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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장. 회유 (43/126)

42장. 회유

가장 오래 자라경에 모습이 비쳤던 신후는 다음날이 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동주와 신라가 그를 자택으로 옮겨 침대에 눕혔다. 다른 사람들의 상태도 보살피러 간다는 동주를 보내놓고, 신라는 신후가 누워 있는 침대맡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 없는 감정을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그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 진심으로 갈망한다면… 언젠가 찾아진다면….

- 오래 안 기다릴 거예요.

그의 감정―애(愛)는 어떻게 해야 찾아질 수 있는 것일까.

만일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일깨워주었던 여인의 환생을 찾게 된다면 그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로 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그가 더는 이렇게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없는 감정을 아무리 쥐어 짜내도 나오는 것은 검붉은 고통의 흔적뿐이다.

“차라리 없는 채로 살아가는 게 당신에게 나은 게 아닐까.”

신라는 조용히 말하며 신후의 손을 감싸 쥐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밤의 기운을 받은 탓일까, 죽은 듯이 누워만 있던 신후에게서 미동이 생겼다.

“정신이 들어요?”

신라가 물었다. 신후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을 확인했다. 그리고 방 안에 홀로 앉아 있는 신라를 확인했다.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안 나요?”

“자라경을 봤던 것만 기억나.”

“어둑시니의 모습이 됐었어요. 자라경이 깨져서야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고요.”

“다른 조교들은?”

“무사해요. 동주 선배가 전생에 도움을 줬던 여우 요괴가 모두를 되돌려 줬거든요.”

“……”

신후는 누운 채로 물끄러미 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라경에 비쳤던 신라의 모습도 그의 기억 속에 있었다. 그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진짜 모습’―그러니까 태초에 세상에 나왔을 때의 모습이 환생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더는 찾아지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보루로 남겨두었던 건데….’

신후는 속으로 생각했다. 만일 기억을 대가로 다른 기억을 불러다 주는 추식귀를 만나도 강화도 여인과 신라 사이의 연결 고리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면, 그도 자라경을 찾아 신라를 비춰보려 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자라경에 비치는 모습은 본디 수시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직접 그녀의 모습을 찾아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신라가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니까.”

“늘 그렇듯이. 실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생각 중이지.”

“그게 뭐야….”

신라가 힘없이 웃었다.

“계속 그러고 앉아 있었던 거야?”

“네. 당신도 그래 줬으니까 갚는 거예요.”

친구인 아영을 구하느라 귀력을 소진했던 날, 그가 달려와 요괴들을 물리치고 집까지 데려다줬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뒤에도 밤새도록 방 안에 머물며 그녀의 곁을 지켰었다.

신후는 작게 웃으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피를 많이 흘려 빈혈이 일어나는지 이마를 짚는 그를 보고 신라는 부엌으로 가 물을 떠 왔다.

“마셔요.”

“고마워.”

물을 모두 마셔 컵을 비운 신후는 다시 신라를 바라봤다.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못 미덥지?”

“무슨 소리예요?”

“사랑도 줄 수 없고, 지켜줄 수도 없고. 남자로서 최악이니까.”

신라는 어렴풋이 웃었다. 표정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시무룩해진 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을 ‘줄 수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랑을 ‘갈구하는’ 일뿐이었다.

“아프니까 약해지네요, 한신후 씨. 아니면 이번에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수법인가.”

“뭐든 네 마음을 움직였다면 성공이지.”

“누가 어둑시니 아니랄까 봐….”

“그건 내가 낸 상처인가?”

옷깃 사이로 보이는 붕대를 용케 발견한 모양이었다. 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올라와.”

“무리하지 말아요.”

“내가 내려가기 전에. 얼른.”

“……”

신라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녀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러 한쪽 깃을 젖혀본 신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붕대를 붉게 물들일 정도로 꽤 길고 깊게 패인 상처였다.

“풀게.”

신후는 조심스럽게 신라의 어깨에서 붕대를 걷어냈다. 신라는 걸리적거리는 셔츠 단추를 모두 끌러 다친 쪽 팔만 바깥으로 내놓았다. 신후는 검붉게 굳어 있는 핏자국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핥아 올렸다.

“읏….”

따가움과 간지러움이 동시에 느껴져 신라가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신후의 손에 허리가 잡혀 다시 끌려왔다.

“그만….”

신라의 말에도 신후는 멈추지 않고 상처 부위를 핥았다. 치료는 하지 않고 피만 핥는 그의 의중이 의심스러워 신라가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신후가 설핏 웃었다.

“눈치챘어?”

“더 아프거든요?” “치료해주면 가버릴까 봐.”

“그래서 온몸으로 페로몬을 뿌리는 중인가요?”

