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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장. 욕망 (40/126)

39장. 욕망

두피가 검게 그을려 보기 흉한 모습의 대머리 사내가 한 저택의 정원 안에 쭈그려 앉아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는 며칠 전 광철의 환생인 인간에게 호되게 당해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만 추병귀(빗자루귀)였다.

“머리카락만 다시 나면, 그까짓 불완전한 요괴들쯤…!”

그때 저택의 문이 열리고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추병귀는 재빨리 달려가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뭐 하시는 거죠?”

남자가 차갑게 물었다. 추병귀는 입술을 꽉 깨물고 바닥에 엎드렸다. 자존심 따위, 어렵게 얻은 인간의 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었다.

“보다시피 머리카락이 다 타버려 모든 힘을 잃었습니다. 나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시오.”

“이미 타버린 머리카락을 나더러 어쩌라는 말이지?”

“‘비어 있는’ 인간의 몸을 많이 수집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를 내게…”

“이미 한 번 혼의주(魂意珠)에 가둔 혼은 다른 구슬로 옮길 수가 없다는 걸 알 텐데요.”

“큭….”

“아아…. 내가 그 구슬을 도로 빼앗아갈까 봐 두려운 거로군?”

남자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자, 정곡을 찔린 추병귀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새파래졌다. 남자는 고민하듯이 턱을 톡톡 두드리다가 선심 쓰듯이 얘기했다.

“당신이 귀력을 쓰지 못해도 쓸모가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면 한 번은 더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어,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일전에 내가 갖고 싶다고 했던 물건 기억합니까? 그걸 나에게 구해다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울 텐데.”

“……”

남자가 갖고 싶다고 한 물건은 아무리 강한 요괴라도 목숨이 두 개래야 겨우 구할 수 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것이었다.

“찾… 찾아오겠소.”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남자는 미소 지으며 저택의 대문을 나섰다.

추병귀는 일단 시간을 번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캡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때 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그는 추병귀를 발견하자마자 분노에 찬 얼굴로 달려왔다.

“너, 거짓말했지?”

“말장난할 시간 없다, 꼬맹아.”

그대로 돌아서려는 추병귀의 앞을 가로막은 네오가 주위에 파란 불덩이들을 띄우며 그를 위협했다.

“대답해. 죽은 뒤 떠나지 않고 이승에 머무르는 인간의 혼백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해를 끼칠 뿐이라고 그랬잖아.”

“그런데?”

“왜 그 사람은 그 영혼을 떠나보냈는데 그렇게 슬퍼 보이는 거야?”

“별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나 보지.”

추병귀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여우 불들 사이로 지나갔다. 미간을 구기고 있던 네오가 돌아서서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어린 영혼을 사라지게 만든 거야?”

한숨을 내쉰 추병귀가 고개만 돌려 말했다.

“정신 차려, 이 꼬맹아. 나나, 너나, 그놈들에게는 똑같이 해를 끼치는 요괴들이니까.”

“나는 해를 끼치는 요괴가 아니야!”

“크크큭! 듣던 중 웃긴 소리군. 이봐, 꼬맹아.”

네오에게 다시 다가온 추병귀는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꾹 밀었다.

“이 육체의 ‘주인’이 듣고 있다고 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어?”

“…그치만 이 육체의 주인은….”

“넌 공모자야. 도둑과 다를 바 없다고.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네오는 더이상 반론을 펼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를 비웃은 추병귀는 다시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갔다. 허공에 떠 있던 여우 불들이 하나둘씩 사그라졌다. 고개 숙인 네오에게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다만… 인간이… 되어보고 싶었을 뿐인데….”

며칠 뒤, 만신창이가 된 추병귀가 다시 저택에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털이 모두 타버린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저택의 문이 열렸다.

절뚝이며 저택의 주인 앞에 걸어간 추병귀는 무릎을 꿇고 품에서 여러 겹의 천으로 싸인 물건을 꺼내 건넸다. 남자는 천을 벗겨내고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검은 유리 조각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조각에 비치자, 지금의 모습이 아닌 하얀 도포 차림의 귀티 나는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부분밖에 구해오지 못했군요.”

“…면목 없습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나쁘진 않습니다. 언제 바다 위로 떠 오를지 모르는 천 년 묵은 자라귀의 등껍질을 이렇게 빨리 구해오다니. 쓸모가 없지는 않군요.”

“그럼….”

“약속대로 혼의주를 거두는 건 시일을 두고 생각해보겠습니다.”

“……”

남자의 비위를 맞춘 것에 안도한 추병귀는 그 자리에서 넙죽 절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보이지 않게 꽉 쥔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날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반드시 복수하고 말 것이다….’

