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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장. 여우귀 (42/126)

41장. 여우귀

“크윽….”

심장 언저리를 움켜쥔 신후가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모습이 실제로 자라경에 비친 형상으로 변해갔다. 옷이 뜯어질 정도로 몸집이 커지고 손톱은 짐승의 것처럼 자라났다. 거칠게 호흡하는 입가부터 검은 털로 빠르게 뒤덮여 갔다.

“한신후…!”

신라가 그의 변화를 막아보려는 듯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고통에 포효한 짐승이 힘을 조절하지 못하고 신라를 거칠게 밀쳐냈다. 날카로운 손톱에 할퀴어진 그녀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윽….”

상처 난 어깨를 감싸며 쓰러진 신라는 아직도 자라경으로 신후를 비추고 있는 배 교수를 발견했다.

‘저 거울을 어떻게든 해야 해…!’

그러나 마땅한 수단이 생각나지 않았다. 건우의 상태도 신후와 다를 바 없었기에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혜령은 외근을 나간 상태였다.

그저 우선과 동주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나 싶어 절망에 차 있을 때, 연구실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넌….”

신라가 허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판단하는 중이었다. 그가 뜬금없이 왜 연구실에 나타났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왠지 상황을 악화시키러 온 것 같지만은 않았다.

네오는 배 교수의 손에 들린 자라경을 발견하고 그녀를 노려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몸 안에 있는 몽접귀를 말이다.

“네놈은 또 뭐야!”

방해꾼의 등장에 신경이 곤두선 배 교수가 그를 향해 자라경을 불쑥 내밀었다. 네오는 피하지 않았다. 신라는 그곳에 비친 형상을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거울 속에는 푸른 털의 여우 한 마리가 경계하듯이 털을 곤두세운 채로 서 있었다.

“이 건방진 여우 놈이-!”

네오는 달려드는 배 교수를 가볍게 피하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주변으로 푸른 불덩이가 하나둘 나타났다.

“자라경으로 태초의 모습이 되어버린 이가 돌아가는 방법은, 그 태초의 모습을 보여준 거울을 부정하는 것뿐이지.”

그렇게 말하자마자 네오가 조종하는 푸른 불꽃이 배 교수를 덮쳤다. 요괴만을 공격하는 불빛이라 현재 몸의 주도권을 가진 몽접귀가 오롯이 그 통증을 느껴야 했다. 몽접귀는 뜨거움을 견디다 못해 자라경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네오가 달려가 그 자라경을 빼앗아 왔다.

그 사이 신라는 연구실 구석의 그늘진 곳에 앉아 신음하고 있는 검은 짐승에게로 다가갔다. 뚫린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두렵다거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미안….’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것이 그가 받는 고통의 실체였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알아주지 못한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 그르릉… 그르릉….

고통을 참는 숨소리가 못내 가엽다.

신후는 눈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여인을 검고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여인을 바라보자 뚫려 있는 가슴에서 또 한 차례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다.

신라는 다시 그의 커다란 몸을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신후도 그 온기를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 이게 당신의 진짜 모습이에요?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을 때, 바다 내음을 가득 품고 다니던 여인의 목소리가 신후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 신은 참 잔인한 벌을 내리셨군요.

‘아아… 분명 너와 닮았어….’

신후는 신라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라경을 빼앗은 네오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건우에게 먼저 달려가 그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리고 비추는 상태에서 날카로운 돌을 꺼내 거울의 모퉁이를 세게 내리찍었다. 거울의 일부가 깨지면서 건우의 모습이 담긴 부분도 깨져나갔다. 그러자 도깨비의 형상을 하고 있던 건우가 차츰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신후에게로 다가가 자라경으로 그의 모습을 비추며 그 거울을 깼다. 검은 짐승의 몸이 한차례 꿈틀거리더니 이내 검은 털이 사라지며 그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신후는 창백해진 얼굴로 신라의 무릎에 머리를 벤 채 잠들어 있었다. 신라는 무사히 돌아온 그의 모습에 안도하며 그의 얼굴을 끌어안았다.

“고마워….”

