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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장. 강화도 (39/126)

38장. 강화도

‘괜히 나오자고 했나….’

신라는 민망함에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에는 발목이 성치 않은 자신을 부축만 해주던 신후는 아무래도 속도가 더디게 되자 아예 업어버렸다. 어두운 밤중이라서 어차피 보는 눈은 적었지만 그래도 창피하긴 마찬가지였다.

“옷은 편한 걸로 사서 갈아입었으니, 간단히 요기할만한 거리도 찾아보지.”

“그냥… 숙소로 돌아가서 시켜 먹으면 안 돼요?”

“안에 있기 좀 답답해서. 비도 그쳤는데 시원하고 좋잖아.”

“그렇긴 하지만….”

신후는 차도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이 퍽 기분 좋아서, 신라는 주위를 신경 쓰는 것을 포기하고 신후의 등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버렸다. 그가 낮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첫째 날부터 어디로 사라졌던 거예요?”

“이 근처 지역에서 의뢰가 들어와서. 여러 건 처리하느라.”

“왜 진작 안 말해줬어요?”

“말했으면 네가 날 돕는다고 할 게 뻔했으니까. 이곳에 추억을 쌓으러 온 거지 일하러 온 게 아니잖아.”

“…결국 끝은 이렇게 됐지만요.”

“강화도는 전쟁터였던 역사가 많아서 특히 오래된 요괴들과 잡귀들이 많아. 그걸 알아서 되도록 일을 일찍 끝내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귀찮은 일이 많아서 좀 늦어졌어.”

그들이 걷던 길옆 풀숲에서 초록빛으로 빛나는 것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발견한 신라가 신후의 등에서 얼굴을 떼고 작게 소리쳤다.

“반딧불이다!”

“그렇군.”

“처음 봐요…. 예쁘다.”

신라는 근처로 날아오는 반딧불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보았다. 이리저리 가볍게 날아다니는 미물을 손에 가두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다 냄새가 나네요. 근처에 바다가 있나 봐요.”

“보고 싶어?”

“삼 일 차 일정에 바다를 보고 오는 게 있었거든요. 이대로 올라가면 아쉬울 것 같아요.”

신후는 그녀를 업은 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비슷한 곳까지 걸어갔다. 멀리 있긴 하지만 파도 소리가 간간이 작게 들려왔다. 기분이 좋아진 신라는 신후의 등에서 내려와 전망대 난간에 기대서서 넋을 놓고 바다 경치를 감상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신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하는 옛날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십 년, 이십 년 전 얘기가 아닐 것이다.

“언제 적이요?”

“세 번째 생… 조선 말기의 이곳은 하루가 멀다고 사건 사고가 벌어졌었지.”

“이곳에 살았었나요?”

“아주 잠깐. 이승의 아수라장은 요괴들에게 좋은 놀이터여서, 무고한 영혼들이 요괴에 잡아 먹히지 않도록 파견을 나왔었어.”

“그때에는 조교님들 없이 혼자였겠죠?”

“그랬지.”

“신분은 어땠어요?”

신라가 난간에 턱을 괴며 편한 모습으로 물었다.

“돈 많은 지주의 아들.”

“…어쩐지 불공평하네.”

“돈 때문에 퇴마 일에 지장이 있으면 안 되니까. 그 정도는 신들이 알아서 마련해준 거지.”

“그때의 강화는 어땠나요?”

신후는 옛 생각에 젖은 얼굴로 바닷가 경치를 찬찬히 둘러봤다. 그의 머릿속에서 1900년대 전후의 강화도 풍경이 고스란히 떠오르고 있었다.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였던 강화는 늘 주변국의 타겟이 됐고, 개항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란을 겪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에 사는 일본인이 얼마 없어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탐욕스런 수취의 손길이 이곳만큼은 피해서 갔다는 것이었다.

강화도 주민들은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정이 많고 용감한 자들이었다. 특히 여자들의 목소리가 세서 음양의 기운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생동감 있는 삶터였다.

덜그덕덜그덕… 방직 기계 돌리는 소리, 갓 잡아 나온 해산물 파는 소리, 그 당시 전국 팔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을 꼽으라면 그는 주저 없이 이곳 강화를 말했을 터였다.

“기분이 묘하네. 내가 이래저래 얘기해봤자 믿지 않는 자들의 귀에는 하룻밤 꿈을 꾼 사람의 얘기처럼 들릴 테니까.”

“지금 당신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신후가 고개를 돌려 신라를 바라봤다.

“어째서?”

“당신이 방금 눈에 그린 풍경이 나한테도 와 닿은 느낌이었거든요. 어떻게 생겼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요.”

