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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장. 과 캠프 (37/126)

36장. 과 캠프

“그래서, 방학 계획은 캠프 얘기가 다야?”

신후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바깥에서는 정오의 태양이 캠퍼스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신라는 잠깐 생각하다가 답했다.

“교수님이 생각하는 스케줄이 더 중요하니까, 캠프 다녀오고 이후의 계획은 그걸 듣고 짜보려고 했어요.”

신후는 팔짱을 낀 채 입가를 천천히 매만졌다.

“내가 생각하는 스케줄이라…. 민 조교가 그쪽 무리 중 하나를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놨으니 당분간 큰 위협은 없을 거야. 그러니 평소처럼 의뢰가 들어오면 출장을 나가는 일이 대부분이겠지만….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의뢰인의 신분을 명확히 조사하고 나도 현장에 매번 나가게 될 거라는 정도지.”

“매번이요?”

“또 어떤 형태로 우리를 건드릴지 모르니까. 피해를 최대한 막는 차원에서.”

“…그렇군요.”

확실히 신후가 함께 현장에 나간다면 어렵게 풀릴 일도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되도록 외근에서 빠졌던 이유는 조교들에게 직접 문제를 해결하게 함으로써 힘을 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버스를 타고 가는 건가?”

과 캠프에 관한 질문이었다. ‘학생들은’이라고 한정 지어 묻는 것에 의문이 들었지만, 신라는 일단 대답해주었다.

“네. 두 대 정도 대절해서 갈 생각이에요.”

“자리는 넉넉하겠군.”

“그렇긴 하죠.”

신후가 왜 그런 것에 관심을 두는지 모를 수밖에 없는 그녀는 두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인 주말, 학생들이 모이기로 한 학생회관 앞 공터에 캐주얼한 복장으로 나타난 신후를 보고 신라는 그제야 왜 그가 그런 질문들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학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민낯으로 왔던 4학년들은 화장을 하러 급하게 어디론가 사라졌고, 신입생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신후에게 눈도장을 찍고 갔다.

신라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함께 캠프를 준비했던 학생들이 왜 미리 말 안 해줬느냐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해줄 말이 없었다.

선글라스를 끼며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다가오는 그를 보고 신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근육 진 몸매가 적당히 드러나는 검은 티에 시원한 린넨 소재의 바지를 입은 그는 쓸데없이 모델 같아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왜 화난 얼굴이야?”

신라는 주위에서 듣지 못하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오신다는 말씀 없었잖아요.”

“네가 안 물어보길래.”

“왜 이런 데 안 가시다가 갑자기 참여하시는 거예요?”

“내가 창피해?”

“창피하긴요. 어깨가 으쓱하다 못해 뭉쳐버리는 것 같은데요?”

“벌써 피곤하면 안 되지. 이 많은 인원들을 인솔해야 하는데. 막 성인이 된 녀석들도 있으니 얼마나 고삐 풀린 망아지 같겠어?”

“그런 꼴 구경하러 오셨어요?”

“아니. 당연히 도와주러 왔지.”

“어떻게요?”

인원 파악이 끝나고 질서 있게 버스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로 못다 한 얘기를 나누느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신후가 공터 중간으로 걸어가자 학생들의 시선이 거짓말처럼 동시에 쏠렸다.

“이제 떠나야 시간이 맞을 것 같은데.”

큰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파급력은 엄청났다. 다들 짐을 챙겨 들고 버스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다른 곳에서 멍을 때리고 있는 친구들이 있으면 알아서 챙겨서 데리고 왔다.

공터에 남아 있는 인원은 준비위원회와 신후 뿐이었다. 준비위원회 학생들은 그에게 거의 절이라도 할 분위기였다.

버스를 출발시키기 직전 학과장과 배 교수가 나타났다. 그녀들은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사람 마냥 캐리어를 열심히 끌면서 왔다. 게다가 옷에는 얼마나 힘을 줬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돌아볼 정도였다.

“저희가 좀 늦었죠~ 호호호.”

“근처에서 커피 한잔하고 오느라~”

학과장은 먼저 자리가 남는 버스에 올랐지만 배 교수는 신후가 오를 때까지 기다리려는 눈치였다. 과대가 눈치 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교수님, 학과장님과 같은 버스에 타시면 돼요.”

