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장. 49재
신라의 덤덤한 물음에 신후는 할 말을 잃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직격을 맞은 것이다. 그는 그녀를 바라본 채 꾹 다물고 있었던 입을 어렵게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교수님도 봤잖아요. 자라경에 제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
“그건, 저에게는 ‘본래’의 모습… 전생의 모습도 현재의 모습도 찾을 수가 없다는 소리잖아요. 저는 도대체 뭐죠?”
“……”
“당신이 아무 말도 안 하니까 불안함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잖아요….”
신라가 울 것같이 우울한 미소를 내 짓자, 신후는 일단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자라경에 비치는 게 모두 정답은 아니야.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고 해서 네가 없는 것도 아니고. 단지 답을 내리기 어려운 존재라는 뜻일 뿐이야.”
“왜요…?”
신후는 설계사 예 씨에게 들었던 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해주었다. 수억 가지 인생의 굴레가 엉키지 않고 굴러가기 위해서는 죽음과 환생의 때가 정확히 정해져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 질서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튕겨져 나온 나머지들이 드물게 있을 수도 있는 거라고.
그 얘기를 듣고 신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튕겨져 나왔다고 해서 그 굴레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 것이다. 신후는 끊어진 곳이 있으면 다시 엮으면 된다고 믿고 있었다. “내가 더 자세한 이유에 대해 알아보고 있어. 자라경에 비치는 모습은 수시로 바뀌니까 거기에 얽매여서 네 불안을 키우지 마.”
정체 모를 불안함에 사로잡혀 점점 정신을 갉아먹고 있을 때, 이미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는 남자의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신라는 감정을 추스르며 천천히 신후의 품에서 떨어졌다.
“그냥 갑자기 감정 조절이 안 됐어요. 미안해요.”
“충분히 불안할 수 있는 일이야. 좀 더 기대도 좋아.”
“형철이가 말해줬어요. 모든 중생은 육도(六道), 여섯 세계를 윤회하고 있다고. 그 세계 안에는 천상도 있고, 인간도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언젠가는 준호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될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나는 그 굴레를 제대로 윤회하고 있는지 잘 모르니까 답답하고 막막했던 것 같아요.”
“지국천왕이 내 생각보다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던 모양이군.”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귀신을 끌어당기는 몸이었으니까, 애초에 마음을 준 사람들이 몇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 중 누군가 사라지면 이렇게 세상이 크게 뜯겨나가는 기분이 들어요.”
“……”
“당신도 마찬가지야.”
신라는 가녀린 손을 들어 신후의 가슴팍을 붙잡았다.
“절대… 절대 어디론가 사라지지 마.”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가 매달리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는 게 만족스러우면서도, 평소와 다른 그녀의 상태가 걱정됐다. 신후는 천천히 고개를 틀며 다가가 꾹 다물려 있는 그녀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이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멀어지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그녀와 눈을 맞춰주었다.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는 뜻을 흔들리지 않는 곧은 눈빛으로 전하는 그에 안심한 신라가 조금 젖어 있던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며 신후와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틀었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후는 아랫입술부터 찬찬히 머금다가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가 작은 혀와 어우러졌다. 오로지 불안함을 걷어내 주기 위한 위로의 입맞춤은 차분하면서도 자상했다.
사랑의 감정이 없어도 이렇듯 상대를 위로할 수 있는 따뜻한 남자가 제발 오래 자신의 곁에 머물렀으면 했다. 신후의 가슴팍 옷깃을 그러쥔 신라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이런 당신에게 사랑의 감정이 없었을 리 없어.’
그 흔적마저도 이렇게 달콤한 것을.
* * *
49재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다면 혜령에게 가서 조언을 구하라는 신후의 말을 듣고, 신라는 혜령의 집을 찾았다. 오랜만에 하는 방문이라 과일 바구니를 들고 찾아가자, 혜령은 신라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웬일이야?”
“요새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이 과일 바구니는 뭐야? 신라 너는 그냥 놀러 와도 돼~ 다른 녀석들이나 올 때 한가득 선물을 들고 와야 하는 거지.”
“그래도 일전에 며칠 묵으면서 신세 졌던 것도 있는데, 제대로 된 보답을 못 해드렸던 것 같아서요.”
“새삼스럽긴. 아무튼 고마워. 어서 들어와!”
이른 아침부터 혜령은 부지런하게 빨래를 널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신라도 그녀가 청소를 마무리하는 것을 도왔다.
“선배들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나요?”
비형랑의 무리에 대적할 준비를 하기 위해 각자 흩어진 조교들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연구실에는 얼굴을 비추는 일이 뜸해진 상태였다.
“앉아서 천천히 얘기할까? 마침 향이 좋은 차가 있어.”
“감사합니다.”
동주와 화비는 비형랑의 자취를 쫓는 역할을 맡았고, 혜령은 본가의 탄탄한 인맥을 활용해 그들에게 편리한 수단을 제공했다.
가장 바빠진 것은 우선과 건우였다. 우선은 진짜 자라귀를 찾아내 거래를 해야 하는 가장 위험한 일을 맡았고, 건우는 계속해서 연구실 사람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추병귀의 뒤를 쫓았다. 요력이 없어진 그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녀들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신라가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요….”
“나도, 동주랑 화비한테 길만 터주는 역할일 뿐인데, 뭐. 우리는 평범한 인간이니까 아무래도 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잖아. 대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하면 돼.”
“네….”
이처럼 당차고 시원스러운 성격 덕에 주변 이들은 혜령의 화려한 배경에도 편견을 갖지 않고 그녀를 대할 수 있었다. 신라는 혜령에게 늘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선배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왜 학교에는 한 번도 데려오지 않으세요?”
