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장. 구미호
똑. 똑. 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서영의 아침잠을 깨웠다.
“주말 아침부터 누구야….”
하품을 쩍 하며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보인 얼굴은 다름 아닌 신라였다.
“어? 신라, 웬일이야? 이런 아침부…”
그런데 문이 더 열리자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다른 이들도 눈에 들어왔다. 차동주 조교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아이돌 스타 네오까지.
“어라? 아직 꿈인가…?”
멍하니 중얼거린 서영이 다시 침대로 돌아가려는 걸 보고 웃음을 흘린 신라가 그녀를 만류했다.
“서영아, 네 도움이 필요해.”
“응…?”
다시 현관 쪽을 돌아본 서영은, 점차 현실감이 들기 시작하자 입을 가리며 경악스런 표정을 내지었다.
“꿈이 아니라고?”
“응.”
“그, 그, 그럼 지금 내 자췻집에 동주 선배랑 네, 네오 님이 같이 찾아온 거야?”
“응….”
“…맙소사.”
서영은 마지막으로 볼을 아프게 꼬집어본 다음, 냉큼 방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잠그고 옷을 갈아입었다.
“유신라, 너 나중에 두고 봐~! 말도 없이 내 이상형들을 둘이나 데려오면 어떡해!”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신라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합류한 사람은 신라가 부른 형철이었다. 그는 신라의 부탁에 기꺼이 한달음에 학교로 찾아와주었다. 그렇게 다섯이서 학교 안이나 주위를 돌아다니며 배회 중인 네오의 영혼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근처에 육신이 있으면 그 영혼은 자연히 끌리기 마련이었다. 화비가 먼저 독서실에 머물러 있는 네오의 영혼을 찾아내 다른 이들을 불러 모았다.
방학이라 독서실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동주가 네오의 몸을 뒤에서 지탱하고 있는 사이, 화비가 그 몸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여우 한 마리가 폴짝 뛰어나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목격한 서영이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다.
다음 차례는 네오 본인이었다. 그의 영혼은 몸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그것을 보고 동주가 재촉했다.
“어서 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해서 죽을 수도 있어요. 여기는 병원이 아니니까.”
그 말을 듣고 네오는 일단 본인의 몸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미동도 없던 몸이 꿈틀거리더니 숨을 탁 토해냈다.
“허억, 허억….”
지켜보던 이들이 안도의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은 잠시 고고학 연구실 안에 둘러앉아 아이돌 네오가 몸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랜 시간을 배회한 이유를 듣게 됐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마치 일하는 기계가 된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대중들이 사랑해주는 게 좋아서 버티고 버텼는데…. 물론 오토바이 사고는 일부러 낸 게 아니었어요. 식물인간이 된 나 자신을 다른 사람처럼 바라보는 게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일이었는지…. 깨어나는 방법을 모르고 병실에서 넋을 놓고 지내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가더군요. 그 안에는 가족들도 있었고, 친척들, 친한 동료들, 그리고 소속사 대표까지 있었어요.”
순수하게 걱정해서 찾아와준 줄 알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았다. 친척들은 네오에게 아직 모아놓은 재산이 많을 때 돈을 빌리러 온 것이었고, 연예인 동료들은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병문안을 왔다가 비어 있는 침대에서 잠만 자다가 갔으며, 소속사 대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회사의 주식만 검색하고 있었다.
‘다시 살아나도 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자 더는 아이돌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된 게 잘 된 걸지도 몰라.’
이것은 운명처럼 주어진 휴식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이 되어 자유롭게 떠돌아다녔어도 그의 기억이 아직 흐릿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어디에 가나 자신의 얘기를 하는 팬들이 한두 명씩은 꼭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았고, 정말 자신을 사랑해준 팬들을 위해 다시 재기하고픈 마음을 먹게 됐다.
“이제 현실로 돌아와서 바쁘게 살다 보면 그 기이했던 유체 이탈 현상은 자연스럽게 잊혀지게 될 거예요.”
동주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서영이 네오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그때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그러자 네오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혹시 그때 독서실에 들어왔던 두 명…?”
“맞아요. 그쪽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했었잖아요.”
“벌써 기억이 희미해졌네…. 하지만 신기하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
네오는 그들에게 다음을 기약하고 학교를 나섰다. 서영과 형철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화비는 둔갑술로 다시 사람의 모습을 되찾았다. 하늘색 머리칼에 말끔한 인상을 가진 스무 살 언저리의 소년. 전체적인 모습은 네오와 닮아 있었지만, 확실히 다른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제 날 제자로 받아주는 거지? 스승님.”
그 물음에 동주는 무언의 긍정인 양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그걸 보고 만세를 외치며 연구실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화비를 보고 신라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추병귀는 큰 공을 세웠음에도 졸지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목숨을 걸고 구해왔던 자라경은 사실 천 년 묵은 자라귀에게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보물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구미호의 동굴에서 훔쳐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대상인 비형랑은 벌써 저택에서 사라지고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다.
“젠장….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길에서 노숙을 하며 비렁뱅이 생활을 하던 그는 결국 덜미를 붙잡혀 구미호의 동굴로 다시 끌려가고 말았다.
구미호는 꼬리가 아홉 달린 마녀였다. 그녀는 산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 총각들의 심장을 산 채로 뜯어먹기를 즐기는 잔인한 습성의 요괴였다.
보물이 가득한 동굴 한가운데에서 푹신한 의자에 앉아 족쇄를 찬 사내들의 시중을 받던 그녀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린 추병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어서 자라경을 내놓고 그 자리에서 가슴을 갈라 심장을 바쳐라.”
