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장. 추식귀
우선에게서 연락이 끊기자 초조해진 동주는 신후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곧 학기가 시작되기에 학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있던 신후는 동주가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안경을 벗어 내려놨다.
“교수님.”
“무슨 일이야.”
“우선이한테 연락이 닿지를 않습니다.”
“언제부터.”
“어젯밤부터요.”
동주는 자책하는 얼굴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생각도 없이, 자라귀가 자살하는 이들을 먹이로 삼는 습성이 있다고 말해버렸어요. 그 자식이 어떤 수단을 쓸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었던 건데….”
“위치가 어디인지는 모르고?”
“동해… 동해라고만 했어요.”
신후는 당장 잘 아는 형사에게 전화해 우선의 핸드폰을 위치추적 해보려 했다. 그때 연구실 쪽에서 강풍이 불어 닥치며 물건들이 마구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비형랑이 습격하고 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연구실에는 신라와 혜령이 있었다. 두 남자는 급하게 연구실로 들어가 보았다.
“우… 선….”
동주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신후는 표정을 굳히며 일단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신라와 혜령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눈을 의심하는 중이었다.
창문을 통해 연구실 한가운데에 착지한 사내는 얼굴을 제외한 온몸의 살갗이 검은 철갑으로 뒤덮여 있었다. 펄럭이는 감색 비단옷을 두르고 머리에는 자개로 만든 형형색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사방에 온통 짙은 바다의 냄새를 풍겼다.
사내의 팔에는 축 늘어진 우선의 몸이 있었다. 금방 바다에서 건져낸 듯 흠뻑 젖어 있는 우선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핏기가 없었다. 동주가 당장 우선에게 달려가려고 하자, 신후가 팔을 들어 그를 막아 세웠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저것은 분명 십장생의 현신, 대요괴 급이었다.
“고대 요괴들이 속죄를 하기 위해 인간의 생을 살고 있다 하여 구경이나 하러 와 봤네.”
“자라귀인가.”
신후가 묻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은 자라귀는 고개를 돌려 혜령과 신라도 눈에 담았다.
“거기다가 귀력이 끊임없이 넘쳐나는 인간 여인이라…. 수백 년 만에 지상 나들이를 와본 보람이 있군.”
신라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자라귀의 시선을 겨우 견뎌냈다. 자라귀는 동주에게 다가오라는 고갯짓을 한 다음 우선의 몸을 넘겼다.
“죽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약하면서 동시에 강한 존재는 처음 보는군.”
“왜 의식이 없는 거지?”
“스스로의 내면을 천 곱절은 더 깊이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
“그리 화낼 것 없다. 바람은 들어주었으니. 깨어나거든 비파는 잘 쓰겠다고 일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라귀는 미풍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주는 우선을 안전하게 연구실 소파 위에 눕혔다. 다친 곳이 없나 살펴보니 셔츠 안쪽에 천으로 감싸진 얼굴만 한 크기의 자라경이 있었다. 예전에 보았던 것보다 두 배는 더 큰 크기였다.
신라가 무릎을 꿇고 앉아 우선의 손을 붙잡고 귀력을 나눠줄 동안, 동주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우선의 옷깃을 세게 그러쥐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자식이… 일어나기만 해봐, 진짜 한 대 때려버릴 테니까….”
그때 꿈틀하며 우선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일어났다, 어쩔래….”
푹 잠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동주가 눈을 크게 뜨며 우선의 안색을 살폈다.
“깨, 깼어? 정신이 들어?”
화를 낼 때는 언제고 갑자기 한가득 걱정하는 목소리를 내는 동주를 보고 지켜보던 나머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신라 덕에 금방 기운을 차린 우선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근육이 땅기는 배를 붙잡았다.
“어서 말해, 때릴 거면 다시 기절하게….”
신후도 웃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자라경에 대요괴까지 행차시킨 인재를 때리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지. 자퇴 신청서 작성해와.”
“교, 교수님….”
허무한 표정으로 말하는 동주를 보고 이번에는 신라도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잠시나마 연구실 안의 긴장감이 풀린 한때였다.