지금 타게 되면 분명히 학과장 옆에 앉을 것이 뻔했기에 배 교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희 정리하는 거마저 보고 탈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어서 정리해~”

캠프 진행에 필요한 물품들과 주류까지 모두 버스에 실은 준비위원회도 하나둘 버스에 올랐다. 신라가 큰 배낭을 짊어지려는 것을 보고 과대가 다가왔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신후가 먼저였다. 그가 배낭을 들어 어깨에 메자 신라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들어도 괜찮은데….”

“따라와.”

신라와 함께 자연스럽게 버스에 오르는 신후를 보고 배 교수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허무함에 손수건을 물어뜯고 있던 그녀는 버스가 출발할 것처럼 움직여서야 깜짝 놀라서 급하게 올라탔다.

학과장과 배 교수가 탄 버스와 다른 버스에 오른 신후와 신라는 맨 앞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버스에 올라타 있는 신후의 모습이 퍽 어색해서 신라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선글라스를 벗어 케이스에 넣은 신후는 웃는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정말 과 캠프에 참여하는 거 맞으세요?”

“지금 가고 있잖아.”

“처음 아니에요?”

“괜찮아.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왜 마지막인데요?”

“이다음에는 네가 없잖아.”

신후는 그렇게 말하며 잠들 것처럼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뭔가 다른 의중이 있는 것 같지만 금방 말해줄 것 같지 않아서, 신라는 일단 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함께 눈을 붙이기로 했다.

* * *

“형~”

“오빠~!”

세 명의 동생이 골목을 돌아 달려오는 것을 보고 동주의 입가가 자연스럽게 당겨졌다. 온몸에 매달려오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품에 안은 그는 작은 머리들 너머의 공간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했다. 1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을 기다려주던 또 한 명의 형제는 더이상 그곳에 없었다.

“얘들아, 미안. 먼저 들어가 있을래?”

“왜, 왜?”

“먼저 들어가 있는 사람 비행기 태워줄게.”

“비행기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먼저 집으로 달려갔다.

동주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아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동욱을 떠나보낸 날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사라지지 않고 버텨준 자신의 형을 위한 최소한의 추모이기도 했다.

동주의 뒤로 가방을 멘 또 다른 이가 조용히 멈춰 섰다. 동주에게 그의 쌍둥이 형을 이만 떠나보내라고 가장 먼저 얘기했던 우선이었다. 동주를 위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그에게 얼마만큼의 상흔을 남길지, 우선은 솔직히 예상치 못했었다. 그리고 애초에 가족이 없는 자신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동주의 저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감정이 오롯이 전해져 오는 기분이 들었다. 전해져 온 슬픔은 그대로 죄책감이 되었다.

동주는 잠시 뒤 덤덤한 모습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우선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우선의 얼굴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동주가 굳어 있는 어깨에 손을 올리자마자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욱이가 네 약점이라고만 생각했어…. 함께 오래 봐 와놓고, 사실은 네 유일한 버팀목인 줄도 모르고….”

“오래전에 보내야 했던 가족이었어. 네 말이 다 맞았어. 붙들고 있었던 건 나만 좋자고 한 일이었으니까…. 동욱이 형한테도 이게 편히 잠드는 길이었을 거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그렇게 서 있는 걸 보니까 왜 이렇게 아프지…. 그대로 네가 사라져버리면 나도 죽을 것같이 외로워질 텐데….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

동주도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냈다. 그리고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동욱이 형 지켜준 일등 공신이 왜 이렇게 질질 짜고 있냐.”

“미안… 미안해….”

“고맙네. 그 말은 네가 날 형제로 생각해준다는 거잖아.”

“당연하지…. 함께 해온 세월이 얼마인데….”

멀찍이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이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 동주와 함께 우선의 등을 토닥여 줬다.

“울지 말고 어깨 펴. 아줌마도 너한테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동욱이가 편하게 갈 수 있도록 지켜줘서 고맙다.”

“아줌마…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은 오늘 마지막으로 하자. 알았지? 저녁 안 먹었으면 들어가서 같이 먹고 가. 늘 한 사람분을 더 차리던 게 버릇이 돼서…. 우선이가 빈자리 채워줄 수 있지?”