* * *

여름 방학이라 강의 준비도 할 필요가 없어진 배 교수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지인이 연 갤러리를 찾았다.

“후우….”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갖고 싶은 건 모두 갖는 삶을 살아왔던 그녀였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가 생겨났다.

‘한신후…. 도대체 어떻게 꼬셔야 하지?’

외모면 외모, 재력이면 재력, 명예, 사회적 지위,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남자. 애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그보다 자신을 뽐낼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 같았다. 결혼을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 정도의 남자를 부부 동반 모임에 데리고 나가면 대통령이 와도 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아….”

그러나 도무지 그의 환심을 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친해져 볼까 싶어 시시하다 여겼던 사학과 엠티에도 참여했건만, 코빼기도 안 보이던 남자는 이튿날 산에서 사라졌다던 본인의 제자를 구해내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멧돼지한테 쫓기는 게 나였어야 했는데… 하아.”

이러다가는 우울증이든 뭐든 정신병에 걸려버릴 것만 같았다. 정신병 걸린 노처녀 여교수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는 그녀의 뒤로, 멀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다가와 같은 작품을 감상했다. 그녀는 새침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가 눈을 크게 떴다.

‘완전 미남이잖아?’

한신후가 다부지면서 카리스마 있는 타입이라면, 이 남자는 고상하면서 왠지 모를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취향이 비슷하시네요.”

웬걸, 먼저 말을 걸어오는 남자다. 배 교수는 들키지 않게 목을 가다듬고는 한껏 지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런 우울한 색채감을 좋아해서요. 복잡한 머리 식히는 데에 이만한 게 없거든요.”

“저도 그렇습니다. 파란색을 보면 그리움, 청량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울함에 먼저 사로잡히는 부류도 있거든요. 저나, 또 그쪽….”

어떻게 부를지 의사를 묻듯이 매너 있게 들어 보이는 손에 배 교수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국대 사학과 교수 배현아예요.”

“네. 배 교수님처럼요.”

남자는 배 교수가 내민 손을 붙잡고 악수한 뒤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 소개를 드려도 될까요? 취향이 비슷한 여성분을 만난 게 처음이라서.”

“어머, 물론이죠.”

명함을 빠르게 스캔한 배 교수는 남자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만큼 놀라고 말았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 강 현

Department of Neuropsychiatry Specialist / Kang Hyun

‘이게 웬 월척이야….’

배 교수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아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번에 경계심을 푸는 배 교수를 바라보며, 강 현이 은밀하게 미소를 내지었다.

다음 날 학교로 출근한 배 교수는 평소처럼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쇼핑몰이 시작 페이지인 인터넷을 띄웠다. 그녀는 커피포트의 물을 데우며 고민하듯이 입술을 매만졌다. 그러다 물이 끓는 사이 옷걸이로 걸어가 외투에서 작은 갈색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외로움을 채워주는 묘약이라….”

간밤에 와인 바에서 밤새도록 얘기를 나눈 젊은 정신과의가 헤어지기 전 선물처럼 건네준 것이었다. 이미 많은 환자들이 복용하고 효과를 봤던 것이니 안심하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마약 아니야?’

의심을 시작하니 끝도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항우울제일 뿐인데, 젊은 의사가 놀리려고 재치 있게 바꿔 말한 것일 수도 있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다음도 기약한 사이에, 설마 사기까지 쳤을까? 에잇, 몰라! 독약만 아니면 되지, 뭐.’

배 교수는 결국 갈색 병의 뚜껑을 열고 정체 모를 액체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으, 써.”

마침 전기 포트의 물이 다 끓여져 자동으로 전원이 내려갔다. 그녀는 커피를 타 자리로 가져온 다음 평소처럼 찬찬히 쇼핑몰 사이트의 신상을 체크했다.

“음, 왜 벌써 이렇게 졸리지….”

졸린 눈을 비비며 끔뻑거리던 그녀는 곧 책상 위로 스르륵 엎어졌다. 덩달아 기울어진 잔에서 반이 넘게 남은 커피가 책상 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으….”

얼마나 낮잠에 빠져 있었을까. 누군가 책상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배 교수는 엎드려 있던 책상에서 일어났다.

“누구…?”

그녀의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질 때까지 책상 앞에 기대 선 남자는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시선이 또렷하게 맞춰지자 피식 웃었다. 평소라면 구경하기도 힘든 비싼 미소였다.

“많이 피곤하신가 봅니다.”

“하, 한 교수님…?”

황망히 머리칼을 정리한 그녀는 시계를 봤다. 출근한 지 벌써 두 시간이 다 돼 가고 있었다.

