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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장. 금돼지 (38/126)

37장. 금돼지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음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까지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학생들은 저마다 산책을 나가거나 근처의 경치를 구경하러 나갔다.

신라는 과대와 함께 다음 프로그램인 보물찾기가 진행될 둘레길 코스의 사전답사를 나섰다. 날씨는 흐렸지만, 산책하기에는 딱 좋은 기온이었다.

“찾았다!”

“어, 나도 찾았어!”

번호가 적힌 손바닥만 한 쪽지들은 바위틈에 껴 있기도 했고, 나뭇가지 위에 걸려 있기도 했다. 그들은 찾아낸 쪽지를 다시 접어 쉽게 발견되지 않도록 잘 숨기고 다음 코스로 넘어갔다.

“하다 보니 재밌네, 이거? 그렇지 않아?”

과대의 물음에 신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가파른 돌계단이 나타났다. 과대는 먼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 신라에게 손을 뻗었다.

“자, 잡아.”

“난 괜찮아.”

“내가 오자고 했는데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굉장히 미안할 것 같으니까, 어서 잡아줘.”

안 잡을 수 없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신라는 곤란한 얼굴로 그의 손을 붙잡고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운동신경도 제법 있네? 그동안 왜 아싸로 지낸 거야? 그동안 못 알고 지낸 시간 아깝게.”

“내 성격이 워낙 재미없어서.”

“조용한 미인이 더 인기 있는 거 몰라? 모르긴 몰라도, 너한테 고백해보려고 했던 녀석들 꽤 있었어. 몰랐지?”

“아….”

계단을 다 오르자마자 과대는 걸음을 멈추고 신라의 손을 잠시 붙들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남자친구 있어?”

“어?”

한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갔지만,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이는 아님이 분명했다. 신라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

- 아무 감정도 없어, 지금은. 그냥 궁금할 뿐이야. 그래서 같아. 우리.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어느 한쪽도 초조해하고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감정보다, 좋아하고 싶지만, 그 감정이 비어버린 사람의 고통이 더 크지 않을까. 없는 감정 때문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앞에서 마냥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처사가 아니었을까.

“난…”

그때 어디선가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흥분한 짐승의 숨소리 같았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헉!”

과대가 숨을 집어삼켰다. 호랑이만 한 멧돼지 한 마리가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신라도 놀라서 움츠린 상태였지만 뭔가 이상해 눈을 가늘게 떴다. 멧돼지에게서 악한 요기가 풀풀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시, 시, 신라, 계단으로 내려가자, 계단…”

멧돼지는 뒷걸음질 치는 과대에게 먼저 돌진했다.

“으아악!”

과대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자, 신라가 재빨리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멧돼지가 크게 포효하며 멈춰 섰다.

“네가 노리는 건 나 아니야?”

-훅… 훅….

신라는 멧돼지의 주의를 끌기 위해 몸 안에 흐르는 귀력을 모아 천천히 바깥으로 해방시켰다. 맛있는 냄새를 맡은 멧돼지가 점점 더 흥분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 잘 쫓아와 봐.”

이를 꽉 문 그녀는 그대로 수풀로 빠르게 달려 들어갔다. 침을 질질 흘리던 멧돼지가 신라를 쫓아 내달렸다. 커다란 몸집이 나무에 부딪힐 때마다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산새들이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헉…. 헉…!”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신라가 달려간 쪽을 황망히 바라보던 과대는 뒤늦게 사지에 힘을 주어 계단을 비틀비틀 걸어 내려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신라는 그녀의 이름을 시끄럽게 불러대는 기분 나쁜 목소리들에 귀를 틀어막으며 바닥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너무 어두워서 코앞의 지형만 내다보였지만, 얼추 판단해 보기로 커다란 동굴 속 같았다.

‘잡혀 온 건가….’

열심히 달렸지만, 짐승의 속도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이 산속에는 정체 모를 잡귀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들이 자꾸 훼방을 놓는 통에 결국 멧돼지에게 붙잡혀 귀력을 강제로 빨리면서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금돼지에게 붙잡혀 오다니!

-너의 순결도 이제 끝이구나!

-금돼지에게 강간당한 여자들만 태산을 이룬다!

얘기를 들어보니 금돼지라는 녀석은 보통 질 나쁜 요괴가 아닌 모양이었다.

-훅…. 훅….