* * *
건우에게는 두 가지 미션이 있었다. 하나는 적의 심부름꾼인 추병귀를 산 채로 붙잡는 것이요, 둘째는 기억을 먹는 추식귀의 행방을 찾는 일이었다.
우선순위로 치자면 추병귀를 붙잡는 것이 가장 급했으나, 수완이 좋아 일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시대를 주름잡던 요괴 집단의 으뜸가는 심부름꾼 출신이었다. 비록 그 집단은 악독한 비형랑이 이끄는 무리였지만 말이다.
추식귀를 찾는 것은 자라귀를 찾는 것보다야 쉬운 일이었지만, 그는 보기와 다르게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성미를 갖고 있어서 장단을 맞춰주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건우는 결국 본인의 기억 중 하나를 내놓고서야 추식귀를 신후의 교수실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추식귀의 모습은 검은 보릿자루를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과 비슷했다. 가운데에 뚫린 커다란 입을 벌려 기억을 먹고, 다시 입을 벌려 상대가 원하는 기억을 뱉어내는 것이었다.
- 원하는 기억이 무엇이오….
추식귀가 신후에게 물었다. 신후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바로 이전 생에 만났던 한 여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다.”
- 구체적으로 말해보시오….
“연도를 말해주면 충분하겠지? 그 당시의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기억하지 못하는 여인은 그 사람 하나뿐이니까.”
- 좋소…. 그럼 나에게 어떤 기억을 먹이로 내놓을 것이오?
“……”
- 신이 지워 없앤 기억이니 웬만한 값을 치러서는 되지 않을 텐데….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한 건우가 위협하기 위해 한 걸음 나섰지만 신후는 그를 만류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서 기억을 주워 먹고 사는 요괴답게 모르는 정보가 없는 모양이었다.
‘역시 그 기억은 신이 지운 게 맞았군.’
신후는 한차례 조소를 흘렸다. 여태껏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자신도 우스웠고, 치졸한 신들의 행동도 우스웠다.
“내 두 번째 생의 기억을 모두 주지.”
그 말을 듣고 건우가 깜짝 놀라 신후를 돌아봤다. 추식귀에게 내어준 기억은 다시는 떠올릴 수 없었다.
“교수님…!”
그러나 신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추식귀에게 의사를 확인했다.
“그걸로 충분하겠지?”
고민하는 척하던 추식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거면 적당하오….
어차피 평범한 인간이라면 존재하는 것도 몰랐을 전생의 일이다. 많은 것을 배웠지만, 기억이 지워진다고 해서 몸에 밴 것들도 지워질 리는 없었으니까.
신후는 의식을 시작하기 위해 교수실의 소파에 길게 누웠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건우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추식귀는 신후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커다란 입을 벌렸다. 그러자 신후의 이마에서 떠오른 형형색색의 구슬 같은 것이 추식귀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이 신후의 두 번째 생의 모든 기억이었다. 커다란 기억이 통째로 사라지자 신후가 감고 있던 눈을 한 번 찌푸렸다.
만족스럽게 그 기억을 음미하던 추식귀가 다시 입을 벌려 새하얀 빛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던 빛은 신후의 이마로 내려앉으며 모습을 감췄다.
눈앞이 점멸하듯이 새하얘졌다가, 희미한 파도 소리와 함께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신후의 머릿속에서 마치 영화처럼 빠르게 재생됐다.
강화도 여인의 이름은 ‘재희’였다. 바닷일을 하는 평범한 상인 집안의 장녀로, 책을 많이 읽어 박학다식하고 역사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전란이 있은 지 얼마 후 강화 땅을 밟은 신후는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기와집에 기거하게 됐다. 집과 땅을 계약하자마자 그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강화도에 실제로 머무르는 기간은 한 달여 정도인데, 자잘하게 빌리는 것이 아니라 통 크게 그 땅을 사버린 지주의 아들이 있다고. 그 지주의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두들 궁금해했다.