“가지 마. 아직 귀걸이도 새로 구해다 주지 못했잖아.”

“이번에는 어떤 걸로 가공한 보석을 가져올 거예요? 용의 뼈? 불사조의 깃털?”

“뭐든 가져다줄게.”

신후는 그대로 신라의 허리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오랜 잠에 뜨끈하게 익어 있던 혀로 작은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달콤한 타액을 훑어 삼켰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혀를 옭아매 함께 어우러지고, 뿌리까지 닿을 기세로 빨아들였다.

‘애초에 천 년 묵은 옴므파탈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딥키스에 몸이 달아오르는 사이, 어느새 속옷과 민소매만 남기고 모두 벗겨져 있었다. 어깨의 상처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늘은…”

그의 다음 행동을 저지하려던 신라는 입을 다물었다. 니트와 내의를 한꺼번에 벗어 던진 그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올리는 모습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 더군다나 희미하게 블라인드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노을빛에 아름답게 굴곡져 보이는 근육질의 몸이 퍽 색정적이었다.

“아직 요력을 부리지는 않았는데.”

입가를 당긴 채 다가온 그가 뺨을 쓰다듬는다.

“그렇게 넋을 놓으면 더 유혹해도 되는지 고민되잖아.”

“…굳이 유혹하지 않아도 될 텐데.”

“너한테는 항상 완벽하고 싶어서.”

“요력 쓰지 말아요. 반칙이니까.”

“알았어.”

부드럽게 허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에 신라의 숨결이 떨렸다. 신후는 느릿한 입맞춤을 이어가면서 그녀의 내의를 벗기고 브래지어의 끈도 끌렀다. 탐스럽게 봉긋 솟아 있는 젖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쥐면서 유두를 혀끝으로 핥아냈다.

“읏…”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그는 계속 혀로 자극하고 강하게 빨아당기기도 하면서 그녀의 몸이 뜨거워지기를 유도했다. 신후의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그러쥐던 신라가 끊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요…하게 굴지 마요….”

신후는 귀엽다는 듯 웃으며 입술을 옮겨 배꼽과 아랫배를 핥고 깨물었다. 신라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부끄러운지 다리 사이를 가리고 있는 손을 걷어내니, 이미 애액이 흘러 살짝 젖어 있는 속옷이 보였다.

신후의 눈동자에 검은 아지랑이가 한차례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그는 한층 진지해진 모습으로 그녀의 허리를 팔로 감싼 채 속옷을 벗겨냈다. 마치 아이의 옷을 벗기듯 손쉬운 동작에 당황한 신라가 꿈틀거리는 사이, 허벅지 사이로 고개를 숙이며 내려갔다.

저릿저릿하던 음부에 곧바로 닿는 입술을 느끼고 신라가 깜짝 놀라 상체를 세웠다. 그의 어깨를 다급히 밀어내 보지만 떨어지긴커녕 혀까지 음부 구석구석 핥아 올리기 시작했다.

“아아…!”

어깨의 상처를 핥았을 때보다 더 강렬하고 집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마치 생명수를 마시듯 그녀에게서 흘러나오는 애액을 모조리 빨아 마셨다. 그럴 때마다 어둑시니의 검은 기운이 요동치며 뿜어져 나왔다.

간간이 허벅지 사이를 깨물며 치켜뜨는 정욕에 물든 눈빛과 시선이 마주칠 때면 달아오른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신라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신후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후는 그 손에 깍지를 껴 잡아버리고는, 그녀가 가장 느끼는 부위를 살짝 깨물고 강렬하게 빨아당겼다.

“흐앗…!”

허리를 튕기며 고개를 한껏 젖힌 신라가 절정의 여운으로 바르르 떨었다. 신후는 올라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 맞추며 손가락으로 뜨끈하게 달아올라 있는 음부를 파고들었다. 오르가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시 유린하기 시작한 손가락을 느끼고 신라는 결국 눈물을 비추고 말았다.

“쉬이…. 괜찮아. 이 정도는 시작일 뿐이니까.”

“아… 읏….”

신후는 이전 날 이성을 잃고 보냈던 하룻밤을 반성하듯 침착하고 신중했다. 신라가 어떤 부위에서 가장 느끼는지, 어떤 동작을 좋아하는지 모조리 파악하려는 기세였다. 그녀의 이성이 돌아오려고 할 때마다 격렬한 키스로 다시 정신을 빼놓았다. 결국 신라는 신후의 손가락을 흠뻑 적시고 나서야 두 번째 절정을 맞이하며 침대에 널브러졌다.

‘왜 오늘은 그때처럼 다급하지 않지?’

신라는 숨을 헐떡이며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궁금증을 눈치챈 신후가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해주었다.

“잠시 짐승의 모습으로 변했었기 때문에 지금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 같아.”

