. 그동안 신후는 재희의 머리맡에 앉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쩝니까, 도령…. 제정신이 혼미하여 오늘은 재미난 얘기를 들어도 기억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내가 네 얘기를 들어봐도 되겠느냐.”

그 말을 듣고 재희가 살포시 웃었다.

“어떤 얘기를요…?”

“네가 바라보는 나에 대해 묻고 싶다.”

세 번째 생을 살고 있는 그에게 이제 남은 생은 한 번뿐이었다. 그 안에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는 본인도 모를 일이었다. 이는 그동안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나는 요괴이냐, 인간이냐.”

“……”

재희가 옅은 숨을 내쉬며 신후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신후가 인간으로 태어나 퇴마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신이 내린 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채였다.

그간 왜 신들이 그에게 그런 벌을 내렸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이제야 그 의도를 알고 안타까워했다. 사람도 요괴도 아닌 중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며, 속죄의 생이 끝날 때까지 인간이 되기를 ‘바라기만’ 하도록 만든 것이다.

“신은 참 잔인한 벌을 내리셨군요….”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이 평범한 인간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한가.”

신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재희는 한 차례 숨을 몰아쉬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와 알게 된 한 달 사이에도 당신의 분위기는 많이 변했으니까요.”

“……”

“그럼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은 얼마나 많이 변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더 따뜻해지시겠습니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신후에게 재희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당신은 정말로 따뜻한 천성을 가졌습니다. 아직 감정이 서툴러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하시는 게 아쉽습니다.”

“놀리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재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각혈을 토했다. 신후가 다가가 그녀의 상체를 일으키고 등을 두드려 피가 기도를 막지 못하도록 했다. 그녀의 양친이 뛰쳐 들어와 딸의 상태를 살폈다.

재희는 혼미해진 정신을 놓기 전 신후의 손을 꼭 붙잡고 얘기했다.

“도령…. 제가 다시 깨어나게 되면, 떠나시는 날 한양 땅으로 함께 데리고 가주시겠습니까? 말로만 듣던 한양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신후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신후는 마당에서 그믐달을 올려다보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어린 종이 다가와 그가 마실 물을 건네며 물었다.

“나으리.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너는 연민을 느껴 보았느냐.”

“물론입죠.”

“그 감정은 원래, 이리도 아쉬움이 멎지 않는 것이냐?”

“무엇이 그리 아쉬우십니까?”

“죽음이 아니라 배움의 끝을 가장 두려워하는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의 명줄이 짧은 것이 못내 아쉬워 그런다.”

“…그 명줄이 늘어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될 수만 있다면 그러기를 바란다.”

어린 종의 표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일순간 내비친 눈빛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기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다른 차원의 눈 같았다.

사흘이 지났다.

신후는 정해진 날이 다가오자 짐을 챙기고 한 달여 간 머물렀던 기와집을 떠날 준비를 했다. 짐꾼들을 따라서 대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종에게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시켰다. 이웃집에 달려갔다 온 종이 말했다.

“이웃집 여식이 심장 병환으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그러한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곡소리가 나는 집 쪽을 가만히 바라보던 신후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여인이다.”

짐을 실은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그 뒤를 천천히 뒤따르던 신후는 마차가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서 있는 영혼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백의를 입은 여인의 영혼이었다.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그 여인인가.’

그는 못 본 척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를 향해 배시시 웃은 여인이, 그가 지나치기 전 그 자리에서 큰절을 했다.

‘죽은 영혼이 예를 갖추다니, 별난 일이다.’

마차가 길목에 들어서자, 여인은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그리고 신후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못다 한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요괴로 남을 수도 있고 인간이 될 수도 있다면,

그 따뜻함으로 인간이 되시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신후가 탄 말이 잠시 멈췄다.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영혼이 못내 마음에 걸린 신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 여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 * *

신후는 소파에서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어느새 사무실 바깥이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건우가 서 있던 자리에는 신라가 서 있었다. 추식귀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꿈은 잘 꿨어요?”

신라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재희의 얼굴이 겹쳐 보인 신후는 많은 감정이 담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잊으면 안 됐던 기억을, 너무 늦게 되찾았어.”

신라는 조용히 신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데리고 가줬어야 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한양 땅이라고, 그곳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가보고 싶다고 하길래, 예정보다 일찍 한양으로 떠날 생각이었어.”

“……”

“마지막 인사조차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어. 새까맣게 잊어서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치는데도 나에게 큰절을 올리더군. 속도 없는 게 말이야….”

신라는 소파에 함께 앉아 그의 눈가를 매만졌다. 단순한 위로의 손길인 줄 알았지만, 눈가를 스치고 간 그녀의 손가락에는 눈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내가… 울고 있어?”

깨어났을 때부터 그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는 울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 그랬었지.”

신라는 신후의 머리를 감싸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게 했다. 그녀의 셔츠가 뜨겁게 젖어 들었다.

