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방학
1학기 기말고사가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교수들은 티타임이라는 명목하에 회의를 가졌다. 학과장의 사무실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중국 황실에서 마셨다고 전해 내려오는 전통 차를 마셨다.
그녀가 선심 쓰듯 내놓는 것을 보고 신후는 웃음을 삼켰다. 그 차는 17세기 무렵 유행하다가 남자의 정력을 감퇴시킨다고 하여 모조리 처분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황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하여 차에 대한 얘기는 역사서에서 쏙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 교수님은, 차 맛 안 보시나요?”
상석에 앉은 학과장이 새침하게 묻자, 신후는 눈썹을 한 번 들썩이고는 찻잔을 들어 차의 향을 맡았다. 그 모습이 퍽 그림 같아 남녀 불문하고 교수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제가 요새 불면증에 시달려서 카페인이 든 것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향만 천천히 맡겠습니다. 아주 좋군요.”
“흠, 흠. 그러면 뭐, 루이보스차도 있으니까 그거라도 드시든지.”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죠.”
서양 근대정치사를 담당하는 젊은 여교수가 옆자리에서 턱을 괴며 신후를 바라봤다. 그녀는 총장의 딸로, 인맥 덕분에 겨우 서른 남짓한 나이로 교수의 직위를 얻었다.
“우리 한 교수님이 왜 밤늦도록 잠에 못 드실까~? 애인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배 교수님도 요새 숙면을 통 못 취하시나 보군요.”
“어머, 그래 보여요? 어떻게 알았지?”
“다크서클이 많이 짙어지셔서. 너무 일에 심취하다가 건강을 소홀히 돌보실까 봐 걱정이네요.”
나머지 교수들이 겨우 웃음을 삼켜냈다. 배 교수는 인맥에 의존하느라 연구는 내팽개치고 곳곳에 접대를 하러 다니기 바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다크서클에서 이미 자존심이 상해버린 그녀는 재빨리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기 바빴다.
그사이 교수들 사이의 화제가 바뀌었다.
“매년 하는 과 캠프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강화도로 간다더군요.”
“‘역사 기행 캠프’라고 나름 이름을 붙였던데, 귀엽지 않아요? 호호. 시험도 끝났는데 가서 공부를 얼마나 하겠다고.”
“인솔자가 있어야 하니 한두 분은 꼭 참석해야 할 텐데, 이번에는 누가 가시려나? 가장 인기가 있을 법한 분은 늘 이런 데엔 참석을 안 하시니까….”
신후를 겨냥해서 하는 말이었다. 배 교수가 은근히 신후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후는 차의 향을 맡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신라에게서 캠프 얘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그녀도 그런 데에 참여할까, 궁금해져 버렸다.
“전 학생이 참여해야 하는 캠프입니까?”
신후의 물음에 배 교수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불참하면 과 안에서 제공하는 정보라든지, 시험 문제 족보라든지, 공유받는 데 불이익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들 기분 좋게 참여하는 분위기예요. 방학 전 마지막 모임이기도 하고.”
학과장이 말을 얹었다.
“보통 3학년들이 준비위원회를 맡는데, 이번에는 3학년에 믿을만한 인재가 많아서 다행이에요. 과대도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애고, 아는 거 많은 신라도 있고…. 그러고 보니 둘 다 애인이 없지 않아요? 둘이 엮이면 참 좋으련만.”
배 교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선남선녀라 딱 어울리는데, 캠프 준비하다가 눈 맞으면 딱 좋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신후가 물었다.
“신라가 준비위원회입니까?”
“한 교수님 모르셨어요? 학부 연구생인데.”
“저한테는 그런 얘기를 잘 안 하는 학생이라서요. 어쩔 수 없군요.”
“뭐가요?”
학과장의 물음에 신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가겠습니다. 제 학생이 준비위원회를 맡았다는데 지원을 안 해줄 수가 없겠군요.”
다들 놀란 얼굴을 했다. 한신후는 결코 공적인 일 외에 자신을 드러내는 캐릭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배 교수가 새침해진 얼굴로 말했다.
“한 교수님은 참 자기 학생 잘 챙기나 봐요~ 여학생이라서 더 잘 챙겨주는 건 아니시고요?”