“……”

신후는 옅게 미소 지으며 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환생의 굴레가 끊겨 과거도 찾을 수 없고 미래도 없을 여인이 예쁘게 웃고 있다. 첫 번째 생일까, 아니면 자신과 같은 마지막 생일까. 다른 생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새삼 궁금해지고 만다.

‘너와 나는 스쳐 가는 인연이라도 마주친 적이 없었을까.’

두 사람은 근처의 식당에서 간단히 배를 채우고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갈 때는 걷고 싶다고 말한 신라의 의견을 수렴해준 신후는 곁에서 손을 잡고 부축만 해주었다.

“정말 괜찮아?”

“네. 파스가 듣나 봐요.”

“아니, 그거 말고.”

그가 무엇이 괜찮냐고 묻는지 깨달은 신라는 얼굴을 붉혔다. 잠깐 정신을 잃었을 정도로 첫 경험은 강렬하고 뜨거웠다. 그 결과로 허리에 근육통이 생겼고, 그의 것을 받아들였던 입구는 부을 대로 부어 걸을 때마다 쓰라렸다. 온몸에 힘이 없어 마지막에는 그가 직접 씻겨주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그가 다시 흥분해버리는 바람에 도망치듯이 욕실에서 나왔지만 말이다.

“견딜 만해요. 생채기 같은 건 없애줬으니까.”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해. 위험했어.”

“그래서 나 대신 호텔 방이 산산조각이 났죠.”

“괜찮아. 보상해줄 돈은 차고 넘쳤으니까.”

“치….”

아까 보았던 반딧불이가 또 그들의 주위를 밝혔다. 반가운 표정을 지은 신라가 신후의 손에서 떠나 반딧불이를 향해 걸었다. 잠시 멈춰선 신후는 그녀가 반딧불이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줬다.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성치 않은 다리로 몇 차례나 헛손질을 한 신라는 결국 민망한 웃음을 내지으며 신후를 돌아봤다.

“……”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신후의 표정에서 차츰 미소가 옅어졌다. 아까 회상했던 옛 강화도의 풍경과 내음이 고스란히 오감에 차오르면서, 눈앞의 그녀가 백의를 입고 있는 다른 여인의 모습과 순간 겹쳐 보인 것이다. 단순한 데자뷰라고 치부하기에는 두 사람이 풍기는 기운까지 너무도 흡사했다.

‘누구지…?’

그러나 그 백의의 여인이 누구인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강화도에 머물렀던 한 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만났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려보라면 어렴풋이 그려낼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통째로 기억이 지워진 여인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챈 신라가 천천히 다가왔다.

“왜 그래요?”

“…아니, 뭔가 떠오르려고 한 것 같아서.”

“사람의 머리로 네 번의 생을 다 기억하려고 하니까 건망증이 생기는 거예요. 그만 생각하고 어서 돌아가요.”

신라에게 손을 붙잡혀 걸어가면서도, 신후는 잡히지 않는 기억의 끈을 계속 잡아보려 애썼다. 하지만 묘령의 여인이 누구인지는 끝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건우가 차를 끌고 두 사람을 데리러 왔다. 강화도에 올 일이 없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그는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결국 픽업 기사 역할을 하게 됐다.

호텔에서 나오는 신후와 신라를 보고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흘겨봤다. 조수석에 오른 신후가 눈썹을 끌어올리며 그 표정의 이유를 물었다.

“남의 눈에 띄면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는 광경이거든요, 이거?”

“안 띄면 되잖아.”

“교수와 제자가 한 호텔에서 나오는 게 보통 일입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출발하지.”

“……”

선글라스를 끼며 시트에 편히 몸을 묻는 신후를 보고 건우는 궁시렁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미리 에어컨을 켜둔 덕에 차 안은 적당히 시원했다.

뒷좌석에서 잠들지 않으려고 무거운 눈꺼풀을 여러 차례 들어 올리던 신라는 결국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신후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에는 들지 않은 상태였다.

건우가 신후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짐도 버려두고 몸만 먼저 올라가고. 거기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연구실에는 캠프 도중 일이 생겨 그것을 처리하느라 빨리 올라가게 됐다고만 설명한 상태였다. 신후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신라가 캠프 프로그램을 진행하다가 금돼지한테 붙잡혀 갔었어.”

“…뭐라고요?”

금돼지가 어떤 족속인지 알고 있는 건우의 표정이 단박에 심각해졌다.

“설마….”

“큰일을 당하기 전에 구하긴 했지만, 정신적으로 충격이 꽤 컸어. 사실 구한 거라기보다 혼자 힘으로 뛰쳐나왔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니까, 우리 학부 연구생은. 큰일을 피했다니 천만다행이네요.”

