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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장. 육도(六道) (46/126)

45장. 육도(六道)

연구실 사람들은 ‘살해’ 현장을 샅샅이 살폈다. 준호가 쓰러진 채 발견된 곳은 그가 가장 오래 머물던 카운터 안쪽 주방이 아니라 손님들이 있는 테이블 쪽이었다. 영업시간도 아닌 새벽에 그는 왜 카페에 나와 있었던 걸까.

아마도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지인은 본인일 것이라고 짐작한 신후는 준호가 자택에서 나가고 난 뒤부터 카페로 들어오기까지 어떤 행동을 했을지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가 하고많은 인간들 중 맹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이유는 아마도 쓸데없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사색을 많이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그는 아마도 자신과의 대화 후 고민에 잠겼을 것이다.

손님 테이블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을 때, 카페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을 것이다. 준호에게서 저항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아는 인물.’

이미 얼굴을 아는 인물이 카페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 이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시는 겁니까?

- 영업은 끝났습니다. 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

그리고 남자는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웃으며 준호를 향해 다가갔겠지.

- 생각할 것이 뭐 그리 많으시길래.

- 사람의 삶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답을 찾고 싶어도 눈앞에 있으면 오히려 찾아지지 않는 것이죠.

남자는 준호의 맞은편 의자에 몸을 앉혔다. 어디까지 얘기했을까. 그놈이라면 자신에게 직접 벌을 내린 준호를 재미없게 그냥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터. 죽이기 전, 단 한마디라도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당신 눈앞에 앉아 있는 걸 보면 그런가 봅니다.

- ……

- 그럼 이제 천상으로 돌아가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구경이나 해보시든지.

그다음 망설임 없이 준호의 심장을 조였을 것이다. 지척에 기대놓은 비파에 손을 뻗을 새도 없게 말이다.

“…수님. 교수님.”

여러 번 부르는 목소리에 신후가 사색을 멈추고 눈앞에 선 사람을 쳐다봤다. 신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아니야.”

놈은 교묘하다. 욕망이 넘치지만 절제할 줄 알고, 드러내길 좋아하지만, 때를 기다릴 줄 안다. 인간은 물론 요괴마저 쥐고 흔들 수 있는 영민한 놈이 드디어 직접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여우귀의 말로는 놈에게 자라경을 비추면 비형랑의 모습이 드러난다지.”

동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후는 다시 신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단서는 몇 없어. 그나마 아는 사실은 네가 만났던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거야.”

“…범위가 너무 넓어요.”

“그래. 하지만 그래도 의심해야 돼. 우리 외에 네 곁에 있는 누구든 믿지 말라는 소리야.”

“네.”

준호의 죽음을 본 이상 신라도 각오는 남달랐다.

신후는 떠나기 전 비파를 들어 자신이 챙겼다.

“비형랑의 정체를 밝힐 단서를 얻기 위해 쓸 테니, 천상에서 보고 있더라도 그렇게 배 아프지는 않겠지.”

“자라귀에게 넘길 생각이군요.”

건우가 그의 의중을 짐작하고 말했다. 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피해 없이 십장생 유래 보물을 얻으려면 이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설득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몰라. 애초에 너른 바다 어디에 숨어 사는지도 모르는 요괴이니까 말이야.”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우선이 나서서 말했다. 확실히 물속에 숨어 있는 요괴를 찾아내는 데에는 그의 능력이 가장 쓸모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우선을 믿는 신후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지국천왕의 비파를 넘겼다.

“오래 걸릴 것 같으면 그냥 돌아와도 좋아. 이쪽에도 네 힘이 필요한 일이 많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건우는 추병귀의 행적을 뒤쫓기로 했다. 아무래도 녀석이 이곳저곳에 잔꾀를 부리고 다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주는 화비와 함께 직접 비형랑의 새로운 거처를 찾아보기로 했다. 아무리 물리적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났다 해도, 인간 세계에서 그렇게 여러 번 거처를 옮겨 다닌다면 분명 서류상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 일에는 인맥이 넓은 혜령도 전적으로 나서서 돕기로 했다.

신라는 다음 날 퇴근한 후에도 준호의 빈소를 찾았다. 일부러 자신을 외롭게 만들며 살아온 그녀이지만, 누군가 떠난다는 사실은 언제나 이렇게 생경하면서 선명한 상처로 다가왔다.

신라가 홀로 상 앞에 덩그러니 앉아 있을 때, 검은 양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조객록에 이름을 적고 부의금을 낸 다음 영정사진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향을 피우고 그 앞에서 묵념했다. 상주의 손을 붙잡고 담담한 위로의 말을 전한 그는 돌아서 신라가 앉아 있는 상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아무것도 안 먹고 뭐 해요?”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신라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 선생님?”

“왜 나한테 연락 안 해줬어요?”

그는 다가와 끼니 여부를 묻는 직원에게 한 상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자 맛있게 먹었다.

“장례식에서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게 예의라고 그랬어요.”

“네…. 그런데 입맛이 없어서.”

“얼굴이 많이 상했네. 울었어요?”

“오늘은 눈물까지는 안 나요. 그냥 허무함이 크네요.”

잠시 영정사진을 바라보던 신라는 강 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어떻게 알긴요. 준호 씨네 커피 맛이 문득 생각나서 어젯밤에 찾아갔다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 근처 가게 주인한테 물어보고 장례식장 알아내서 찾아온 거예요.”