“자, 자라경은 지금 내게 없소.”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코웃음을 친 구미호가 들고 있던 부채를 한 번 휘두르자 그곳에서 나온 칼바람이 추병귀의 몸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으악!”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진 추병귀는 다시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울부짖었다.
“정말 내게 없소!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오!”
“누가 감히 내 동굴에서 보물을 훔쳐 오라고 시켰단 말이냐!”
“지, 지금 그 자라경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오. 그들은 날 협박하고 자라경을 가져오라고 시킨 다음 멋대로 그 거울을 깨뜨려버렸소.”
“뭐야!?”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기 위해 구미호는 일단 추병귀를 자신의 동굴 깊은 곳에 가두고 직접 자라경을 되찾으러 나가기로 했다.
감옥에 갇힌 추병귀는 구미호가 나가자마자 킬킬대며 웃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본인의 기지에 스스로 탄복하며.
* * *
월요일이 되자 어느 정도 컨디션을 회복한 건우와 우선도 연구실에 출근했다. 하지만 신후는 아직 자택에서 안정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혹시 단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싶어 비형랑이 잠시 머물렀다는 저택에 조사를 나가기로 했다. 인간으로 둔갑한 화비가 그들의 앞장을 섰다.
“이곳이 그 남자가 살았던 곳이야.”
서울 외곽 지역의 2층짜리 넓은 저택에는 예상했던 대로 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대문을 통해 들어가 널찍한 마당을 둘러본 다음 저택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형랑이 남긴 흔적들만 보고도 이미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건우를 보고 신라가 그의 손을 꽉 붙들어주었다. 건우는 그녀를 보며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온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는지 그의 손끝에 있던 잔 떨림이 차츰 사그라졌다.
1층을 거의 다 둘러봤을 때 2층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들었어?”
우선의 말에 다들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주가 먼저 앞장서서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누구 있습니까?”
그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척으로는 누군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사람이 아니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눈치채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때 2층의 방문 중 하나가 열리며 하얀 소복 차림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요괴이지만 정체를 숨기기 위해 그 귀력을 숨기고 있는 존재는, 거꾸로 그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녀도 화비와 비슷하게 요기를 숨길 줄 아는 여우류의 요괴인 것이다.
“구미호….”
건우와 동주, 그리고 우선은 그녀가 누구인지 한 번에 알아차렸다. 결코 쉽게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게다가 그들은 아직 몸의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화비. 신라와 혜령 누나를 데리고 이곳에서 나가.”
동주가 작게 속삭이자 화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들을 데리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계단 쪽에는 이미 구미호의 수하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진을 치고 있었다.
“내가 왜 찾아왔는지 잘 알겠지?”
구미호가 멀찍이 선 채 물으며 부채를 꺼내 부쳤다. 동주가 나서서 반문했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군.”
“너희들이 훔쳐 간 물건을 되찾으러 왔다. 이미 깨져서 쓸모가 없어졌다지?”
“…혹시 자라경을 말하는 건가?”
“그래. 너희들이 갖고 간 게 맞는 것 같군. 어서 그 조각이라도 내놓지 않으면 이곳에서 산 채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
길게 변명해봤자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조교들은 하는 수 없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동주와 우선은 검을 뽑아 들었고, 건우는 방망이를 소환해 허공에 한 바퀴 휘둘렀다. 혜령도 가방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보고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구미호는 부채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소복 치마 아래 숨겨뒀던 아홉 개의 꼬리를 허공으로 펼쳤다. 인간의 심장을 산 채로 잡아먹어 키워온 요기는 저택 안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얼굴도 반반한 것들이, 내 말을 잘 들으면 시종으로 부려줄 생각도 있었는데 꽤나 유감이구나.”
“여왕 놀이는 산속에 가서나 하시지.”
건우의 도발에 더이상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이 사라진 구미호는 부채를 촥 펼쳐 그들을 향해 세게 휘둘렀다. 그러자 폭풍보다 강한 바람이 날아들면서 창문을 모조리 깨부쉈다.
“으윽-!”
세 남자는 바닥에 무기를 꽂아 넣고 그 자리에서 겨우 버텨 섰다. 재빨리 푹신한 팬더로 둔갑한 화비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두 여인의 몸을 받았다.
“어디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서도 그 건방진 입을 놀릴 수 있나 보자!”
칼바람은 쉼 없이 날아들었다. 피하거나 칼로 쳐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윽!”
얼굴과 팔에 먼저 상처를 입고 만 우선이 한쪽 손에서 검을 떨어뜨렸다. 그는 남은 검으로 다시 바닥을 뚫어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그리고 구미호를 향해 손을 뻗어 능력을 썼다.
“커억!”
순간 타들어 가는 갈증을 느낀 구미호가 부채를 놓치고 목을 부여잡았다. 우선은 더 나아가 그녀의 아홉 개 꼬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불씨를 일으켰다. 그러자 모든 꼬리에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꺄악―!”
전세가 역전되는 듯싶었다. 그런데 구미호의 뒤에서 달려온 그녀의 수하가 그녀에게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가져다 바쳤다. 급한 대로 꼬리의 불부터 제압한 구미호는 타들어 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있는 것이라곤 바닥에 쏟아져 있는 물들 뿐이었고, 그마저도 우선이 증발시켜 없애버렸다.
“하는 수 없지….”
그녀는 물 양동이를 가져다 바친 사내에게 다가가, 날카롭게 세운 손톱으로 주저 없이 그 가슴을 뚫어버렸다.
“커헉….”
사내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온 손에는 아직 펄떡펄떡 뛰는 붉은 심장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얼굴 위로 들고 쥐어짜 흘러내리는 피를 꿀떡꿀떡 삼켰다. 지켜보던 이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공격할 의지마저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