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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장. 자라경 (41/126)

40장. 자라경

- 찾아줘….

- 더 늦기 전에!

- 답답해….

- 어서 찾으러 와줘.

- 여기에서 날 꺼내줘!

- 당신이 찾아온다고 했잖아.

힘없는 손이 애타게 바짓자락을 붙잡아 당긴다. 신후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말라서 뼈만 남은 병자의 손이 검은 물로 뒤덮인 땅 위로 올라와 있었다. 아무리 바짓단을 잡아당겨도 워낙 힘이 없는 손은 번번이 그것을 놓치고 떨어져 검은 물만 사방에 튀겼다.

보다 못한 신후가 그 손을 붙잡아 땅에서 꺼내주려 했다. 그러자 마른 손이 그의 손을 탁 쳐내었다.

- 너는 누구야?

-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야.

- 그 사람을 데리고 와.

- 그 가여운 짐승을 데리고 와!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지?’

신후가 물었다. 그러자 마른 손이 바들바들 떨며 그의 맨발을 그러쥐었다.

- 모르겠어….

- 여기는 너무 컴컴해.

- 두렵기만 해…. 죽고 싶어.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힘없는 영혼의 육체는 분명히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에 있으리라. 신후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손을 조심스레 그러쥐었다.

‘곧 찾으러 갈 테니, 조금만 더 버텨줘.’

그 말에 미동조차 멈춘 손은 천천히 땅 밑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신후는 이기적인 자신을 책망하며 가슴팍을 쥐었다. 그의 왼쪽 가슴이 뻥 뚫린 채 피 흘리고 있었다.

* * *

아이돌 스타 네오가 MR 제거 영상으로 한바탕 곤욕을 치르게 됐다. 컴백하자마자 죽음의 위기를 딛고 일어난 기적의 아이콘으로 예전보다 더욱 인기를 얻게 된 그는 그대로 승승장구하는가 싶었지만, 누군가 그의 음악 방송 무대를 보고 반주를 제거한 라이브 버전 영상을 올리면서 세간에 충격을 주었다.

그의 라이브는 말 그대로 아주 형편없었던 것이다. 춤을 추며 부르니 노래의 반이 벅찬 숨소리요, 음정 박자 모두 제대로 맞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식물인간이었던 영향으로 더는 가수 생활을 할 수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소속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네오를 가수에서 연기자로 전향시키기 위해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이미지 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연습을 시켜보니 연기에도 영 소질이 없었다. 대사는 곧잘 외우지만, 실제 연기에 투입되면 누군가 지켜보는 것을 의식하느라 대사 처리가 매우 어색해지는 것이었다.

결국 건강상 이유를 핑계로 네오는 잠시 휴식기를 갖기로 했다. 그는 마스크만 낀 채 버스를 타고 외출했다. 한국대 앞까지 가는 버스였다. 그곳에는 그가 이렇게라도 꿋꿋이 버티며 살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검게 물들인 머리와 얌전한 복장 덕분에 알아보는 이는 다행히도 드물었다.

사학과 건물 근처로 걸어가자 마침 바깥으로 나와 자판기의 음료를 고르고 있는 차동주가 보였다. 네오의 푸른 눈동자가 우울하게 그를 담았다.

‘미안해요….’

모든 혼백은 인간에게 도움 될 것 없는 해악일 뿐이다, 그렇게 교육받은 네오는 그 백을 동주의 눈앞에서 치워주면 그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이 사라지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초조해했고, 나중에 스스로의 손으로 백을 떠나보낸 이후에는 가슴 한곳이 뻥 뚫려버린 것처럼 허무해 했다. 아마도 아주 소중한 사람의 백이었을 것이다.

‘그 소중한 존재를 바로 내가 사라지게 만들어버린 거야….’

얼굴을 보았으니 되었다고 생각하며 힘없이 돌아서는데, 바로 앞에 유신라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많은 생각에 사로잡힌 얼굴로 빤히 네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비켜.”

신라는 쌀쌀맞게 말하며 지나치려는 네오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기다려.”

