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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장. 지국천왕 (45/126)

44장. 지국천왕

“욱….”

신라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더는 보지 못하고 치밀어오는 구토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요기의 원천을 마시고 더욱 강해진 구미호는 부채를 펼쳐 다시 그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혜령이 활을 쏘았지만 바람에 막혀 결코 그녀를 맞힐 수 없었다. 건우가 방망이를 휘둘러 만들어낸 거대한 방패도 시간만 벌었을 뿐 금방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신라는 속으로 외쳤다.

‘쓸모 있는 능력을 빌려주는 자에게 줄 수 있는 만큼 모든 귀력을 줄 테니까, 제발!’

그러자 귀신들의 목소리가 빗발쳤다.

- 나를 꺼내줘!

- 나라면 저 구미호를 이길 수 있어!

- 내가 너만 안전히 도망치게 만들어주지!

그때 갑자기 잡귀들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잠시 후 굵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에 가득 울렸다.

- 귀력을 팔아 요괴의 능력을 빌리려 하다니, 당돌한 계집이군.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서 보통의 요괴와 비교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신라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지?’

- 지금은 알 것 없다. 이미 너를 구원할 자가 가까이에 왔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계단 쪽에 있던 구미호의 수하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딛고 천천히 걸어 올라오는 사람을 보고 신라의 얼굴이 놀람으로 가득 찼다.

커다란 비파를 한 손에 들고 복도 한가운데로 걸어온 남자는 멀찍이 서 있는 구미호를 바라봤다. 아니, 시력이 없으니 그쪽으로 얼굴을 향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준호… 오빠….”

말없이 신라 앞에 선 그는 비파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조교들은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넘치는 요기를 주체하지 못한 구미호는 다시 부채를 휘둘러 공격해 왔다.

준호가 비파의 현을 한번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칼바람이 거꾸로 튕겨져 나가 구미호의 몸을 덮쳤다.

“꺄악-!”

준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권선징악의 사천왕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여진 게 아닌 듯, 살생의 죄를 저지른 구미호에게 가하는 벌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현을 한 번씩 튕길 때마다 구미호의 아홉 개의 꼬리가 그 자리에서 하나씩 잘려 나갔다. 그것은 그녀의 요력의 근원이자 생명력이었다.

“제, 제발… 살려줘….”

꼬리가 하나 남았을 때, 드디어 준호의 입이 열렸다.

“지옥으로 가서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팅-

마지막 꼬리가 잘려 나갔다. 구미호의 몸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미동조차 없어진 몸은 여느 요괴의 끝과 마찬가지로 붉은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려 사라졌다.

“지국천왕을 뵙습니다.”

우선이 먼저 예를 갖추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동주와 건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비파가 없으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한낱 맹인에 불과하다. 인간의 모습으로 너희 앞에 있으니 불필요한 예를 거두어라.”

그렇게 말한 준호는 여섯 개의 인영 사이에서 화비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는 화비의 앞으로 걸어갔다.

“비형랑을 보았느냐?”

“예?”

“두 번 묻지 않겠다.”

두려움에 찬 화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동주가 나서서 대변하려 했지만, 우선이 그를 잡아 말렸다. 화비는 덜덜 떨다가 동주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는 모습을 보고 겨우 입을 열어 대답했다.

“자… 잠깐 알며 지내긴 했지만,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부정한 거래를 했느냐?”

“인간이 되어보고 싶어 그 몸을 잠시 훔쳤었지만…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비형랑의 실체를 보았던 자이니 넌 나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라.”

신라가 나서서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준호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라, 비켜.”

“싫어요.”

“…신라.”

“지국천왕이니, 뭐니, 난 그런 거 몰라요. 그러니까 이때껏 봐 왔던 준호라는 사람에게 말하는 거예요. 한낱 요괴들에게도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감정이 있어요. 그들의 삶을 맘대로 조종하려고 하지 마세요.”

준호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살얼음판 같은 긴장 속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열거나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느새 바깥에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햇살이 뚫린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들을 비추었다.

“넌 왜 어둑시니 그자를 위해 일하는 거지?”

“제가 그 사람을 돕기로 결정했으니까요.”

“무엇을?”

“잃어버린 걸 찾는 일을요.”

“잃어버렸다는 건, 사랑의 감정인가?”

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속내를 파악하던 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무슨 감정을 가졌든, 그자에게서 돌아오는 건 없을 거다. 어떤 감언이설로 널 유혹했든 모두 거짓말이야. 그에게는 애초에 사랑의 감정이 없었으니까. 신이 빼앗은 감정들 중 그 어디에도 사랑은 없었어.”

처음 듣게 된 얘기에 신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믿을 수 없었다.

“애초에 없었던 감정을 어디에서 찾아온다는 말이냐. 어서 정신을 차리고 그 남자에게서 멀어져. 가까이 있어봤자 위험한 일에만 휘말려 들 뿐이야.”

“……”

“나도, 지금껏 널 지켜봐 온 ‘친구’로서 해주는 말이야.”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저택에서 먼저 나갔다. 신라는 더이상 친한 오빠로 대할 수 없어진 준호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몰랐다. 그것이 자신이 볼 수 있는 준호의 마지막 모습이었음을.

* * *

곧바로 신후의 자택으로 찾아간 준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네가 약해진 사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하고 왔다.”

“…이미 들었어.”

신후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사를 표해야 하나.”

“또다시 위험을 감수하고 죄인을 붙잡는 일에 뛰어들게 만든 신세를 어느 정도 갚은 것으로 하지.”

“어울리지 않게 신세타령은….”

신후는 피곤한 얼굴로 뒷목을 주물렀다. 준호는 떠나기 전 나지막이 물었다.

“정말로 네가 지금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 애(愛)의 감정이냐?”