그럼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은 얼마나 많이 변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더 따뜻해지시겠습니까….

“너희는 닮았어.”

신라의 어깨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신후가 말했다.

“그랬나요?”

“그 애도 똑같은 말을 했거든.”

당신이 요괴로 남을 수도 있고 인간이 될 수도 있다면,

그 따뜻함으로 인간이 되시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당신이 모든 감정을 되찾는 일이 후회로 끝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됐든 그건 당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없어져서는 안 될 소중한 추억이 되돌아온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신라는 그 뒤에도 한참을 그를 포옹한 채로 있었다.

신후는 그녀의 품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아늑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전율했는지도 몰라. 머리는 기억 못 해도, 영혼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가끔 물리적인 증거보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더 확실할 때가 있었다. 증명할 방법이 없더라도, 신후의 안에서는 그 한 가지 가능성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 * *

신후는 우선이 목숨을 걸고 구해 온 자라경을 균일하게 쪼개어 연구실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들은 각자 자주 들고 다니는 소지품에 자라경을 붙여 놓고 평소에는 평범한 거울로 그것을 가리고 있었다. 자칫하다가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게 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간만에 모든 조교가 모인 연구실 안에서, 건우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는 아직 남은 미션이 있었다. 바로 추병귀를 붙잡는 일이었다. 예전의 인연들을 동원해 곳곳에 감시자를 두고 함정을 파놓았으나 눈치 빠른 녀석은 번번이 그것을 피해 갔다.

‘생각해보자…. 내가 그놈의 입장이었으면 지금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턱을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요력을 다 잃었는데도 끈질기게 대항하고 있는 놈의 생각이 궁금했다. 보통은 무기력함에 절망을 느끼고 삶을 포기하거나 쥐 죽은 듯이 숨어 살 텐데 말이다.

“1번, 비형랑이 너무 무서워서 억지로 그러고 있다….”

혼자 중얼거리는 건우를 보고 혜령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집중한 건우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2번, 머리카락이 아직 자라나고 있다….”

그때 비어 있는 신라의 자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한껏 모아졌던 그의 미간이 탁 펴졌다.

3번, 요력을 모두 잃었지만, 유신라라는 존재가 있다―.

건우는 그 마지막 가능성을 깨달은 순간 자신의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가 혜령에게 다급히 물었다.

“신라 지금 어디 있지?”

“아마 친구네 절에 갔을 거야. 주말이니까. 그건 왜?”

“아… 아니야, 아직은.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건우는 자라경이 붙어 있는 핸드폰만 챙겨 들고 급히 연구실을 뛰쳐나갔다. 그때 동주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심각하게 전화를 받던 그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낸 것 같아.”

“어떻게?”

우선이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물었다.

“이런 쪽은 우리보다는 경찰 쪽이 전문이니까, 그 저택에서 수상한 뼛조각이 발견됐다고 신고했었거든.”

“구미호의 뼛조각이구나.”

“응. 어쨌든 마땅한 증거가 있어야 경찰 쪽도 움직이니까.”

“그래서, 저택의 진짜 주인을 찾았대?”

“집 명의는 노숙자 거였는데, 실제로 전 주인한테 돈을 송금한 계좌를 추적해보니까 다른 사람이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쉽게?”

“물론 한 번에는 아니고, 계좌의 주인이 정신과 병원 원장이래. 은퇴하고 신경 질환을 얻어서 계좌 관리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놨다고 하더라고.”

“혹시 이 근처에 있는 병원이야?”

“병원 이름이… 성신 병원이랬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우선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가만. 성신 병원이면… 신라가 그곳에 다니지 않았을까? 근처에 있는 정신과 의원이 몇 없잖아.”

신라는 얼마 전 모두에게 자신이 과거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사실을 밝혔었다. 그들이 겪은 고통에는 비교할 바 안 되지만, 그래도 그 고통에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혜령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던 그녀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 주치의.”

그 말을 듣고 다들 학교에서 마주쳤던 멀끔한 용모의 남자를 떠올렸다. 자신을 신라의 주치의라고 설명한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인위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침 신후가 문을 열고 연구실로 들어섰다. 그는 안에서 모든 얘기를 들은 상태였다.

“주치의?”

그의 물음에 혜령이 대답했다.

“네. 중간고사 직후에 캠퍼스 내 카페에서 마주쳤던 적이 있어요. 신라와 함께 있었던 젊은 남자를요.”

“병원에 다니고 있었던 거야?”

“아니요. 진료는 예전에 끝났다고 했어요.”

신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내렸다. 그놈이 그렇게 신라와 가까이 있는 데도 자신은 그 사실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병력이라는 은밀한 소재를 교묘히 이용해서 신라로 하여금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자신의 존재를 숨기게 만든 놈의 기지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신후는 날카로워진 얼굴로 모두에게 말했다.

“당장 그놈의 얼굴을 수소문해. 난 조연사에 가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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