“또 뭔데?”

“얼마 전 너와 꼭 닮은 사람의 혼을 봤어.”

“……”

신라는 서영과 함께 도서관에 갇혔을 때를 회상했다. 그곳에서 서영과 자신을 도와준 병원 환자복 차림의 소년을 분명히 보았었다.

“나는 네가 나쁜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네가 요괴든 다른 이의 혼이든,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야. 인간 세상에서는 자기 죄를 뉘우치는 자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준다고 하고 있으니까.”

“……”

네오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이내 그곳에서 벗어났다.

‘한 번의 기회….’

건방진 인간 여인이 남긴 마지막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 * *

사학과 안에서는 방학 동안 대학원생들의 연구 발표회가 세미나 형식으로 열리고 있었다. 연구실마다 한 명씩 대표로 자신의 연구 주제를 놓고 30분 내외로 발표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고고학 연구실에서 발표하는 사람은 한동안 중국으로 출장을 나가 있었던 건우였다.

“다음 발표자는 한신후 교수님의 고고학 연구실 박사 6기 조건우입니다.”

교수들을 비롯한 다른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은 중국의 고대 문화와 동시대에 있었던 삼국 시대 때의 한국 문화의 연결점을 심도 있게 풀어내는 건우의 연구 발표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주장을 뒷받침할 실질적인 증거도 중국 대륙에서 직접 찾아왔으니, 빨리 논문을 써낸다면 학계를 떠들썩하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선과 동주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배 교수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은 두 사람에게 직접 찬사의 말을 보냈다.

“너희는 좋겠다. 한 교수님 지원이 그렇게 빵빵하다며? 우리 교수님은 원래도 불성실했지만, 요새는 더해.”

“또 무슨 일인데?”

동주가 물었다.

“출근하면 일하는 척이라도 하더니, 요새는 교수실 문도 걸어 잠그고 맨날 잠만 자는 것 같다니까.”

“건강이 안 좋은 건 아니고?”

“아주 팔팔해! 팔팔하다 못해 야동을 보는지 자꾸 신음 소리가 들리고, 이상해서 노크하고 들어가 보면 엎드려서 자고 있어.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분명히 대화하는 소리 같은데 들어가 보면 잠자고 있는 본인 외에 아무도 없다니까?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

뭔가 짐작이 간 동주와 우선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세미나가 끝나고 자리에 남아 얘기했다. 동주가 애매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요새 간간이 느껴지던 요기의 진원지를 알게 된 것 같은데.”

“귀접(鬼接)이겠지. 수상해도 캐내기가 민망하지?”

“우리가 민망한 걸 가릴 처지도 아니고…. 가위바위보 어때?”

우선은 하기 싫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고대 요괴로 살았던 이들 사이에서도 이보다 더 공정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위, 바위- 보!”

애석하게도 우선이 지고 말았다. 그는 볼펜을 집어 던지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걱정 마, 친구. 밖에서 기다려줄 테니까.”

“그래, 고맙다….”

때마침 사학과 건물 안에서 요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둘러서 그 근원지인 배 교수의 사무실로 향했다.

“한창 뜨거운 시간인가 본데….”

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듣고 동주가 휘파람을 불었다. 방해가 되는 그를 밀쳐버린 우선은 잠시 문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 …교수님~ …아… 한신후…!

우선은 망설여지는 마음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굳게 먹은 뒤, 잠겨 있는 문을 힘으로 열고 불시에 들어갔다.

소파에 드러누운 배 교수의 위로 신후의 모습을 한 귀혼이 올라타 있었다. 반나체 상태였던 귀혼은 킬킬 웃으며 허공을 떠돌았다. 검은 그림자가 되어 사무실 안을 휘젓고 다니는 귀접귀를 붙잡기 위해 우선이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낸 순간.

슈아악-!

귀접귀가 배 교수의 몸속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이런!”

완전히 빙의하기 전 배 교수의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한차례 충격을 주었지만, 귀접귀는 그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매개체에 숨은 것 같은데…. 언제 또 매개체를 삼킨 거지?”

