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장. 미련
동주는 우선의 말을 듣자마자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흥분된 숨을 몰아쉬었다.
“뭐…라고?”
“보내주자고. 그래야… 맞는 거잖아.”
“야, 민우선…!”
“산장에서 본 그 소녀의 백(魄), 기억 안 나? 신라에게 부탁하면 동욱이가 뭐에 미련이 남아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싫어. 못 보내.”
단호하게 말하며 돌아서는 동주를 보고 우선이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진즉 사라졌을 백이었어. 정말 사소한 바람이 남아 있을 뿐이었는데, 네 강한 기운을 받아서 여태 떠나지 못하고 저러고 있는 거라고! 너도 알…”
“그래, 알아! 안다고!!”
온몸으로 고함을 내지른 동주가 괴로운 표정으로 우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내가 그걸 몰라? 몰라서 못 보내고 있는 것 같아?”
“……”
“그러는 넌 뭘 알아…. 형제를 먼저 보내고, 억지로 붙잡고 있는 마음을, 형제도 없는 네가 뭘 아냐고!!”
우선은 아무런 반응 없이 동주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화가 차오르면 앞뒤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동주의 천성이니 별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것이다.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우선을 바라보던 동주는 곧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깨닫고 말았다.
“…미안,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사이 큰 소리를 듣고 연구실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선은 옷깃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동주의 손을 조용히 붙잡아 내렸다.
“맞아. 내 주위엔 소중한 사람이 애초에 없었지. 그래서 늘 더 조심스러웠던 얘기지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게 어쩌면 나뿐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기회에 얘기했다.”
“……”
“네가 날 미워하게 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이게 옳은 일이니까.”
우선은 동주를 지나쳐, 연구실 사람들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어딘가로 향했다.
“차동주, 무슨 일-”
건우가 조심스레 물으려 하자, 혜령이 그의 팔을 잡아당겨 말렸다.
멀어져 가는 우선을 바라보던 신라는 이내 동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늘 듬직해 보이던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날 저녁, 동주는 가족들과 함께 식탁에 모여 앉아 식사를 했다. 여느 때처럼 식탁에는 여섯 자리가 있었다. 한 자리는 비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공깃밥과 수저가 놓아졌다. 그곳이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는 동주와 그의 모친만이 알았다.
막내인 희주가 그 자리에 무심코 발을 올려놨다. 동주가 밥을 먹다 말고 그쪽을 쳐다봤다.
“희주야, 발 내려.”
“왜?”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야.”
“싫어.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
탕- 동주가 수저를 세게 내려놨다.
“차희주!”
“…흑, 오빠 이상해! 맨날 아무도 없는 자리에 누가 있는 것처럼 굴잖아! 그런 거 싫어!”
모친이 타이르기도 전에 희주는 울음을 터뜨리며 방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동생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밥알을 씹었다.
동생들을 둘러보고 동욱의 자리를 쳐다본 동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한껏 풀이 죽어 있는 얼굴은 자신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이미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동욱이가… 많이 풀이 죽었지?”
모친의 물음에 동주가 그녀에게 되물었다.
“엄마, 잘 안 보이세요?”
애써 미소 지은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언제부터요…?”
“꽤 오래전부터…. 형체만 흐릿하게 보여.”
“……”
동주는 허탈해진 얼굴로 말을 잃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쳐다보자, 동욱은 바스러질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듯이.
‘널 이승에 붙잡고 있는 게 너의 미련이 아니라 나의 이기적인 미련일 수도 있겠구나.’
그는 눈물이 차오르려고 하는 눈을 억지로 들어 참아냈다. 아픈 결정을 내릴 때가 온 것 같았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주말의 아침. 신라를 비롯한 건우, 혜령은 동주에게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얘기를 듣고 숙연함에 잠겼다.
그의 결심을 듣고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혜령은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우선에게도 연락이 갔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연구실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떠나보내기로 한 거야?”
혜령의 물음에 동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라를 미안한 얼굴로 쳐다봤다.
“네 능력을 빌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무리시켜서 미안하다.”
신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렇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죠.”