“……”

“물론 이쪽은 그때와 똑같지만.”

신라가 고개를 내리기도 전에, 신후의 분신이 젖은 입구로 쑥쑥 빨려 들어갔다.

“아…!”

“크윽….”

쾌감을 참아내듯 찡그린 콧등이 퍽 섹시했다. 신라는 저도 모르게 그의 콧대와 뺨을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은 신후가 그 손을 감싼 채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푹 깊숙이 쑤셔지는 감각에 신라는 몸서리치며 입술을 깨물었다. 시야가 흔들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격한 움직임에도 입술은 멋대로 야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법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후도, 신라의 그런 모습을 보고 점차 침착함을 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동작에 맞춰 함께 흔들리고 있는 여인의 아름답고 색정적인 모습을 오롯이 눈에 담았다. 움켜쥐고 있던 침대의 프레임이 허무하게 박살 나고, 베개의 천이 찢어져 솜털이 삐져나왔다.

“신라….”

신후는 땀 범벅이 된 신라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것처럼 집요했다.

“크윽….”

결국 한 차례 심장에 통증이 찾아들었다. 없는 감정을 뱉어낼 수 없기에 고장 난 심장이 아우성쳤다.

“한신후….”

초점을 잃은 신라가 흔들리는 손을 들어 신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겨우 통증이 멎은 신후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는 신라가 느끼는 곳만을 찾아 헌신적으로 움직였다.

“아으…아…!”

신라는 몇 번이고 그에 의해 절정을 맞이했다. 침대에서, 소파에서, 그리고 창가에서. 신후는 신라의 사지에서 힘이 죽 빠질 때까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쯤에서 놔 주어야 한다고 이성이 외쳤지만, 그녀를 평생 붙잡을 수 없을 거라는 초조함과 불안함에 도저히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매일 녹초를 만들어 어둠 속에 가둬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흐윽-!”

창틀에 기댄 채 그의 것을 뒤쪽으로 받아내던 신라가 허벅지 안쪽을 파르르 떨며 무너져내렸다. 그녀의 것인지 신후의 것인지 모를 체액이 다리 사이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신후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쓰러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사람… 말려 죽일 셈이에요…?”

신라가 고개만 돌려 신후를 노려봤다. 힘이 잔뜩 빠져 크게 위협이 되지는 않는 모양새였다. 신후는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미안. 네가 너무 야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

“야해지게 만들어놓고….”

“분명히 해두자면, 요력은 쓰지 않았어.”

“어련하시겠어요.”

신후는 웃으며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신라는 먼저 몸을 씻고 옷을 입었다. 신후는 침대에 앉아 그녀를 배웅했다.

“끝내 자고 가지는 않는군.”

“저도 제집이 있으니까요.”

“피곤해져서 잠들 때까지 괴롭히려고 했는데, 마음이 약해지는 바람에.”

“마음 약했던 것치고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거든요.”

“지금 쓰고 싶네. 요력.”

“아서요. 어둑시니의 유혹도 회귀본능은 못 이기니까.”

신라는 짧게 목례하고 돌아서 그의 방을 나섰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신후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기운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그 자취를 느껴봤다.

아직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우선과 건우는 집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대신 연구실은 동주와 혜령이 지키고 있었다.

정체를 드러낸 화비는 계속 네오의 모습인 채로 연구실에 붙들려 있었다. 사실 갈 곳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그들은 연구실 소파에 둘러앉아 취조하듯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둔갑을 할 수 있으면서 왜 멀쩡한 사람의 육체를 훔친 거야?”

동주의 옆에 앉은 혜령이 물었다. 그러자 화비가 묵묵히 앉아 있는 동주의 눈치를 보며 답했다.

“둔갑을 하면… 어쩔 수 없이 요기가 드러나니까…. 그리고 예전부터 인간이 되어보고 싶었어….”

“왜?”

“그거야… 스승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날 거니까. 나도 인간이 되지 않으면 함께 지내기가 힘들잖아.”

‘스승님’이라는 표현에 혜령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잠자코 있던 동주가 입을 열었다.

“난 아직 널 제자로 받아준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리고 사람의 몸을 훔친다고 해서 네가 사람이 되는 게 아니잖아? 그건 큰 죄야.”

화비의 고개가 시무룩하게 숙여졌다.

“죄송합니다….”

“인간의 몸은 어떻게 구한 거야? 비형랑이 준 건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오래 수소문하던 중에, 건너 건너 연락이 왔어요. 자기를 비형랑이라고 소개한 자가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했어요.”

“그 방법이 뭔데?”

“자기에게 혼의 매개체가 있다고, 그게 있으면 인간의 혼을 그곳에 가두고 내가 그 육신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제안을 냉큼 받아들인 거야?”