“혼의, 주를 알다니, 네가 말, 로만 듣던, 어둑시니 집단, 의 수하로군?”

배 교수는 몸과 의지가 따로 노는 것 같은 기괴한 동작으로 우선을 가리켰다. 하지만 우선은 눈 하나 깜빡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

“어서 그 몸에서 나와. 버티면 버틸수록 괴로워질 거야. 지금 달아난다면 한때의 장난이라 여기고 못 본 척해줄 수도 있어.”

“내가 왜 나가야 하지? 이렇게 즐거운데? 그리고 괴로워지는 건 내가 아니라 네 쪽이지 않을까?”

“뭐?”

배 교수가 머리칼을 꼬며 요염한 걸음걸이로 우선에게 걸어왔다. 달려든다면 언제고 반격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우선에게, 배 교수는 등 뒤에 감추고 있었던 것을 들어 보였다.

자라경(鏡).

그것은 비추는 모든 것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는 십장생(十長生) 유래 보물로, 신선이 인간 세계를 시찰하다가 하늘로 되돌아갈 때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해 사용한다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 조각일 뿐이지만 비치기만 한다면 같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우선이 자라경에 비친 찰나 교수실로 들어선 동주가 그것을 먼저 알아보고 놀라서 달려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자라경에서 아주 먼 옛날의 한(恨) 많은 요괴의 모습을 본 우선은 큰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시야가 점차 좁아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절의 고통과 막막함에 사로잡혀 숨마저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허억!”

비틀대는 그가 손을 내뻗는 곳마다 수분이 모두 증발하면서 바닥과 벽이 쩍쩍 갈라졌다.

“민우선, 정신 차려!”

동주의 고함이 우선의 귀에 들릴 리 없었다. 지금의 그는 원망에 사로잡힌 가뭄귀, 광철일 뿐이었다. 그 틈을 타 교수실에서 달려 나온 배 교수는 곧장 한신후의 연구실로 향했다.

“인간의 몸이다! 진짜 인간의 몸이야-!”

혼의 매개체를 삼킨 배 교수의 꿈에 연달아 나타나면서 귀접을 하게 만든 몽접귀(夢接鬼)는 차츰차츰 그녀의 정신을 흐리멍덩하게 만들었고, 기회를 엿보다가 그녀의 혼을 매개체에 가둬버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배 교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면서 신후의 연구실에 다다랐다. 그 안에는 세미나가 끝나고 돌아와 자리에서 독서 중이던 건우와 신라가 있었다. 건우가 먼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수님…?”

배 교수는 소름 끼치는 미소와 함께 건우를 향해 자라경을 들어 보였다.

“무슨….”

자라경에 비친 낯익은 도깨비의 형상을 보고 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버렸다. 손끝을 달달 거리며 떨다가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리고 마는 건우를 보고 신라도 놀라서 일어났다.

“헉… 허억….”

고통스럽게 죽임당했던 요괴로서의 마지막 순간이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건우 선배!”

그의 벌어진 입술 밖으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뻗어 나오고, 머리칼은 빗자루처럼 거칠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교수실 안쪽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신후가 들어왔다.

“자라경….”

그는 배 교수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애초에 타겟은 신후였던 듯, 배 교수가 든 자라경이 그의 쪽으로 틀어졌다. 신후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때 언제 달려왔는지 신라가 먼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 계집이!”

표독스럽게 외친 배 교수가 자라경을 든 채 달려왔다. 새까맣고 평평한 거울에 신후를 대신해 신라가 비쳤다. 아니, 비쳐야 했다.

함께 거울을 쳐다본 신후의 표정이 침착함을 잃었다. 분명히 신라를 향해 있는 거울 속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신라의 손목을 붙잡아 당겨 뒤로 숨겼다.

“안 돼요…!”

신라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자라경에 비친 신후의 모습이 점차 음울한 분위기의 검은 짐승으로 바뀌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짐승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것이 자라경이 판단한 현재 그의 진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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