그때 동주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그의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네, 엄마. …네? 뭐라고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버린 동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욱이가 또 사라져요?”
동욱은 고민하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자기를 이끌고 가는 이는 동주의 친구라고 말했지만 나이가 많아 보이기도 했고 왠지 모르게 수상했다. 갈색의 상한 머리칼은 고약한 성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좀만 더 걸어가자, 내가 네 형한테 데려다줄 테니까. 알겠지?”
“……”
“그건 그렇고 신기하단 말이야. 백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 선명하지? 말도 잘 알아듣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동욱을 벽에 등지고 서게 했다.
“자- 널 어떻게 요리해줘야 비비 녀석의 분노를 극대화할 수 있을까.”
그가 즐거운 얼굴로 흥얼거리고 있을 때, 그의 뒤로 또 다른 그림자가 들어섰다. 단순히 같은 패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림자의 주인은 빛나는 자수정 조각을 들고 있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지.”
이질적인 목소리에 사내의 얼굴이 경직됐다. 뒤늦게 촉각을 곤두세우며 뒤를 돌아보니, 고고학 연구실의 조교 중 한 명―자신이 얼마 전 함정에 빠뜨린 남자가 서 있었다.
“두 번이나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이쪽을 너무 우습게 본 것 같은데.”
차분하게 말하는 우선에게서 노골적인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주위로 떨어지는 빗물은 강한 열기에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고 있었다.
“광철….”
“생각이 너무 뻔해. 저번에 날 함정에 빠뜨렸던 계략은 네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닌가 보지?”
사내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러나 이마에 선 핏줄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거 평소에는 착한 척 굴며 돌아다니더니, 본성은 그게 아닌가 봐? 왜, 날 이 자리에서 죽이고 싶은가?”
“노리는 건 역시 그건가? 동주를 분노하게 만들어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
“큭큭, 그래. 너도 실은 이 어린 백이 거슬렸던 거 아니야? 이렇게 방해나 되니 말이야.”
우선은 잠시 사내 뒤에 서 있는 동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겁에 질린 어린 백이 움츠러들어 있었다.
“떠나야 맞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아니었어.”
우선이 손을 뻗었다. 온몸에서 수분이 증발하는 끔찍한 감각을 느끼며 사내가 비명 속에 엎어졌다. 사막에서 말라 죽어갈 때의 느낌이 이러할까. 사내는 본능적으로 손을 내뻗어 살려달라고 외쳤다.
우선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
“목숨 구걸을 하고 싶으면 애초에 인간 목숨을 갖고 놀지 말았어야지.”
그는 마지막으로 귀력의 원천이 되는 사내의 머리칼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리고 겁에 질려 있는 동욱에게 손을 뻗었다. 동욱은 바닥에 쓰러져 허우적대는 사내를 지나쳐 우선에게로 무사히 이동했다.
우선은 동욱과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추병귀(帚棅鬼*빗자루귀)에게 말했다.
“비형랑을 꾀어낼 인질로서의 가치조차 없어진 너에게 굳이 더 손을 대고 싶진 않지만, 앞으로 또 허튼짓을 벌이려고 한다면 소원대로 흔적도 없이 증발시켜주지. 나에게는 그 정도 죄쯤, 더해져도 티도 안 날 테니까.”
우선이 사라지고, 그을린 머리를 움켜쥔 채 신음하던 추병귀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내가 아니더라도… 널 요리할 녀석은 따로 있을 것 같은데…. 큭큭!”
우선이 동욱을 데리고 나타나자, 집 앞에 모여 있던 동주와 나머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혜령은 비를 맞고 있는 우선에게 재빨리 우산을 씌워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우선을 훑어본 동주는 그가 귀력을 발휘한 여운으로 손을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민우선, 너….”
“추병귀였어. 자수정 덕에 찾아냈지. 허튼짓하기 전에 손 좀 보고 왔어.”
“…괜찮아?”
“응. 머리칼은 다 태워버렸으니까 당분간 쥐 죽은 듯이 숨어 지낼 거야.”
동주는 천천히 다가오는 동욱을 바라봤다.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데 누구도 아닌 우선이 지켜내 줄 줄은 몰랐다.
