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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장. 후생(後生), 희생(犧牲) (48/126)

47장. 후생(後生), 희생(犧牲)

혜령은 말끔한 정장 차림의 사내와 한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나눴다. 단란한 분위기를 보면 분명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묘령의 여인에게 인도를 받아 레스토랑의 근처까지 다다른 예은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늘 입고 있었던 똑같은 옷은 사고가 났던 그 날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무언가 생각이 나려는 것처럼 예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새하얗게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단편 단편 끊어져서 눈앞에 그려지더니, 곧 퍼즐이 맞춰졌다. 그녀가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돌아서려 하자 신라가 그녀를 붙잡았다.

“계속 보셔야 돼요. 그날 당신은 비슷한 광경을 봤었어요. 그렇죠? 기분이… 어땠나요?”

예은은 천천히 돌아서서 다시 레스토랑 안쪽을 바라봤다. 남자를 향해 예쁘게 웃어 보인 혜령이,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는 곧 예은을 못 본 체했다.

가야겠다.

혼잣말을 한 예은이 다시 돌아섰다. 신라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자 예은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서든 빛나는 애야. 난 저 애의 앞길에 방해만 돼. 떠나주는 게 맞아.

혜령이 생각한 것과 달리 예은에게서 원망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신라는 슬픈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동안 받은 사랑만으로 고마웠어. 저 애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들이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었거든.

이제 떠나도 될 것 같아.

내 상처는, 죽으면 자연히 잊혀지겠지.

예은이 한 걸음 내디뎠을 때였다. 높은 구두를 신고 열심히 달려온 여인이 숨이 차는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예은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때 그녀를 붙잡으러 나온 이는 없었으니까. 혜령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지만, 남자를 향해 내 짓던 딱딱한 웃음보다 훨씬 혜령다웠고, 아름다웠다.

“나도, 너랑 함께했던 시간들이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어. 이 바보야….”

예은의 눈이 슬프게 접혔다. 담담하게 떠나려던 그녀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혜령이 다가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부모님이 억지로 나가게 한 선 자리였어…. 어서 저 자리를 마무리하고 너한테 달려가서 모두 설명할 생각이었어. 처음부터 너와 상의했어야 하는데, 네가 상처받을까 봐 나 혼자 해결하려고 건방을 떨었던 거야. 그런데 그게 너한테 더 상처가 될 줄 몰랐어. 정말 미안해.”

예은은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혜령이 웃으며 그녀의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줬다.

“내가 예전부터 울지 말라고 했지, 이 못난아.”

예은은 혜령처럼 눈물을 흘리면서도 행복하게 웃었다.

난 너에게 짐이 아니었던 거지?

“평생 짊어지고 싶은 짐이라 보쌈해 가려고 했던 건데?”

정말?

웃고 있던 혜령의 눈에 한순간 참아내지 못한 슬픔이 들어차 버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 가면 안 될까…?”

결국 아이처럼 울상을 내지은 그녀가 예은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밝게 유지하던 목소리도 이제는 한없이 떨렸다. 이번에는 예은이 단단해져야 할 차례였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혜령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어. 혼자 갈 수 있으니까 마중 나오지 마. 알았지?

길 건너편에서 회중시계를 손에 쥔 지하 사자가 묵묵히 기다리고 서 있었다. 혜령의 가짜 데이트 상대가 되어주었던 동주도 숙연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먼저 가 있을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만나러 와.

혜령은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꼭 갈게. 같은 곳으로.”

예은은 혜령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잘 담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돌아서 지하 사자를 향해 걸어갔다. 지하 사자는 그녀를 데리고 먼저 병원으로 떠났다. 삶을 먼저 마무리시키고 저승으로 인도해야 했으니까.

“가요, 누나. 차 준비해놨어요.”

동주가 다가와 혜령에게 말했다. 신라는 소리 죽여 울고 있는 혜령이 쓰러지지 않도록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동주가 운전하는 차가 예은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차 안의 세 사람은 아무런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혜령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혜령이 담담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가고 있어요. 잘 좀 부탁드립니다.”

눈물이 멎은 혜령은 조수석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달리고 있는 찻길, 눈에 보이는 거리 하나하나조차 모두 연인과 함께 걸었던 곳이었다. 유독 길치였던 예은은 한 번 와보았던 장소도 헤매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래서 데이트를 할 때는 늘 혜령이 먼저 앞장서곤 했다. 어디든 자신만을 믿고 따라오던 예은이기에 더욱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길 잃으면 안 될 텐데….”

혜령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듣고 먹먹한 감정이 든 신라는, 그녀가 내다보고 있는 차창 밖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 * *

아무리 망망대해라 하지만 사람에게든 귀신에게든 모름지기 주로 머무르는 ‘영역’이라는 게 존재했다.

우선은 자라귀가 한때 자주 출몰했다던 삼척 바다 근처에 임시 거처를 두고 그의 희미한 요기를 쫓았다. 바닷가를 배회할 때는 꼭 지국천왕의 비파가 든 가방을 등에 멘 채였다.

‘도통 물 위로 올라오지를 않네.’

해가 다 저물었을 무렵,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동주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야?”

「진척은 좀 있어?」

“이 근처에 있다는 게 희미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찾지 못하고 있어.”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전화했어. 퇴귀록에 자라귀에 대한 내용이 조금 적혀 있거든.」

“그래? 뭐라고 적혀 있는데?”

「서해에 있을 때는 썰물일 때에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사냥감을 찾는대.」

“여기는 동해 쪽이야.”

「어디 보자…. 서해가 아니라면, 주로 사람들이 몸을 많이 던지는 절벽 쪽에서 은거하면서 먹이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자살해서 죽는 영혼들을 잡아먹고 사나 보지?”