그때 멧돼지가 동굴 입구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바짝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 삐었는지 모를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그 정도 상처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너 정체가 뭐야?”

거대한 실루엣이 악취를 풍기며 다가왔다.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던 몸집은 한 차례 요기를 뿜어내더니 점차 작아지면서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다.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성인 남자의 모습으로 변한 요괴는 킬킬대며 신라의 근처로 걸어왔다.

“간만에 맛있는 먹이를 찾아내 기분이 좋군. 네 귀력은 마치 화수분마냥 뿜어져 나오는구나? 그렇게 실컷 빨아먹었는데 또 그대로라니….”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요괴는 강한 축에 속한다고 했다. 본인의 힘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며 귀걸이에 손을 댔다. 이때껏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만, 일단 SOS를 보내는 방법으로 이만큼 효과적인 건 없었으니까.

파직, 그녀가 귀력을 써 귀걸이의 자수정을 깨뜨려버렸다. 그러자 검은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와 동굴 안을 헤젓다가 바깥으로 날아갔다.

“무슨 수작이지? 포기하고 얌전히 내 색시가 되도록 해. 나는 네가 아주 마음에 들었으니까.”

금돼지가 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며 붙잡을 것처럼 손을 뻗어오자, 신라는 발치에 떨어져 있던 나무 막대를 집어 들어 허공에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다가오지 마. 후회하기 싫으면.”

“나는 처녀밖에 건드리지 않는다. 왜, 흠모하는 남정네라도 있더냐?”

“……”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억울할 것도 없겠구나. 자, 이리 와서 얌전히 누워라!”

억센 손이 신라의 가는 손목을 낚아챘다. 힘의 차이 때문에 속절없이 끌려간 그녀는 기지를 발휘해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나무 막대로 금돼지의 얼굴을 강하게 가격했다.

“윽…!”

귀력을 담아 내려치니 조금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금돼지가 얼굴을 움켜쥐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신라는 재빨리 동굴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아…!”

그러나 곧장 발목이 붙잡혀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금돼지는 이마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킬킬거리며 신라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이래야 잡아먹는 맛이 나지! 그래, 더 발악해 봐라!”

“윽…!”

완전히 올라탄 금돼지가 빨개진 눈으로 신라의 옷을 마구잡이로 찢어발겼다. 셔츠가 넝마가 되면서 살갗과 속옷이 드러났다.

“그래, 아주 탐스러운 육신이다…. 실수로 뜯어먹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군! 킬킬!”

“읏, 저리 꺼져! 더러운 짐승 새끼!”

두 팔로 아무리 밀어내도 짐승의 현신은 꿈쩍도 않았다. 더러운 혀가 가슴골부터 쇄골까지 찐득하게 핥아 올렸다.

“싫어…!”

“에헤헤, 역시 기대한 것만큼 달구나! 여기도 맛볼까! 아아, 여기도!”

놈이 거치적거릴 때마다 찢어버려 이제 상의는 속옷 말고는 걸친 것이 없었다. 입술도 핥으려 하자 신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크윽, 네 이년! 색시로 삼을 여자이니 곱게 처녀지를 빼앗을 작정이었다만…. 이렇게 된 이상 고통스러운 첫 경험을 만들어 주지! 킬킬킬….”

“이 더러운…!”

신라의 눈동자가 순간 붉은빛을 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강한 요기에 금돼지가 주춤한 사이 신라의 발이 그의 목을 걷어찼다. 그러자 큰 몸집이 동굴 저 안까지 굴러떨어졌다.

“하아, 하아…!”

귀력을 한 번에 소진하니 온몸에서 힘이 죽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쓰러져버리고 싶었지만, 이것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찬스였다. 신라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입구 쪽으로 달음박질쳤다.

“다리야, 제발…!”

답답하게도 손발이 통 말을 듣지 않았다. 가까스로 입구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멧돼지의 형상으로 다시 변한 금돼지가 포효하며 단번에 거리를 좁혀 왔다.

크워어어어-!

뒤를 확인하며 입구 바깥으로 손을 내뻗은 신라는, 누군가 덥석 손을 붙잡는 감각에 깜짝 놀랐다.

쑤욱-

손을 낚아챈 이가 강한 힘으로 그녀의 몸을 끌어당겼다. 동굴을 벗어나자마자 시야가 점멸하듯 갑자기 환해졌다. 그리고 그 앞에 거짓말처럼 한신후가 서 있었다.

“잘했어.”