“…네….”

동주의 어머니는 우선을 먼저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동주도 웃으며 따라 걸어가다가, 한 번 더 골목길을 돌아봤다. 집이 이사를 가게 되더라도 이 길 만큼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언제 돌아오든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지켜줄 것만 같은 공간. 무엇보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될 공간이니까.

* * *

사학과 캠프가 시작된 지 이틀째. 조교들은 시원한 연구실 안에서 논문을 쓰거나 자료를 수집하며 한적한 한때를 보냈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던 혜령이 갑자기 책상을 치며 한숨을 쉬었다.

“아아, 생각할수록 샘나네. 지금쯤 게임하고 웃고 떠들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겠지? 두 사람?”

건우가 음료 빨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런 거 안 해봤어? 다 부질없잖아~”

“그때 제일 흥분해서 게임에 참여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그건 지기 싫어서 그랬던 거고!”

“하루가 멀다고 이 여자 저 여자랑 썸 타고 다녔던 사람도 동일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내, 내가 언제!”

흥분해서 벌떡 일어나는 건우를 보고 동주가 박수를 쳤다.

“10초 만에 싸움이 나는 것도 보통 사이는 아니라고 봅니다.”

옆에 앉아 있던 우선도 맞장구를 쳤다.

“난 사실 기록 재고 있어. 저번에는 5초 만에 싸운 적도 있거든.”

“눈싸움이 시간 기록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난 3초도 봤어. 혜령 누나가 비웃는 걸 보자마자 건우 형이 발끈했다니까.”

어느새 또 사이가 좋아져 협공하는 동주와 우선을 보고 혜령은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됐다, 됐어. 결론은 교수님이랑 신라가 부럽다, 이거야.”

“사실 그렇지만도 않아요, 누나.”

우선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뭐가?”

“몇 시간 정도만 얼굴 비추다 와도 되는 건데, 교수님이 굳이 자가용 놔두고 처음부터 참석하신 이유가 따로 있거든요.”

“설마…. 강화도에 일이 있어서 가신 거야?”

우선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세상에. 신라도 알아?”

“글쎄요. 아마 모르지 않을까요?”

“불쌍한 신라~ 그자는 교활한 늑대야~ 절대 감동해서 넘어가지 마렴!”

그 와중에 강화도에 출장 갈 일이 없어진 건우는 홀로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외치고 있었다.

* * *

이틀 차 캠프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신라는 통 보이지 않는 신후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찾았다. 어제 유스호스텔에 도착하자마자 일이 생겨 근처에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진 그는 하루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일정표를 들고 걸어오던 과대가 공터 근처에 멍하니 서 있는 신라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뭐해? 누구 찾아?”

“아, 아니야. 또 준비할 게 뭐 있지?”

“준비할 건 따로 없는데, 해 저물기 전에 보물찾기해야 하잖아? 난이도가 어느 정도 되는지 담당자들이 테스트해달라고 부탁해서, 점심 먹고 너랑 내가 한 번 찾으러 다녀보면 될 것 같아.”

“그렇구나.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자리를 뜨는 신라를 보고 과대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신라야!”

“응?”

과대는 관자놀이를 긁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얘기했다.

“내가 여기에서 렌트카 한 대 빌려놨는데, 점심 따로 나가서 먹고 오지 않을래?”

“준비위원회만 나가서 먹고 오는 거야?”

“아니, 배식도 신경 써야 하니까, 나가는 건 우리 둘만.”

“왜?”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묻는 신라를 보고 과대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냥… 과 생활 안 하고 지내는 너한테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기꺼이 준비위원회로 참여해준 게 고마워서. 감사 인사차?”

“아, 그거라면 괜찮아.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인데 3학년으로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가 미안하던 참이었거든. 같이 하자고 말해줘서 오히려 고마웠어.”

“그…래?”

“응. 그럼 이따가 점심 먹고 보자.”

가벼운 걸음걸이로 멀어져가는 신라를 바라보며 과대는 홀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뭐지? 철벽인 거야, 아니면 오래 아싸로 지낸 탓이야…. 넘어오게 하기 어려운 타입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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