그에 다른 교수들이 먼저 나서서 신후를 옹호했다.
“에이, 무슨. 조교들이 연구하는 데 한 교수가 얼마나 지원을 많이 해주는데.”
“한 명은 중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교수 회의가 끝나고, 교수들은 각자의 사무실로 흩어졌다. 결국 과 캠프에는 학과장과 신후, 그리고 배 교수가 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학과장과 신후가 가기로 결정되려는 찰나 배 교수도 냉큼 손을 든 것이었다.
배 교수가 종종걸음으로 신후의 속도를 따라잡았다. 진즉 길이 갈렸는데도 끝까지 쫓아오고 있는 배 교수를 보고 신후는 보이지 않게 조소를 흘렸다. 못 본 척하고 교수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니 그제야 그를 불러 세우는 배 교수였다.
“한 교수님, 시간 비시면 저 차 한 잔만 주세요.”
“지금 마땅히 대접해드릴 차가 없네요.”
“그러면 커피라도 타 주세요. 과 캠프 가서 뭘 할지도 상의해야 하고요.”
“어차피 학과장님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분이 우리 대표이시니까요.”
“젊은 사람들끼리 의논해야 애들 정서에 더 잘 맞출 수 있지 않겠어요?”
그녀는 막무가내로 그를 지나쳐 교수실로 먼저 들어갔다. 신후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어머~ 역시, 사람은 일하는 공간을 보면 성격이 딱 보인다니까. 고급스러우면서 정갈한 것 좀 봐.”
한가운데에 서서 찬사를 늘어놓는 그녀를 지나친 신후는 집무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컴퓨터를 켜서 작업하던 서류 창을 띄웠다.
“원래 자기 사람을 그렇게 잘 챙겨요?”
배 교수가 은근히 물으며 책상 위에서 턱을 괴었다. 허리를 구십도 가까이 숙이니 깊이 파인 옷 때문에 가슴골이 다 드러났다. 신후는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제가 책임지는 사람들이니 제가 챙겨야죠.”
“연애 스타일은 어때요? 연애할 때도 애인을 그렇게 잘 챙기시나요?”
“내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잘 챙기는 편이죠.”
“한 교수님한테 대접받으려면 마음대로 못 돌아다니겠네~”
“밖에 있을 때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고상하게, 때로는 나에게도 철벽을 칠 줄 아는 여자라면, 평생 사랑해줄 수 있습니다.”
“그 얼굴로 고상한 여자가 스타일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가요?”
배 교수는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는 벌어졌던 가슴팍의 옷매무새를 추슬렀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이렇게 입고 왔어요. 원래는 저도 고상하고 도도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편이거든요. 아무튼 과 캠프가 기대되네요. 학생들이 괜히 우리 보고 엮는 건 아닌가 몰라~”
배 교수가 혼잣말의 향연을 늘어놓고 있을 때, 연구실 쪽에서 문이 두드려지더니 혜령이 들어왔다.
“아, 배 교수님 계셨네요.”
“…혜령이구나?”
배 교수의 시선이 혜령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원래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는 명품만 두르고 다니던 배 교수는 학생들에게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혜령을 따라잡기 위해 억지로 스타일을 뜯어고치는 중이었다. 그녀가 혜령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있다면 십중팔구 옷을 어디에서 샀는지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혜령은 머리까지 풀어 헤치고 신후의 사무실로 쳐들어온 배 교수의 속셈을 눈치채고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어머~ 우리 배 교수님 오늘 스타일 너무 예쁘시다. 제가 추천해드린 브랜드에서 사셨구나?”
“그래? 신상 나왔길래 한 번 사봤어.”
“그런데 이거 사무직군이 소화하기에 어려운 스타일인데. 하긴, 배 교수님은 평소에 정숙한 스타일은 아니시니까 그럴 필요 없겠다. 그죠?”
배 교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얘, 얘는~ 내가 밖에 나가면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만나고 다니시는 분들 스타일이 장난 아니신가 봐요? 그 스타일이 고상하다니.”
그때 열려 있는 문틈으로 신라가 걸어 들어왔다. 혜령은 타이밍 좋게 나타난 신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요새는 저런 스타일을 고상하다고 말하거든요. 얌전한 블라우스에 찢어지지 않은 스키니 진. 얼마나 고와요? 뭐, 신라는 워낙 태생적으로 양반집 규수 같은 느낌이 풍겨 나오긴 하지만.”