“……”

“이미 나머지 감정은 모두 찾았으면서 왜 계속 그 여인의 환생을 찾아 헤매는 것이지?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면 없던 감정이 생겨날 것이라고 믿는 것이냐?”

“오늘따라 집요하게 구는군.”

“그녀가 네가 원하는 감정의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에 수명을 늘리는 죄를 지었다면, 너에게는 그 감정이 없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겠지.”

“……”

준호는 어렴풋이 웃었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세상 끝까지 뒤져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져보아라.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루어지게 만든다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그 심장을 못 본 척해 줄 수도 있다.”

“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분위기를 만든 준호는 곧 신후의 집에서 나갔다. 사람이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면 곧 죽을 때가 된 것이라고 했는가. 신후는 찜찜한 기분을 없앨 길이 없어 창가로 걸어가 밤 풍경을 눈에 담았다.

왠지 모르게 길었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마자 신후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그는 허무한 숨을 토해내며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것은 신라가 보낸 문자였다.

「준호 오빠가 죽었대요… 새벽에 카페에서 숨져 있는 걸 행인이 발견했다고 해요.」

* * *

장례식은 조용히 이루어졌다. 가족들과 몇몇 친지들만이 그의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었다. 신후를 비롯한 고고학 연구실 사람들은 출근하기 전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그의 장례식장을 찾았다.

신후가 먼저 준호의 영정사진 아래에 국화꽃을 올려놓고 분향했다. 잠시 묵념한 그는 상주에게 목례를 하고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뒤이어 네 명의 조교들이 한꺼번에 분향을 하고 묵념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는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찾아왔던 신이었으니, 고인이라고 볼 수 없어 큰절은 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라가 영정사진 아래에 꽃을 올려놓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상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벌써 멀게 느껴져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불과 어젯밤에 보았던 사람이 사진 속에 갇혀 있는 것에 도통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가셨습니다….”

준호의 모친이 신후를 향해 허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신후가 어떤 존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본인이 가실 날을 이미 짐작하셨는지 얼마 전에 얘기하시더군요. 분향은 하되 큰절은 올리지 않는 무리가 온다면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들이라고…. 그들만은 믿어도 된다고 말이에요.”

“……”

“먹먹하지만 그리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잠시나마 어머니라 불렸던 것이 부끄러우시지 않도록 열심히 살다 보면,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요.”

“…계시던 곳으로 잘 돌아가셨기를 빕니다.”

아쉬움이 누구보다 클 신라를 위해 신후는 다른 조교들을 먼저 학교로 보내고 함께 장례식장에 남아주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신라는 준호의 영정사진을 몇 번이나 쳐다봤다.

“혼으로 머무를 일도 없이 바로 돌아갔겠죠?”

신라의 물음에 영정사진을 돌아본 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정해진 끝에 순응한 걸까요?”

“원래 이준호라는 인간의 삶은 어제가 끝이 아니었을 거야. 애초에 명이 짧은 인간으로 태어났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역시….”

“조사해봐야 알겠지만, 그놈의 짓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지.”

상 위에 올라와 있던 신라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신후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장례를 치를 때에는 추도만 하는 거지, 화를 내는 게 아니야.”

“그렇지만….”

신라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요.”

“이제 우리가 그 억울함을 풀어줘야지.”

“용서 안 할 거예요… 그자….”

신라가 감정을 추스르고서야 두 사람은 조용히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준호의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카페로 찾아가 보니 경찰들이 이미 폴리스 라인을 걷어내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이 아니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중간에서 빠지는 편이 일이 더 수월했다.

“오셨어요?”

옷을 갈아입고 먼저 도착해 있던 우선과 건우가 그들을 맞이했다.

“언제부터 카페 안을 둘러볼 수 있지?”

신후가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치며 물었다. 우선이 대답하려던 찰나, 카페에서 걸어 나온 형사가 길 건너에 서 있는 그들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히며 다가왔다.

“왜 너희들이 여기에 있지?”

장 형사를 발견하고 우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역의 강력 범죄를 담당하고 있는 형사이니 사실 놀라운 우연은 아니었다.

건우가 나서서 일부러 껄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 카페 사장님이 아는 분이라서 장례식 좀 다녀왔수다.”

“장례식을 다녀온 건 좋은데 왜 사건 현장에 찾아오느냐는 말이야?”

“왜, 찝찝하우? 경찰들 조사는 이미 끝난 거 아니야?”

“사인이 심장마비니까 우리가 뭘 더 할 게 없잖아!”

“그래~ 아저씨 할 일은 끝났으니까 어서 돌아가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고 있으시라고.”

“이 새파란 놈이…!”

약이 오른 장 형사가 이번에는 우선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민우선. 네가 어서 말해. 뭐가 수상해서 찾아왔는지.”

“…그런 거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귀신을 속일 순 있어도 날 속일 순 없어, 임마! 거짓말이라고 네 얼굴에 다 적혀 있다고!”

우선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다. 건우가 웃음을 참는 것을 보고 우선은 어울리지 않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제 일행 말이 맞아요. 빨리 서로 돌아가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세요.”

“…잇, 야!”

“그리고 절 봐도 앞으로는 모른 척 좀 해주세요. 저랑 엮여봤자 장 형사님 신상에 이로울 게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너만 보면 붙잡고 늘어지는 줄 알아? 아주 두고 봐! 수상한 행동 해서 걸리기만 해봐라!”

장 형사는 할 말을 다 하고 씩씩거리며 경찰차에 올라탔다.

방해꾼이 사라지는 걸 보고 홀가분한 얼굴로 길을 건너려던 신후는, 순간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진 것 같아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요기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큭큭큭….”

숨어서 그들을 엿보고 있는 것은 머리칼이 다 타버려 요력의 근원을 잃어버린 힘없는 요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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