“그래서 좀 쉬게 하려고 호텔에서 재웠어.”

“잘하셨어요. 강화에는 오래된 요괴가 많으니 특히 주의해야 하긴 하지.”

차가 강화를 빠져나가기 전, 조용히 눈을 뜬 신후가 차창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전날 느꼈던 데자뷰가 자꾸 떠오르며 간밤에 머리를 어지럽혔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건우를 쳐다봤다. 건우도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번의 인생을 거쳤다. 심지어 보다 빨리 그 굴레에 뛰어들었었다.

“넌 지난 생들이 모두 선명하게 기억나?”

“글쎄요. 어느 한 시점을 떠올려보라면 기억해낼 순 있죠.” “사람들도?”

“뭐, 지금처럼 만남이 당연한 시대가 아니었으니 대부분 기억나죠. 우리 기억력은 보통 사람 수준 이상이니까.”

“그렇지….”

“교수님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 여인과의 기억을 제외하면 다른 기억은 모두 멀쩡하잖아요?”

“그래야 맞는 걸 텐데 말이야.”

마치 일부러 그 부분만 오려낸 듯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가능성은 없을지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너에게서 인간의 칠정(七情)(*불가에서 일컫는 일곱 가지 감정)을 빼앗아 빈껍데기로 속죄의 삶을 살아갈 것을 명한다. 희(喜)노(怒)우(憂)구(懼)애(愛)증(憎)욕(慾), 네 번의 삶을 회귀해야 비로소 그 감정들을 차차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그중 애(愛)- 사랑의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 또한 비슷한 전철을 밟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여인과 함께 한 모든 기억을 지우고,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인간이 있더라도 그를 너의 머릿속에서 지울 것이다.

운전하면서도 힐끔힐끔 생각에 잠겨 있는 신후의 모습을 확인하던 건우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표정 완전 싫어하는 표정인데….”

“무슨 표정?”

“어떻게 하면 저 콧대 높은 신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칠 수 있을까-”

“역시 날 가장 오래 알고 있는 측근답군. 비슷했어.”

“그게 아니면 뭔데요?”

건우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신후는 다시 차창 너머의 풍경에 시선을 둔 채 나지막이 답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당한 만큼 그대로 되갚아줄 수 있을까… 하는 순수한 욕심일 뿐이지.”

“위험해 보이긴 마찬가지 같습니다만….”

신라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이틀간 겪어보지 않았던 일투성이였으니 오죽 힘들었겠는가. 정차해 있는 동안 함께 신라의 상태를 살피던 건우는 신후에게 물었다.

“신라와 관련된 일이에요?”

“일단은 기억 속에서 지워진 여인이 신라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부터 알아봐야겠어.”

“신라의 전생은 알 수 없었던 거 아닌가요?”

“내가 그 여인을 기억해낸다면 뭔가 단서가 생길지도 모르지.”

신은 도대체 이 남자를 어디까지 경계하고 얼마나 벌을 줄 작정인 걸까. 건우는 신후에게만 유독 무자비하게 구는 신들의 속내가 궁금해졌다.

첫 번째 환생에서 비형랑을 처치하기 위한 도움을 얻기 위해 이웃 나라에 있는 어둑시니를 찾아갔을 때, 그는 지금보다 더 음울하고 짐승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고 잘못 찾아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몇 마디 섞어보니 보기와는 다르게 지혜롭고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반요였다.

그는 이승과 저승을 모두 어지럽히는 존재를 처단하기 위해 기꺼이 따라와 주었다. 그런데 비형랑을 처치하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력이 쇠하고 만 어둑시니를, 신들은 못 본 체하고 돕지 않았다.

“추식귀(追食鬼)가 요새도 돌아다니는지 수소문해보겠습니다.”

건우는 그렇게 말하며 신호가 바뀐 도로를 다시 주행했다. 추식귀란 말 그대로 추억을 먹는 요괴로, 맛있는 기억을 주면 그 대가로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요괴였다.

“웬일로 순순히 따라오지?”

“저야 늘 주인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생을 살아왔는걸요.”

“다 옛날이야기일 뿐이지. 우리 사이에 주종 관계는 없어. 다들 같은 목적을 위해 모인 자들이니까.”

“그런가요….”

“명심해. 널 움직이는 건 내 의지도 아니고 다른 누구의 의지도 아니고 오직 네 마음이라는 걸.”

“……”

그가 무엇을 염려하고 말하는 것인지 잘 알았다. 건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쥐고 있는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속죄의 삶을 살아가게 된 이유는 오로지 따라야 할 주인을 잘못 선택한 죄-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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