재희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녀가 호기심을 푸는 방법은 다른 이들과 사뭇 달랐다. 그녀는 고민하지 않고 직접 그 집에 찾아가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그때 당시만 해도 신후의 감정은 인간보다는 요괴의 것에 가까웠다. 그의 무뚝뚝한 물음에도 그녀는 기죽지 않았다.
“나는 재희라고 합니다. 옆집에 사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오.”
“그런데?”
“궁금한 건 참지 못해서 찾아와봤습니다. 강화도에는 무얼 하러 오신 겝니까?”
당돌한 여인의 물음에 신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피곤한 표정 지으실 것 없습니다. 대답만 해주시면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일이 있어서 왔다.”
“글쎄, 그 일이 무엇이냐고요.”
“말해도 모를 것이다.”
“허.”
“대답이 됐느냐?”
신후는 그대로 대문을 닫아버렸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으나 오기가 발동한 재희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그의 집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다음 날도 그녀는 신후의 집에 찾아갔다.
“강화도에 무얼 하러 오시었소!”
“일없다.”
그다음 날도.
“한양 땅에 불이라도 났소? 왜 강화도에 집을 얻은 것이오!”
“알 것 없다.”
또 그다음 날도.
“내 갓 만든 떡을 가져왔는데-”
“너나 많이 먹어라.”
열렸던 문은 멈출 새도 없이 곧바로 닫혀버리니, 한 마디 이상을 나눌 수가 없었다. 일주일 동안 같은 일을 반복하는 여인을 보고 신후는 사실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앵무새 같은 여인이 언제 포기하는지 두고 볼 참이었다.
그가 주로 행동하는 시간은 모두가 잠든 밤이었다. 그날은 보름달의 기운을 받아 어둑시니의 형상으로 변하는 때였다. 짐승의 모습으로 바닷가에 요괴 사냥을 나간 그는, 마침 사람을 해치려 하는 요괴들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가 단번에 물어 죽였다.
달이 구름에 가려지자 그의 모습이 잠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여인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당신은….”
“……”
신후가 구해준 인간은 다름 아닌 재희였다. 밤 산책을 나왔다가 큰 변을 당할 뻔한 것이다.
“이게… 당신의 진짜 모습이에요?”
그녀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
“당신은… 요괴입니까?”
“……”
신후는 대답하지 않고 여인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를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밤에는 되도록 돌아다니지 마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강화 땅 사방에 깔렸으니.”
“……”
재희는 미련 없이 떠나는 신후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기와집의 문이 어김없이 두드려졌다. 신후는 한숨을 내쉬며 대문을 열었다.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한 표정의 여인이 서 있었다.
“잡아먹히러 왔느냐.”
“당신이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요.”
“어째서?”
“그냥 느껴집니다. 당신의 선함이.”
“……”
“그리고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괜찮습니다.”
신후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만히 집중해서 느껴 보니, 씁쓸하게 미소 짓는 여인에게서 정말 남들보다 약하고 불규칙한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심장병이군.”
“역시 바로 맞히시는군요.”
“…그래서, 오늘은 또 나를 왜 찾아왔느냐.”
재희는 불치병에 걸린 병자답지 않게 들뜬 얼굴로 말했다.
“저는 제가 보지 못한 세상에 대해 듣고 배우는 것을 즐겨 합니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나, 앞으로 더 볼 수 있었던 것들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아쉬움이라면 큰 아쉬움입니다. 그래서, 도령께 제가 모르는 세상 얘기를 듣고 싶어 찾아온 것입니다.”
신후는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계속 미소 짓고 있는 재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 연민(憐愍)
세 번째 생에서야 그가 되찾게 된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 신후는 밤에는 요괴 사냥을 나가고, 낮에는 집에 찾아온 재희에게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중에는 그가 존재했던 삼국 시대 때부터의 옛날이야기도 있었고, 다양한 요괴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얘기를 듣는 동안 재희는 누구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후는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재희의 심장 소리가 옅어질수록 그의 안에서 연민이라는 감정이 더더욱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