나지막이 말한 신후는 날아드는 그녀의 몸을 한 팔로 감싸 안으며 동시에 다른 손을 동굴 쪽으로 뻗었다.

- 이 망할 계집이-!

흥분해서 달려 나온 금돼지의 집채만 한 몸이 신후의 손에 막혀 멈췄다. 씩씩대며 밀어붙이지만, 신후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후는 시선을 잠시 내려 품 안에 있는 신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거의 헐벗은 몸, 번들거리는 살갗을 보면 어떤 짓을 당할 뻔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결계가 처져 있어서 밖에서는 들어갈 수 없었어. 혼자 힘으로 나와 줘서 고맙다.”

“계속… 기다렸어요?”

“널 믿는 수밖에 없었어.”

늘 차갑던 그의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겉은 침착해 보여도 억누르고 있는 분노가 검게 뿜어져 나오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신라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집어삼켰다. 동굴을 둘러싼 결계를 제외한 모든 돌벽이 산산조각 나 아직까지 잔해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잠들어도 좋아. 안전하게 데려가 줄 테니까.”

“…조심… 해요….”

“그래.”

신라는 신후의 품에서 조용히 잠에 빠졌다.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한 신후는 금돼지의 머리채를 잡아 반대편 수풀 쪽으로 던졌다. 다시 동굴로 숨지 못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산을 통째로 날려버리지 않도록 조심할게.”

신라를 잠시 동굴 바깥벽에 기대 앉힌 그는 금돼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잔뜩 흥분한 금돼지는 신후를 향해 곧장 달려들려다가, 갑자기 껌껌해지는 주위 풍경에 두리번거렸다.

- 이, 이건? 너는 설마….

“이 모습으로 일부러 변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어쩔 수 없지.”

신후의 뒤로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사람의 형상에서 점차 커다란 늑대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그의 정체를 눈치챈 금돼지가 겁에 질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반대로 인간의 형상으로 변한 금돼지는 급히 그 장소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사방이 어두워 어디가 동서남북인지 가늠할 방법이 없었다.

“갈기갈기 물어뜯어 죽이려면 이 모습이 더 나으니까.”

“사, 살려줘! 잘못했어! 저 계집이 흠모하는 사내가 없다고 했단 말이야!”

금돼지가 두려움에 울부짖을수록 늑대의 실루엣은 점차 거대해졌다. 분노한 어둑시니에게 자비는 없었다.

- 끄아아아아아악!

곧 날카로운 포식자의 이빨이 금돼지의 몸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 * *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 비몽사몽간에 한참을 듣고만 있었던 것 같다. 눈이 자연스럽게 떠진 신라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창가에 기대선 신후가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듣기 좋았던 목소리는 그가 통화하는 목소리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나머지 캠프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신후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 신라를 잠시 쳐다본 다음 말을 이었다.

“일단은 데리고 서울로 올라갈 생각입니다. 네. 그럼 학교에서 뵙겠습니다.”

통화를 끝마친 그는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정신이 들었어?”

“여기가 어디예요?”

“아직 강화도야. 근처에 있던 호텔로 왔어.”

“사람들한테는….”

신후는 침대에 느리게 걸터앉았다.

“방금 학과장한테 널 찾아서 데리고 올라간다고 해뒀으니까 마음 쓸 거 없어.”

그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신라의 상태를 관찰했다.

“괜찮아?”

모든 것이 함축된 질문이었다. 신라는 정신을 잃기 전 겪었던 일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덮고 있던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괜찮…아요.”

고개를 숙이니 어느새 편안한 원피스로 갈아입혀져 있는 게 보였다.

“호텔에서 구한 새 옷으로 입혔어. 그대로 둘 수 없어서.”

“…네.”

도통 시선을 들지 않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그녀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움찔, 덤덤한 척 숙여 있던 고개가 눈에 띄게 떨린다. 신라는 무의식중에 한 행동에 본인도 놀라 신후를 쳐다봤다. 신후의 눈빛이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을 리 없지.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움에 미치고도 남았을 상황이니까.”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위험하긴 했지만 심한 상처도 없고….”

“유신라.”

“정말 괜찮…”

신라는 갑자기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 눈물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성이 괜찮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뒤늦게 폭발한 공포심이 그녀를 다시 아까의 장소로 끌고 갔다. 주체할 수 없는 울음 때문에 입을 꾹 틀어막는 그녀를 보고 신후는 떨리는 몸을 품에 안았다.