배 교수는 슬쩍 신라의 스타일도 훑어봤다. 그리고 곧 혜령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에게는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고상함이 넘쳐흘렀다.
신라가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신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시험이 끝나서, 방학 계획 말씀드리러 왔어요.”
신후는 그 말을 듣고 혜령에게 눈썹을 들썩여 보였다. 알아서 방해꾼을 처리하라는 소리였다. 그에 한숨을 내쉰 혜령은 선심 쓰듯이 배 교수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그럼 교수님, 저와 요즘 패션 트렌드에 대해 논하러 가보실까요?”
두 여성이 구두를 또각거리며 사무실을 나서자 갑자기 공간이 조용해졌다. 신라는 문을 닫고 소파에 앉았다. 컴퓨터를 끄고 일어난 신후가 전기 포트로 물을 끓였다.
“차 어때?”
“조금 더워서요.”
“아이스로 타 줄게.”
그는 곧 향이 좋은 차를 두 잔 타 왔다. 그리고 신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방학 계획이라니, 궁금해지네.”
그의 얼굴에 교수 회의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흥미가 가득했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요.”
“시험은, 잘 봤어?”
“중간고사랑 비슷하게 봤어요.”
“본인이 그렇다면 장학금은 따 놓은 당상이겠군.”
“…김칫국은 마시고 싶지 않아요.”
신라는 가지고 들어온 투명 파일철을 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찾아온 것이 단순히 방학 계획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눈치챈 신후였다.
“말해봐. 그만둔다는 소리 아니면 다 들어줄 테니까.”
“사실 이번에 과 캠프가 있는데요….”
“그런데?”
“제가 준비위원회를 맡아서 진행하고 있거든요.”
“귀찮은 일을 맡게 됐네. 학부 연구생이라서 그런가?”
“그런 탓도 있었죠. 본의 아니게 유명해져 버려서.”
학생들이 보는 곳에서 지나치게 친근함을 드러내는 신후를 겨냥한 말이었다. 신후는 큭큭 대며 웃었다.
“그래서. 뭘 맡았는데?”
“교수님들한테 설문 조사를 하고 있어요. 퀴즈를 만들 거거든요.”
“그래?”
“그런데 교수님은 평소에 이런 거에 잘 참여 안 한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돼요.”
신후는 일단 신라에게서 설문지를 건네받아 찬찬히 훑어봤다. 평소에 궁금하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들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신라는 민망해져서 괜히 뒷머리를 긁고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자극적인 질문들을 적어놓은 학생들이 정작 설문지 배달은 신라에게 시킨 것이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으면 돼?”
볼펜을 꺼내며 묻는 그를 보고 신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주시려고요?”
“안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유치하잖아요, 이런 거…. 평소에도 안 했다고 하니까.”
“안 했지. 왜 하는지 몰랐거든.”
신후는 기분 좋은 얼굴로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 내려갔다. 연애사를 묻는 것도 있었고, 신체 치수를 묻는 것도 있었다. 스승과 제자가 연애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럴 경우 학점을 주는 데 공정할 자신이 있는지까지.
신후가 예상외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을 적는 것을 보고 신라는 오히려 걱정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학생들이 다 보는 질의응답이니까 너무 솔직하게 쓰시면 안 돼요.”
“왜?”
“예를 들면 첫사랑 얘기에 대감 댁이나 임금님 얘기가 나오면 안 된다는 소리예요.”
심각하게 말하는 신라를 보고 신후는 작게 웃고 말았다.
“내가 평소에 그렇게 눈치 없어 보였나?”
“그런 건 아니지만….”
“다 썼어.”
신후는 설문지를 다시 파일에 껴서 신라에게 돌려줬다.
“평범하게 적었어. 걱정 안 해도 돼.”
“…감사합니다.”
설문지를 조심스레 품에 끌어안는 그녀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겨우 이런 것으로 감동을 받는 그녀가 귀여워 신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인적으로 물어보면 밤을 새워서라도 얘기해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안 간다고 했으면 짜증 날 뻔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