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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장. 재회 (34/126)

33장. 재회

시험 바로 전주의 주말 아침, 신라는 공부에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 홀로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았다.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 쪽 책장에서 책의 제목을 훑어보던 그녀는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른 시간인데도 누군가 책을 고르고 있었다. 말끔한 아이보리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그와 등지고 서서 책을 두어 권 뽑아 든 신라는 그것들을 대여하기 위해 책장을 빠져나갔다.

툭-

동시에 돌아선 남자와 팔이 부딪혀 그녀가 들고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책을 줍기 위해 동시에 무릎을 굽힌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키웠다.

“어? 선생님….”

“신라 씨?”

그는 다름 아닌 정신과 의사 강 현이었다. 비록 주치의는 아니었지만, 흔쾌히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었던. 병원 일을 접고 새 일을 찾아 떠난다고 하더니, 주말을 도서관에서 보낼 정도로 여유로운 날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강 현은 신라의 책을 모두 주워 자신의 팔에 끼웠다.

“시험공부?”

“아, 네….”

그의 찰나의 시선이 신라의 상처 난 아랫입술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고 보니 기말고사 시즌이네요. 책은 다 고른 거죠?”

“그렇긴 한데….”

“브런치 한 끼 같이 할 시간은 있을까요?”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는 신라를 보고 강 현이 웃음을 흘렸다.

“아, 미안해요. 너무 몰아붙였죠?”

“아뇨…. 사실 조금 놀랐어요. 이런 데서 뵐 줄은 몰랐거든요.”

“그죠? 주말 아침부터 이런 꽃미남을 보게 될 줄은 몰랐죠?”

신라는 결국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그다운 농담에 다시 스스럼없어진 기분이 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데서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래서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니까 이해 좀 해 줘요. 그럼 같이 나갈까요?”

“네.”

강 현은 신라가 책을 대여하는 것을 기다려준 다음 그녀를 자가용에 태우고 도서관 근처에 있는 디저트 카페로 향했다. 마침 한적한 2층에 창가 자리가 남아 있었다.

“티비에 나와서 유명해진 곳이에요. 여기 커피와 디저트 수준이 괜찮거든요.”

“그래요? 티비를 잘 안 봐서….”

“역시 요즘 학생 같지 않다니까. 시험공부도, 국립 도서관까지 와서 책을 빌려서 공부하는 학생이 얼마나 되겠어요? 다들 그 범위만 공부하기 바쁘지.”

“선생님도 그러셨나 봐요?”

“의사들은 봐줘요. 공부할 양이 얼마나 산더미 같다고….”

학을 떼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그를 보고 신라가 작게 웃었다.

강 현은 가장 인기 있는 브런치 메뉴와 아메리카노를 시켜 직접 가지고 왔다. 그가 말한 대로 커피의 향이 아주 진하고 부드러웠다.

“그동안 뭐 하고 지내셨어요?”

신라가 묻자, 강 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글쎄요. 사색하고, 취미를 즐기고…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잘 지내셨네요.”

“신라 씨는요?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일이 상상도 안 될 정도라고 하더니…. 별일은 없었나요?”

“별일은 늘 생기지만, 잘 이겨내고 있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봐주신 것처럼.”

“사실 좀 서운했어요.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는데, 통 연락을 안 주더라고.”

“아….”

멋쩍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강 현이 웃었다.

“미안. 원래 연락은 남자 쪽에서 먼저 하는 건데. 그죠?”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정신이 없었나 봐요. 선생님이 제 연락을 기다리실 줄 몰랐어요. 바쁘실 줄 알았거든요.”

“바빴던 건 사실인데, 가끔 멀리 있는 친구 생각할 정도의 시간은 있었어요.”

‘친구’라는 표현이 어색하면서도 정감 있게 다가왔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동안의 외모를 가진 남자는 여러모로 의외의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점잖다가도 활기차고, 의사의 면모를 보이다가도 편한 오빠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선생님이 어떤 분과 결혼하게 될지 궁금하네요.”