“참지 마. 울어도 돼.”

“윽, 흑, 으흐…!”

신라는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신후의 품에서 흐느꼈다.

“사실은 두려웠어. 그리고 미치도록 분했어. 당신을 만나기 전이었으면 그렇게 두렵지 않았을 거야. 내가 나 스스로를 포기하는 건 쉬웠으니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

“그런데 힘없는 어린애처럼 꼴사납게, 누가 구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어. 어느 순간부터.”

“그게 당연한 거야.”

신라는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신후를 바라봤다.

“당신이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나약하게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아끼게 된 거야.”

“당신은 몰라. 스스로를 아껴서는 이런 삶을 살 수 없어. 버틸 수 없다고.”

“이제 가능해. 내가 널 지키고 있으니까.”

“아까는 아니었잖아. 그 요괴한테 희롱당하고 죽임당할 뻔할 때, 당신은 곁에 없었잖아.”

“……”

“흠모하는 사내가 있느냐는 물음에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어.”

신라는 신후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천천히 때리기 시작했다.

“멍청이처럼, 한 사람이 떠올랐는데, 입 밖으로 꺼내 보지도 못했다고!”

“…신라.”

“어떻게 확신해? 그 감정을 되찾았을 때, 당신이 날 사랑할 거라는 보장 없잖아.”

신후는 말없이 신라를 끌어안았다. 신라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신후는 놓아주지 않았다.

“미안. 불안하게 만들어서.”

“이거 놔…. 놓으라고!”

“미안.”

신라는 몸부림을 관두고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그의 크고 따스한 품이 두려움을 잠잠하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이 또한 흔적뿐인 따스함이라는 생각에, 마냥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진정됐어요. 씻고 싶어요.”

그녀는 신후의 품에서 벗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대로 욕실로 비척거리며 걸어가다가, 삐었던 발목의 시큰함에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신라!”

신후가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발목은 물론, 온몸의 근육통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쉬는 게 먼저야.”

“싫어요…. 더러운 그놈 체취를 당장 떨쳐내고 싶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쉰 신후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양팔로 들어 안았다. 그리고 직접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신라는 욕조에 걸터앉아 따뜻한 물을 틀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갈아입을 옷을 또 구해올 테니.”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 신후는 우뚝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셔츠 자락이 붙들려 있었다.

“피…. 많이 묻었네요.”

신라가 그의 옷 군데군데 물든 핏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피는 아니니까 괜찮아.”

“욕실이 하나밖에 없어요.”

“난 조금 이따가…”

그때, 신라가 입고 있던 원피스를 벗기 시작했다. 신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말했다.

“도망치지 마.”

“……”

“고개 돌리지 마.”

“…신라.”

신라는 입고 있던 것들을 모두 탈의하고 전라가 된 채 똑바로 섰다. 신후는 비스듬히 선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팔뚝의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그만둬. 다치게 할 거야.”

“괜찮아. 사랑이 없는 행위이니까.”

“……”

“내가 두려워서 매달리는 거야. 당신 기운으로 보호받고 싶어서.”

“그 짐승보다 더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놈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어. 네가 봤다면-”

신라는 더는 말하지 않고 신후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녀의 맨 살갗이 닿자 신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늘어진 이성의 끈이 끊기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길….”

피 묻은 셔츠를 단번에 찢어 던져버린 그는 그대로 욕조 안으로 들어가 신라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목덜미를 조이듯이 어루만지며 다급하게 입술을 집어삼켰다. 절뚝이는 다리가 방해되지 않도록 가벼운 몸을 번쩍 들어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샤워기의 물을 켰다. 아직 탈의하지 않은 바지가 흠뻑 젖어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뜨끈한 물이 두 사람의 몸을 깨끗이 씻어내렸다.

“허억, 허억…”

누구의 숨인지 모를 소리가 욕실을 메웠다. 신라는 젖은 신후의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눈을 마주쳤다. 이미 이성을 잃은 눈동자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렵지 않아.’

힘 조절이 안 되는 손길이 젖가슴을 쥐어짜고 날카롭게 세운 이가 쇄골에 잇자국을 내어도, 금돼지 때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읏…!”

신후는 신라의 두 손을 머리 위 벽에 꽉 누른 채로 다시금 그녀의 입술과 혀를 탐했다. 급한 손길이 가슴 둔덕을 지나 배꼽 아래로 내려간다.