“그랬구나….”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이 참 묘했다.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나면 한없는 슬픔이 찾아오다가, 어느새 적응한 듯이 허무함만 남고, 고인과 연관된 다른 이를 만나면 잊고 있던 추억이 또 떠오르면서 적응한 줄 알았던 슬픔이 다시 비집고 흘러나왔다.

신라의 눈이 다시 촉촉이 젖는 것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쉰 강 현은 휴지를 뽑아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많이 가까웠구나. 두 사람.”

“몰라요…. 적어도 나에게는… 몇 없는 친구였으니까.”

“외로워하지 말아요. 내가 어떻게든 빈자리를 채워줄 테니까.”

그가 손을 감싸 쥐며 말하자 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강 현의 입가에 잠시 미소가 스쳤다.

그는 신라를 데리고 빈소를 나갔다. 울적해진 그녀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달달하고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 줄 작정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어제 오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빈소를 찾기 시작했다. 금방 빼곡히 채워진 조객록이 한 장 넘겨졌다. 더불어 강 현이 적었던 이름 석 자도 자연히 넘어가고 말았다.

* * *

원래 불교에 깊이 귀의하지 않았던 신라는 준호가 떠나고 난 뒤부터 곧잘 형철의 조연사를 찾아 불당에서 기도를 올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준호가 아직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형철은 그런 신라를 걱정하듯 지켜봤다. 다가가서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이의 죽음을 괜히 들췄다가 더 상처를 줄까 봐 번번이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기도를 끝내고 나온 신라를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로 데려가 돌 바위에 앉혔다. 상쾌한 공기로 심호흡을 한 신라가 미소 지으며 형철을 바라봤다.

“내가 불교를 알아서 다행이야.”

“왜 다행이야?”

“그냥. 이곳에는 윤회 사상이라는 게 있잖아. 그게 가까운 사람이 죽어도 언젠가는 만나질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주거든.”

“그런가….”

“…나에게도 그 말이 해당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신라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평범하지 않은 연월일시를 타고났다는 것을. 분명 한 곳에 살고 있음에도 늘 정착된 느낌이 아니라 떠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자라경에 비춘 ‘무(無)’의 자신을 보고 더 확실해졌다.

“인간이 죽어서 신을 만날 수 있을까?”

신라가 물었다. 형철은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네가 말하는 신이 천상의 존재를 말하는 거라면, 육도(六道) 사상에서 바라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육도?”

“모든 중생은 육도, 그러니까 천상(天上), 인간,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아귀(餓鬼), 지옥도(地獄道)… 이 여섯 세계를 윤회한다고 해. 그 말은 천상의 존재도 얼마든지 인간이 될 수 있고, 인간도 덕을 많이 쌓으면 천상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소리지.”

“그렇구나….”

“궁금한 게 풀렸으면 이제 죽음에 대해선 그만 생각하자. 네가 힘이 없으니까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걸.”

“그… 그럼 다행이고.”

형철은 붉어지는 뺨을 감추기 위해 코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한여름의 더위를 씻어 내렸다.

신라는 형철이 빌려준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피스텔 건물로 들어와 1층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는데, 마침 지하에서 올라오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어.”

그 안에는 신후가 타 있었다. 그는 옆으로 비켜서며 그녀에게 들어오라는 고갯짓을 했다.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그는 자신이 사는 층 버튼을 취소하고 그 아래층 버튼을 눌렀다.

“데려다줄게.”

“괜찮은데….”

“길이 엇갈렸어. 또 조연사에 간 것 같아서 태우러 갔는데 이미 돌아갔다고 하더라고.”

“……”

“그러니까 집 안까지라도 데려다주게 해줘.”

“…알겠어요.”

신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음 직접 도어락을 해제시키고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제 몸은 괜찮…”

신라는 신발을 벗기도 전에 큰 품에 꽉 끌어안기고 말았다. 누가 묻히고 들어온 것인지 모를 비 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이라도 앞으로는 나한테 얘기하고 가.”

“…네.”

“늘 대답은 잘하지.”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신후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고 얼굴을 쳐다봤다. 신라도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며칠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안색이지만, 그래도 아직 입술이 혈색을 찾지 못한 것이 보였다.

“경황이 없어서 교수님 상태를 살피지 못했어요. 원래는 더 쉬려고 했었잖아요. 너무 빨리 무리한 거 아니에요?”

“마냥 병상에 누워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신후는 일단 그녀를 데리고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네가 울적한 게 느껴져.”

“어떻게요?”

“네 감정이 곧 내 에너지니까.”

“……”

더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 떠나가지 않기를 바랐다. 특히 한신후는 더. 그가 준호처럼 갑작스레 떠나버린다면 더는 살아갈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신라는 준호가 남겼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네가 무슨 감정을 가졌든, 그자에게서 돌아오는 건 없을 거다. 어떤 감언이설로 널 유혹했든 모두 거짓말이야. 그에게는 애초에 사랑의 감정이 없었으니까. 신이 빼앗은 감정들 중 그 어디에도 사랑은 없었어.

신후가 애초에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거짓말이어도 상관없었다. 만약 온 힘을 다해 찾아도 찾아지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그에게 없는 감정을 자신이 대신 채워 주리라,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 심장의 구멍은…?’

자라경에 비쳤던 신후의 모습은 분명 커다란 감정을 잃어버린 상처 받은 짐승이었다.

“무슨 생각해?”

신후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짓말 같은데.”

“당신은 나한테 거짓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말해줄 수 있어요? 내가 궁금한걸.”

“뭐든 물어봐.”

거실 창밖으로 장대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신후는 그 시간마저도 즐겼다. 그녀의 시간을 독점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전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왜 전생이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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