“또 다크서클 보고 놀리시려고요?”

“아뇨, 진심으로 걱정하는 겁니다. 아침잠은 많이 없으신 분이 이렇게 누가 데려가도 모를 정도로 숙면 중이시니.”

“…제가 아침잠이 없는 걸 아시네요?”

“저와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는 교수들이 몇 없으니까요.”

좋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새침한 표정을 내지은 배 교수는 의자에서 일어나 요염한 자세로 기지개를 켰다.

‘어…?’

평소라면 씨알도 안 먹혔을 텐데, 배배 꼬아대는 몸에 한신후의 집요한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의 눈에 열까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게 도대체….’

한신후가 눈을 마주친 채로 책상을 돌아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책상과 의자 등받이를 짚으며 그사이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의 숨결이 이마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하게 말해보세요. 어제 늦게까지 뭘 했습니까?”

“어제… 늦게까지… 논문을… 쓰느라….”

“아니야. 솔직하게 말해야 상을 줄 텐데.”

그가 의자를 짚었던 손을 들어 배 교수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배 교수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선을 우왕좌왕 옮겼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 갤러리에서 만난 의사와… 밤새 와인 바에서 수다를….”

“이런… 그새 다른 남자를 만나고 왔습니까? 안 되겠군요.”

그가 갑작스레 거리를 좁히며 다가와 놀란 배 교수가 의자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신후는 그녀의 턱을 쥐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여자는 챙겨준다고 말했지. 그 말은 내 말에 순종하는 여자가 좋다는 뜻이야.”

“…늣, 네….”

“다른 남자는 쳐다도 보지 말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도록 해. 그러지 않으면 울며불며 애원할 정도로 벌을 줄 테니까…. 내 말 잘 알아듣겠어?”

귓가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배 교수의 몸이 흥분을 안고 바르르 떨렸다.

“벌…이 뭔데요…?”

한신후가 입가를 당기며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배 교수는 깜짝 놀라 문가를 확인했다. 이미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한신후를 쳐다봤다. 상반신을 모두 드러낸 그가 의자의 양 팔걸이를 짚으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진짜… 진짜였어!’

한신후는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리 벌려.”

명령과도 같은 그 말을 거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배 교수는 양다리를 바르르 떨며 벌렸다.

“이렇…게요?”

“더 벌려야지. 이렇게.”

북-! 그가 직접 힘주어 양다리를 벌리자 짧은 치마가 그대로 찢어졌다.

“힉!”

“이미 흠뻑 젖다 못해 질질 새고 있군. 음탕한 암캐 같으니….”

“아아….”

그의 말대로 배 교수의 속옷은 애액으로 잔뜩 젖어 있었다. 배 교수는 수치심과 당혹스러움에 눈물을 그렁거렸다. 한신후는 혀를 차며 구둣발로 배 교수의 젖은 음부를 잘근잘근 즈려밟았다.

“으아아…! 아파…!”

“너 같이 음탕한 암캐에게는 구둣발도 과분하지. 어때, 좋아하는 남자에게 가랑이 사이를 밟히는 기분이.”

“으아아…. 으아…!”

“그래, 짐승처럼 울부짖어야지. 밟히면서 질질 싸대는 꼴이 딱 발정 난 암컷 같으니.”

배 교수는 그 말대로 구둣발 아래에서 애액을 끊임없이 흘리고 있었다. 본인이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그녀였다. 누군가에게 밟히면서 황홀해하다니, 수치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수치스러움과 배덕감이 그녀를 참을 수 없는 흥분으로 몰고 갔다.

“안 돼, 그만! 히이익…!”

결국 그녀는 의자에서 사지를 바르작거리며 꼴사나운 절정을 맞이했다.

“이런. 반성을 전혀 안 한 것 같군.”

“아, 아니에요, 헉, 다시는…”

“요망한 입 그만 벌리고, 이만 아래 입을 벌려보는 게 어때.”

구둣발이 음부를 다시 툭툭 건드렸다. 배 교수는 두려움과 희열로 버무려진 눈빛으로 한신후를 올려다봤다.

“바, 발 말고 당신의 진짜를 줘요.”

“벌을 받고 있는 주제에 당돌하기 그지없군.”

“당신이 하라는 건 다 할 수 있어. 제발 날 범해줘!”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한신후는 바지의 벨트를 풀며 말했다.

“그대로 책상 위로 납작 엎드려.”

그 말을 들은 배 교수의 눈이 황홀함으로 가득 찼다.

한신후와의 밀애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됐다. 잠들기만 하면 항상 찾아오는 그 때문에 매일이 행복했다.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에 중독돼 버린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병자처럼 초췌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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