“고맙다.”
동주가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말하자, 우선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다 널 믿어서 한 일이야.”
“…알아. 그래서 이제 네 말대로 하려고.”
그들은 동주의 집 거실에 모두 모였다. 혹여나 방해되는 일이 없도록 그의 모친은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신라는 거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동욱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순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착한 아이의 손을 붙잡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동욱의 백이 스스스- 신라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늘 병을 달고 다니는 나약한 몸이었다. 체육대회에서 어떤 종목을 뛰든 늘 1등을 하는 동주와는 달리, 1년 중 집에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동주를 시샘하지 못했던 건, 그가 얼마나 자신을 생각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침대로 달려와 이마를 짚어 열을 체크하고 죽을 끓였다. 아픈 대신 우애 좋은 형제를 얻었다고, 그렇게 운명에 수긍했다.
10살이 되던 해, 백혈병 판정을 받게 됐다. 동주는 무너져 내렸다. 내가 뱃속에서 모든 에너지를 가져갔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아픈 것이라며, 자신을 죽도록 책망했다. 그의 헌신은 날이 지날수록 집착 수준이 되었다. 밥 한 숟갈도 스스로 먹지 못 하게 했다.
작별하는 법도 배워야지, 이렇게 매달리기만 해서 헤어질 때 어쩌려고….
수척해지는 동주를 보고도, 동욱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 걸 그랬나. 너에게 이렇게 짐만 될 줄 알았으면, 남은 에너지마저 모두 다 너에게 줄걸.
넌 예상대로 듬직한 모습으로 잘 자라났다. 동생들에게 늘 멋진 모습만 보여주는 아버지 같은 형. 나는 결코 되지 못했을 모습이다.
그럼에도 네가 너무 괴로워서 무너질 것만 같을 때, 의지가 될 수 있는 존재가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을까. 부끄럽지만 그렇게 생각해서, 될 수 있다면 네 곁에 조금이나마 더 오래 남아 있고 싶었다.
늘 아프기만 했고, 널 지켜준 적도 없었지.
그럼에도 네 마음속에서만큼은,
너를 사랑하는 형으로 남아 있고 싶어.
동욱이 어색해하는 걸 원치 않아서 그동안 일부러 더 형처럼 굴어왔던 동주는, 동욱의 마음을 전해 듣자마자 고개를 떨어뜨렸다. 곧 그의 콧대를 타고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오열을 견뎌내고 있는 동주에게 다가간 동욱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형….”
동주는 옛날 그때로 돌아가 17년 전 그때처럼 동욱을 불렀다. 두 사람은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동욱은 동주보다 1분 더 먼저 태어난 형이었다.
동주는 무릎을 꿇고 그의 어린 형을 끌어안았다. 곧 사라지려는 것처럼 벌써 감촉이 희미했다.
“내가 걱정돼서 남아 있었던 거구나. 늘 내가 형처럼 굴었지만 실은 속으로 많이 의지가 됐었어. 누가 뭐래도 나한테는 한 명뿐인 형이니까.”
점차 투명해지고 있는 동욱의 손이 동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주는 사라져 가는 동욱의 백을 울상이 된 얼굴로 바라봤다.
“너무 오래 붙잡아둬서 미안해, 형…. 그리고 고마워….”
동주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자마자, 동욱의 백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오래전부터 함께 동욱을 봐 왔던 우선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돌아섰다. 혜령도 입가를 가린 채 울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건우는 백의 과거를 엿보느라 기운이 빠져버린 신라를 묵묵히 부축하고 서 있었다.
“죽은 이의 혼백이 떠나지 못하는 건 그 사람만의 미련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미련일까요.”
신라의 물음에 건우가 나지막이 답했다.
“양쪽 다 미련이 없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늘 남겨진 사람의 고통이 더 크지.”
“그런가요….”
“내가 봐 오기엔 그랬어.”
신라는 눈을 감으며 한 사람의 과거를 상상해 봤다. 네 번의 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얼마나 많이 떠나보냈을까.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자 어쩐지 가슴 깊이 애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