동주가 눈썹을 한껏 찌푸리며 묻자 화비가 깜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나쁜 일이니까 하기 싫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방법이 또 하나 있다고 했어요.”

“그게 뭔데?”

“간혹 물리적인 사고를 당하면 혼이 육신을 빠져나와 정처 없이 떠돌고 다니는 인간 종류가 있다면서, 살아가기를 포기한 혼들이 버려버린 육신은 대신 차지해도 상관없지 않냐고 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동주는 잠시 혜령과 시선을 교환했다. 아마도 식물인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혜령은 분노에 차올라 가운데에 놓여 있는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깜짝 놀란 화비의 몸이 튀어 올랐다.

“무슨 그런 놈이 다 있어!? 가족이, 친구가, 정신을 차리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떡하고? 웬 다른 귀신의 혼이 들어가 있는 걸 알게 되기라도 하면 그 절망감은 어떻게 하냐고!”

“아, 안 들키면 되지 않아…?”

소심하게 중얼거린 화비는 동주의 험악한 표정을 보고 귀가 축 처진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계속 그 몸 안에 있겠다…?”

“아, 아니요! 주인을 찾아서 돌려주려고요. 사실 요새 계속 학교에 찾아왔더니 본능적으로 끌렸는지 이 몸의 주인인 혼이 학교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난 주인 없는 몸을 차지한 거니까 혼의 매개체를 쓰지 않았거든요. 돌려주는 건 쉬울 거예요.”

이번에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혜령이 그것을 물으려 할 때 연구실의 문이 열리고 신라가 걸어 들어왔다.

“신라!”

혜령은 벌떡 일어나 신라를 끌어안았다.

“많이 놀랐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다들 무사하니까.”

신라는 화비의 옆에 몸을 앉혔다. 작게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화비는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움츠리고 있던 어깨를 폈다.

“고마워. 이름이 화비라고 했지?”

“…응….”

“죄를 짓는 건 쉽지만 그걸 뉘우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야. 내 말을 신중하게 받아들여 줘서 고마워.”

그녀는 작은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얼굴을 붉힌 화비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왜, 왜 이래?”

“칭찬하는 거야.”

“칭찬…?”

“칭찬받을 만한 일을 했으니까.”

그 말에 우쭐한 기분이 들려던 화비는 그전에 또 저지른 잘못이 생각나서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사실 스승님이 사는 곳 근처에서 동생의 백을 발견한 건 저예요. 인간이 죽고 남겨진 혼백은 다른 산 사람들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에게 얘기했어요. 그 백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동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곧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왠지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지금 중요한 건 지나간 일이 아니고, 네가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일들을 최대한 돌려놓는 거야. 알겠어?”

“네….”

혜령이 아까 하려던 질문을 꺼냈다.

“그럼 넌 비형랑의 얼굴을 본 거네?”

신라도 뒤늦게 그 가능성을 깨닫고 화비를 돌아봤다. 그러나 화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날 끝까지 믿지는 않았는지, 그자는 내 앞에서만큼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어. 늘 가면 같은 걸 쓰고 있었지. 거처도 수시로 옮겨 다니고. 신기한 건, 지척에 있어도 요기를 단 한 점도 느낄 수 없었다는 거야. 내가 요기를 숨기는 수준과는 달라. 정말 감쪽같이 인간 같거든. 그래서 처음에는 정말 그냥 인간인 줄 알았어.”

동주가 정정했다.

“환생했으니 본체는 우리처럼 인간이 맞아. 귀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 반쪽짜리 귀혼을 신도 찾을 수 없는 물건에 숨겨놓았기 때문이겠지.”

“신도 찾을 수 없는 물건…?”

“그자가 저승의 감옥을 탈출할 때 훔쳐서 달아났다는, 신이 저지른 죄의 증표.”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걸리는 게 있어요. 그 사람이 가끔 귀력을 발휘할 때는 꼭 손에 반지를 끼고 있었거든요. 그게 없을 때는 능력을 쓰지 않았고요.”

“반지라….”

“그리고 자라경을 비추면 비형랑의 모습이 보여요. 자라경을 구해온 추병귀가 그랬어요.”

“…그놈은 귀력을 모두 잃어서도 아직도 그쪽에 빌붙어 있나 보군.”

맥락이 조금은 잡히는 느낌이었다. 동주는 쓸 만한 정보를 물고 온 화비에게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좋아. 더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네!”

화비가 뺨을 붉히며 냉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존댓말은 그만둬. 원래의 주인에게 그 몸을 되돌려주기 전까진 널 가르칠 생각 없으니까.”

“으, 응….”

신라는 화비가 차지하고 있는 몸의 진짜 주인인 네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를 군인 원혼의 공격으로부터 구해주었던 그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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