“아!”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 없던 곳이 희롱당하자, 신라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꼬아진 다리가 그의 두터운 허벅지로 인해 자비 없이 벌려졌다. 음부 바깥을 지분거리던 손길이 곧 더 깊숙한 안쪽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쑤욱, 쑥, 꽤 젖어 있었는지 그녀의 내부가 신후의 손가락을 하나둘 수월하게 집어삼켰다.

“아…! 읏…”

입술을 꽉 깨물며 신음을 참아내는 신라를 보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후는 그녀의 턱을 벌려 혀를 집어넣었다.

“참지 마.”

“하… 아….”

“좀 아플 거야.”

목덜미를 사정없이 깨물고 빨아대는 것을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이어 덮쳐온 상상도 못 할 압박감에 신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학…!”

그녀는 반사적으로 신후의 양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밀려나긴커녕 그녀에게 더 밀착하며 이제 막 앞부분만 끼워 맞춘 것을 꾹꾹 밀어 넣었다.

“미안….”

“흐윽-!”

신후는 한 손으로 벽을 짚은 채 한 손으로 신라의 엉덩이를 끌어안았다. 신라는 끊기는 숨을 겨우 내쉬며 오갈 곳 잃었던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시야가 점멸하고 그의 것이 가득 들어찬 아래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아니, 이미 찢어졌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신후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후우….”

욕실 벽에 금이 갈 정도의 악력을 발휘해 찰나에 이성을 붙잡은 신후는, 최대한 천천히 삽입질을 시작했다. 신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입을 꽉 틀어막았다. 철퍽, 철퍽, 물에 젖은 두 사람의 살갗이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두려움에 마냥 조이기만 하던 그녀의 내부가 점차 긴장을 풀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자, 신후는 점차 행위에 속도를 가했다. 그는 가녀린 몸을 부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대신 욕실 벽이 점점 산산조각이 났다.

“으아…! 앗! 아아!”

푹, 푹, 푹, 사내의 분신을 처음 받아들인 처녀지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크기였다. 결국 눈물을 내비치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그녀의 눈가를 짐승처럼 핥아 올렸다. 그리고 신음을 쏟아내고 있는 입술을 깨물고 빨아들였다.

“크윽….”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신후의 몸에서 정제되지 않은 어둑시니의 기운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언뜻 짐승의 눈동자로 변하기도 했다. 그의 기운을 그대로 흡수해버린 신라는 어느 순간부터 고통이 아닌 달뜬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애욕으로 가득 찬 몸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더…, 흑, 더…!”

“크으…!”

쾅-! 힘 조절을 하지 못한 신후의 발이 욕조를 산산조각 냈다. 그들의 몸이 어둠에 휩싸이더니, 바깥에 있는 침대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신후는 신라의 두 손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만들고 다시 삽입을 시작했다. 아직 단단함이 조금도 줄지 않은 성기가 처녀지로 사정없이 밀고 들어갔다.

“아…!”

“크윽….”

침대가 덜컹덜컹 흔들릴 만큼 거센 움직임에 신라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어떻게 이 행위를 시작했는지는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황홀경이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가 콱콱 내부를 채울 때마다 뜨겁고 저릿한 감각이 폭죽처럼 터지면서 온몸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신후의 눈동자는 이제 완전히 어둑시니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하악…!”

오르가슴에 다다른 신라의 몸이 순간 활처럼 휘었다. 신후는 절정감에 몸부림치는 젖은 나신의 곳곳을 깨물고 핥아 올렸다. 하얀 허벅지를 활짝 벌려 방금 자신의 것을 가득 물고 있었던 입구를 혀로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감히 이곳을 범하려 했던 금돼지를 다시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빨…리….”

끊어지는 목소리에 그는 시선을 들었다. 신라가 안달 난 몸짓으로 그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한 번 절정을 맛봐 놓고 전혀 애욕이 사그라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신후는 그녀의 손에 입 맞추고는 뜸 들이지 않고 성기를 끼워 맞췄다. 잔뜩 부어 빨개진 것이 애원하듯 뻐끔거렸다.

‘사랑…스러웠겠지.’

이를 악문 그의 눈에서 또 아지랑이가 겉돌았다. 오로지 정욕만으로 물든 분신이 신라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침대 위에서 어둑시니에게 사로잡힌 여인의 달뜬 숨과 비명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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