「그런가 봐.」

“고마워. 도움이 많이 됐어.”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절대로 혼자 뛰어들지 말고 반드시 연락해. 알았지?」

“그래.”

우선은 전화를 끊고 넓은 바다를 둘러봤다. 민가가 많이 없어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는 유난히 높은 절벽들이 많았다. 그는 그중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절벽 쪽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새까만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절벽을 때리고 있었다.

“바다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영혼을 잡아먹는다….”

우선이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준비 운동을 하듯이 손목 발목을 털고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했다. 신발과 양말을 한꺼번에 벗고 손목시계와 핸드폰 등 물에 젖으면 안 되는 것들마저 절벽 위에 내려놓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불길함을 느꼈는지 동주에게서 한 번 더 전화가 왔다. 우선은 바닥에서 빛나고 있는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고 피식 웃기만 했다. 누가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눈치는 더럽게 빨랐다.

절벽 끝에 맨발을 걸쳐 놓은 그는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가 지니고 있는 것은 이제 비파가 든 가방뿐이었다.

‘어떻게 이 너른 바다에서 뛰어드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걸까.’

정답은 간단했다. 자라귀는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풍기는 절망감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우선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의 과거를 떠올렸다.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원망감이 심연을 뚫고 올라왔다.

- 인간들이다….

- 내가 승천하지 못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사악한 인간들의 탓이다….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시절, 그는 가난한 농민들이 오랜 시간 공들여 키워놓은 농작물들을 말려 죽이고 그 땅조차 가뭄으로 갈라지게 만들었다.

-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 다 죽어라…. 다 같이 말라 죽어버려라!

얼마나 많은 죄 없는 이들이 굶어 죽었을까. 지금 속죄의 생을 살고 있다고 하여 그 큰 죄들이 다 지워지는 것일까. 스스로의 원망감에 지쳐버린 후 인간으로서의 이성이 돌아오면 남는 것은 지독한 자기혐오였다.

우선에게서 풍겨 나온 위험한 절망감이 바닷속으로 한 겹, 두 겹, 가라앉았다. 아주 먼 곳, 빛 한 점 닿지 않는 어두운 심해에서 잠들어 있던 절망을 먹고 사는 요괴가 그 냄새를 맡고 거대한 몸집을 한 번 꿈틀거렸다. 거대한 모래바람을 일으킨 자라귀가 어둠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온다.’

그 움직임을 눈치챈 우선은 그대로 두 눈을 감으며 팔을 벌린 채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첨벙-!

아무리 한여름이라 해도 한밤중의 깊은 바닷물은 찼다. 어디가 수면인지 모를 정도로 새까매서 방향 감각도 없었다. 우선의 몸이 죽은 사람처럼 둥둥 떠 있었다. 사지에 힘이 없어 파도가 칠 때마다 몸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해류가 바뀌는 게 살갗으로 느껴졌다.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자라귀는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거대한 돌 지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모든 걸 깨물어 부술 수 있는 단단한 턱을 가진 얼굴은 등껍질 아래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 간만의 먹음직스러운 먹이로군….

지척에 있는 우선을 발견한 자라귀가 입을 쩍 벌리며 헤엄쳐 왔다. 그때 눈을 번쩍 뜬 우선이 양손에 힘을 주어 펼쳤다. 그러자 해류의 흐름이 바뀌면서 파도가 치는 방향이 이리저리 바뀌었다. 절벽을 덮고 있던 바다의 수면이 눈에 띄게 낮아지기 시작했다.

우선은 자라귀의 등껍질이 수면 위로 올라올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능력을 개방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도 해수면 위로 올라와서야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능력을 멈추었다.

- 너는 인간이 아니군.

자라귀가 경계하듯이 등껍질 안으로 몸을 숨기며 물었다. 기침하며 물을 토해낸 우선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전생에는 요괴였으나 지금은 인간이 맞소.”

- 날 유인한 목적이 무엇이냐.

“당신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요.”

- 큭큭큭…. 거래라니. 나는 지금 가지고 싶은 것이 없다.

“요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왔소.”

- 어디, 네가 나에게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들어나 보자.

우선은 자라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에게 껍질의 일부분을 나누어줄 것을 요구했다.

자라귀는 비형랑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십장생의 현신인 대요괴에게 한낱 지상의 사건쯤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이 가방에서 비파를 꺼내 들어 보이자 자라귀의 태도가 달라졌다.

“지국천왕의 상징인 징벌의 비파요. 당신이 껍질의 일부를 나누어준다면 이 비파를 드리겠소.”

- 그 비파가 진짜인지는 어떻게 아느냐.

“그때에는 나를 죽이러 와도 좋소.”

- 나를 이곳까지 부를 수 있는 절망을 늘 품에 안고 살고 있다면 내가 죽이지 않아도 너는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

“……”

우선은 대답하지 못하고 손에 든 비파만을 꽉 움켜쥐었다. 자라귀는 비파와 함께 우선에게도 흥미가 생긴 모양인지, 천천히 등껍질 밖으로 빛나는 두 눈을 드러냈다.

- 네 정체가 진짜라고 증명한다면 거래에 응하도록 하마. 자라경이 필요한 이유가 악한 것도 아니니 나중에 신들에게 책잡힐 일도 없겠지.

“나를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소.”

- 간단하지. 안으로 들어오라. 천 개의 자라경이 네 모습을 비출 것이다.

등껍질 안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커다란 동굴 같이 생긴 자라귀의 내부는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 같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여기에서 망설인다면 끝이었다. 다시는 자라경을 구경조차 할 수 없어질 것이다.

우선은 결국 바닷물을 가르고 천천히 자라귀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완전히 내부로 들어가자, 자라귀의 내부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용이 될 수 없었던 비운의 요괴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삼척 바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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