신라의 말에 네오는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그때 연구실의 문이 열리고 동주가 우선을 부축한 채 걸어 들어왔다.

“다들 괜찮아?”

마침 여우 불에 시달리던 몽접귀가 배 교수의 몸에서 뛰쳐나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힘없이 쓰러지는 우선을 보고 네오는 마지막으로 자라경의 온전한 부분으로 그의 모습을 비추다가 그 부분을 세게 깨뜨려버렸다. 그러자 우선의 몸에서 떨림이 사그라들고 호흡 소리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동주는 우선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눈앞에 서 있는 네오를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설마 비형랑 패거리와 한패는 아니겠지?”

“……”

네오는 입을 열지 못하고 주눅 들어 있었다. 동주가 그의 앞으로 가까이 걸어가 멱살을 쥐었다.

“어서 바른대로 말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요기를 숨기고 다닐 수 있는 거지? 비형랑처럼 이상한 술수를 쓰는 거 아니야?”

“그건….”

신라가 동주를 향해 말했다.

“저건 저 여우의 몸이 아니에요. 저번에 교내에서 진짜 아이돌 네오의 영혼을 본 적이 있어요.”

“여우…?”

동주가 물었다. 그는 네오의 손에서 자라경을 빼앗아 그 깨진 조각으로 네오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모습을 본 동주의 얼굴에서 분노와 의심이 걷혀 갔다.

“너는….”

이제야 네오의, 아니 네오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요괴가 누구인지 알아챈 것이다. 바스라질 것 같은 웃음을 머금은 여우귀는 동주의 앞에 머리 숙여 절을 했다.

“참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제야 스승으로 모실 분을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 * *

여우귀는 본래 요기를 숨길 줄 알고 여러 생물체로 둔갑할 수도 있는 재주 많은 요괴였다. 그들은 무리 지어 사는 습성이 있으며, 위험할 때 여우 불을 띄워 사방에 있는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여우귀 소년의 이름은 ‘화비’였다. 장난기가 많고 활달해서 여우귀들은 물론 다른 요괴들까지 그를 좋아했다. 화비의 취미는 산짐승으로 둔갑해 사람들을 놀래키고 그들이 놓친 먹을거리나 금은보화를 훔쳐 오는 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산 중턱에서 심심하게 엎드려 누워 돌을 던지고 있던 어느 날, 오랜만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화비는 또 장난을 치기 위해 돌 바위 뒤로 숨었다.

커다란 백저포 자락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이는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위용 있고 다부져 보였다. 하지만 귀신 보는 데 장사 있으랴, 처녀 귀신으로 둔갑해 돌 바위 뒤에서 불시에 튀어나가 놀래키니 사내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응?”

사내는 벌건 대낮에 처녀 귀신이 나타나자 고개를 갸웃하며 해가 뜬 것을 다시 확인했다. 사내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당황한 화비는 이번에는 커다란 호랑이로 둔갑해 사내를 위협했다.

“아하, 네가 그 유명한 여우귀 족속이로구나?”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로 그냥 지나치려 하였다. 자존심이 상한 화비는 이번에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둔갑해 사내를 덮치려 하였다. 그러자 사내가 돌아서더니 이노옴-! 고함을 내질렀다. 동시에 사내의 뒤로 사자의 갈퀴에 벌건 용의 눈, 호랑이의 이빨을 가진 무시무시한 요괴의 형상이 떠올랐다.

“으아악!”

질겁한 어린 여우귀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쪼르르 바위 뒤로 숨는 것을 보고 사내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의 봇짐을 뒤적여 곶감 뭉치를 던져주었다.

“배가 고프면 솔직하게 말하면 될 일이지, 무엇 하러 놀래키고 빼앗아가려 하느냐? 네 생각보다 세상은 살 만하다.”

잠시 후 화비는 조심스레 바위 위로 얼굴을 내밀어보았다. 이미 멀찍이 걸어가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음에는 꼭 놀래켜주고 말겠다.”

콧방귀를 뀐 화비는 곶감 뭉치를 집어 들고 폴짝폴짝 수풀로 뛰어 들어갔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화비는 사내를 놀래키려 열심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도리어 놀래킴 당하는 때가 많았다.