혜령은 잠시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뭔가 짐작한 신라는 당황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말하기 곤란하면 안 하셔도 돼요.”
“아니야. 모두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뭐.”
혜령은 잠시 방에 들어가 작은 사진첩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 안에는 그녀가 연인과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던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의 환한 미소를 보면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오롯이 느껴졌다.
“이분은….”
“지금 병원에 있어.”
“병원이요?”
“응. 1년 전쯤에 사고를 당해서, 뇌사 상태에 빠져 있거든.”
“……”
신라는 충격을 받고 사진을 다시 내려다봤다. 하지만 혜령은 분명히 자신의 연인과 대화를 나누고 왔다고 했었다. 그 말은 즉….
“선배는 그분의 영혼을 만나고 있었던 거군요.”
“맞아.”
식물인간과 뇌사 판정은 회생 가능성에서 차이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신라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웃음 지은 혜령이 손을 뻗어 그 코끝을 가볍게 두드렸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어서 물어봐.”
“그분의 영혼이 무사히 몸으로 돌아가도록 돕고 있는 건가요?”
“음- 식물인간인 사람의 영혼은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면 의식을 되찾을 수 있어. 하지만 뇌사 판정을 받은 사람의 영혼은, 몸으로 돌아가면 곧 스스로 삶을 마치고 숨을 거둘 수 있게 되지.”
“……”
신라는 안타까운 얼굴로 혜령을 바라봤다. 늘 밝고 당당한 모습만 보여주던 혜령이 이런 아픈 사랑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 교수님이 혜령 선배에게 애써서 묶어준 인연이라고 했던 건….”
“아아. 그 친구의 영혼을 교수님이 찾아내 줬거든. 늘 감사하고 있어.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기 전에 먼저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허무하게 보내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벌써… 정해진 끝이 지났다는 소리예요?”
“응. 하지만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어.”
혜령의 얼굴에 차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49재라고 하지. 죽고 난 뒤 그 사람의 다음 생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야. 그 친구는 생전에 아주 착하게 살았어. 남들에게 퍼줄 줄만 알고, 실속은 전혀 없어서 내가 늘 잔소리를 할 정도로. 그래서 생전에 이렇다 할 만한 악한 행업(行業)은 없었어.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인간의 생을 마저 걸을 운명이었지.”
“그런데요…?”
“문제는 사고 직전에 생겨났어.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겼던 무렵이거든.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 연애를 한다는 건 생각보다 상처받을 일들이 많아. 그럴수록 서로 더 대화하고 오해를 풀었어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던 거지. 내가 더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가진 그 친구는 날 원망하면서 돌아가다가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어.”
“……”
“누군가를 원망하며 죽은 이의 악업은 생각보다 그 무게가 커. 그 미움이 정말 그 대상에게 저주를 내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 악업은 다음 생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어. 자칫하면 지옥, 아수라, 아귀, 이 삼악도 중 하나의 생을 부여받을 수도 있게 돼.”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지…. 그 착한 애가 나 때문에 삼악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게….”
혜령은 붉어진 눈시울을 손가락으로 훑어냈다.
“그래서 교수님이 지하 사자에게 시간을 벌어줬어. 아직 정식으로 생을 마무리한 게 아니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그래서 나는 그사이에 그 친구와 오해를 풀려고 하고 있는 거야.”
“그랬군요….”
“하지만 그때의 감정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탓인지 최근의 기억은 모두 사라져 있어. 기억을 떠올려야 서로 얘기를 하고 오해를 풀 수 있는 건데, 그것부터가 너무 어렵더라고. 예전 얘기를 아무리 꺼내 봐도, 사고를 당하기 직전의 기억만큼은 도무지 떠올리려고 하지를 않아. 떠나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말이야….”
“그분이 가장 크게 오해했던 일이 뭔데요?”
“그건….”
혜령의 집안은 생각보다 보수적인 편이었다. 행복하게 연애를 이어가던 어느 날, 방을 청소하던 직원이 혜령의 사진첩을 발견해 그녀의 부모님에게 전했다. 그들은 딸의 소수적인 취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그 친구에게까지 해코지를 가할지도 모른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혜령은 솔직해지는 것보다 숨어서 사랑을 하는 것을 선택했다. 둘만 좋으면 그만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집안의 감시가 심해졌고, 억지로 선 자리에 보내지는 날이 많았다. 일단은 부모님의 장단에 맞춰줘야 그 압박이 사그라질 거라고 생각해, 그녀는 순순히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따랐다. 감시자가 보고 있을 때는 연인에게 차갑게 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선 자리에 나가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연인이 목격하고 말았다. 상처받은 얼굴로 조용히 돌아서는 그녀를 보았지만, 달려 나가 붙잡지 않았다. 남자와의 지겨운 데이트를 끝내자마자 달려가서 그동안 숨겼던 모든 것을 설명해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손쓸 새도 없이 뇌사 판정을 받았다. 살면서 그런 절망감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무너져 내렸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이대로 연인이 삶을 마감하면 49재 안에 삼악도의 후생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가는 혜령을 보다 못한 신후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녀의 연인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혜령은 그제야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선배를 돕고 싶어요.”
신라가 더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을 하고 말했다.
“난 괜찮아, 신라.”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분이 잘못되면 선배도 삶을 포기할 거잖아요.”
“……”
“아닌가요?”
누구보다 정이 많은 혜령이 사랑하는 연인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죄책감을 안고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혜령은 진심으로 자신을 돕겠다는 신라에게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모든 감정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탁자 위에서 얼굴을 감싼 채 오열하기 시작하는 혜령을 보고 신라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신라는 맞은편으로 건너가 떨리는 혜령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선배가 저한테 줬던 애정이 너무 고마웠어요. 이제는 제가 갚을 차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