“네 이름이나 묻자!”

“예의를 따지는 것이 내 성미에는 맞지 않으나 산 날이 너의 곱절은 될 것이니 존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는 인간이 아니냐?”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해 있으나 사실은-”

펑-! 자욱한 연기가 퍼져 나와 사방을 가리더니 그 속에서 얼굴 형상만 보았던 무시무시한 요괴가 걸어 나왔다.

- 이것이 나의 본모습이다. 내 이름은 비비. 탐관오리를 물어 죽여 세상에 두려움을 주는 존재이지.

비비를 바라보는 화비의 눈빛에 두려움이 가득 들어찼다가, 곧 선망의 빛으로 바뀌었다. 여태껏 이토록 웅대하고 멋진 요괴는 본 적이 없었다.

“비비! 날 제자로 삼아주시오!”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비비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미안하지만 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너에게 할애해줄 시간이 없구나.”

“당신처럼 강한 요괴가 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요?”

“정해진 끝이 오면 죄를 깨끗이 씻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나 속죄하며 살기로 신과 약조하였다.”

“인간이라니….”

실망하는 화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비비는 늘 사라지던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듬해 겨울, 깊은 산속에서는 여우 불들이 떠오르지 않을 날이 없었다. 흉작으로 굶주린 인간들이 산으로 쳐들어와 여우귀의 동굴을 털고 눈에 보이는 여우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모두 잃은 화비는 인간으로 둔갑해 늘 숨어 있던 바위 뒤에 앉아 있었다. 굶주리고 갈 곳이 없어, 그대로 바위 뒤에서 숨을 거둘 작정이었다.

그때 그 길을 지나가던 상단 무리가 잠시 짐을 풀고 쉬어가려 하다가 바위 뒤에 쓰러져있는 화비를 발견했다.

“여기 웬 다 죽어가는 아이가 있네.”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뜬 화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호랑이로 둔갑했다. 처음에는 놀란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몸집이 작아지는 호랑이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저것 좀 보라지. 말로만 듣던 잔재주 많은 여우귀가 아닌가?”

“붙잡아다 가죽을 벗겨 팔면 꽤나 돈이 되겠구만!”

인간들의 알맹이는 악마와 같았다. 그들의 손에 맞아 죽게 생겼을 때, 오래 보이지 않던 비비가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갔다.

“그만들 두지 못할까.”

근엄한 목소리는 쉽게 거스를 수가 없었다. 비비가 본래의 형상을 드러내며 분노하자 인간들은 혼비백산하여 짐도 놓고 달아났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화비에게 다가간 비비는 그를 들쳐 업고 안전한 산속 동굴로 들어가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짐을 풀어 그 안에서 먹을 것을 찾아 건넸다.

“감사합니다….”

때가 꼬질꼬질 묻은 채로 먹을 것을 입에 쑤셔 넣는 여우귀의 모습이 가엽기 짝이 없었다. 비비는 동굴을 나서기 전 얘기했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었다. 떠나기 전 웬일인지 네가 눈에 밟혀 찾아와본 것인데, 날을 잘 맞추어 왔구나. 이제부터 사람들을 놀래키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도우며 환심을 사라. 그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

“당신은 정말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이오?”

“그렇다 ”

“나중에 내가 찾아가면 날 거두어줄 수 있겠소?”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묻는 것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비비는 고개만 끄덕거려 주었다.

“나중에 정말 나를 찾아오면 그렇게 하마.”

어린 여우귀에게 다시금 살아갈 희망이 생겼다.

그 뒤로 정말 비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죽어 저승에서 아주 오랜 재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이었다.

화비는 비비가 말한 대로 인간들을 위기에서 도왔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빠져나가는 길을 알려주고, 굶주린 이가 있으면 산과일들을 따다 주었다. 그러자 인간들은 다시 여우귀들을 친근한 존재로 받아들였다.

화비는 재미가 없어도 그렇게 연명해 나갔다. 인간으로 태어날 비비를 만나게 될 날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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