“정말 그런 게 궁금해요?”

“네. 주변에 멋진 여자가 있으면 소개해 주고 싶을 정도로요.”

강 현이 의미 모를 미소를 내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라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어, 반지를 빼셨네요?”

“네?”

“늘 하고 계시던 거요.”

강 현은 컵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을 잠시 내려다봤다.

“아…. 그런 걸 봤었어요?”

“네. 모양이 특이해서 눈이 갔나 봐요.”

‘예리하네.’

강 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 후 더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점심시간이 되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 현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운데. 혹시 사는 곳 근처에 괜찮은 카페 있어요? 요새 취미가 카페 찾아다니는 거라, 많이 알아두는 게 목표거든요.”

“커피 맛이 좋은 카페를 하나 알긴 하는데….”

“그럼 같이 가요. 시간을 뺏은 대신 집에 가는 시간은 벌어줄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대신 그곳 커피는 신라 씨가 사 주는 걸로. 어때요?”

“그거야 당연하죠.”

강 현은 피식 웃으며 신라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신후와 다르게 따뜻한 체온을 가진 손에 어색함을 느끼는 사이 뿌리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그대로 그의 차까지 끌려갔다.

신라가 강 현을 데리고 간 곳은 준호가 하는 카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앞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있던 준호가 눈인사를 건네 왔다.

“시력이 많이 안 좋으신가 보네요?”

강 현이 속삭이는 소리에 신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 번에 아시네요?”

“인턴 시절에 환자들을 많이 봤거든요.”

신라는 테이크아웃 잔으로 메뉴를 주문하고 강 현과 함께 구석진 자리로 갔다. 손님이 많은 주말이라 준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쓴 것이었다.

“많이 친해요? 사장님이랑.”

강 현이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준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꽤 친해요. 단골이거든요.”

“자주 오는 편?”

“요새는 많이 못 오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와요.”

“그렇구나.”

강 현은 작게 입가를 당겨 웃었다. 그의 시선이 왠지 준호 쪽에 계속 머물렀다.

두 사람의 커피가 만들어졌다. 신라는 카운터로 걸어가 준호에게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고 커피를 받아들었다.

“이분은 누구셔?”

준호가 강 현을 가리키며 물었다. 신라는 잠시 고민했다. 정신과 의사라고 소개하기에는 서로 알게 된 경위가 뻔했고, 그냥 아는 사이라고 소개하기에는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았다.

그때 강 현이 먼저 나서서 준호에게 악수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신라 씨 친구입니다.”

고민은 의외로 간단히 해결됐다. 준호는 더 묻지 않고 강 현과 손을 맞잡았다.

“네, 안녕하세요.”

강 현의 눈에 초점 없는 시선을 허공에 떨어뜨리고 있는 유약한 모습의 청년이 담겼다. 다소 오래 손을 맞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에야 두 사람의 손이 떨어졌다.

“신라 씨한테 추천받고 왔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네. 언제든지요.”

준호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를 남긴 신라가 먼저 나서고, 강 현도 그녀를 따라 카페를 나서려 했다.

“저기.”

준호의 부름에 강 현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왜 그러시죠?”

“신라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시죠?”

“……”

“그냥 궁금해서요.”

정말로 단순한 확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강 현은 업무적인 느낌의 미소를 띠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주 잠깐 신라 씨의 주치의였습니다.”

“정신과의…?”

“네. 맞습니다.”

“…붙잡아서 미안합니다. 살펴 가세요.”

신라가 더 기다리기 전에 강 현은 문을 나섰다. 바깥에는 여전히 뜨거운 햇살이 가득했다. 차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라가 강 현을 돌아봤다.

“선생님…?”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다가왔다.

“네?”

“뭐가 그렇게 웃기세요?”

그 말에 웃음을 참느라 일그러져 있던 표정을 풀면서 강 현은 결국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그의 머릿속에, 이 뜨거운 햇살로부터 연상되는 붉은 지옥의 풍경이 스쳐 가고 있었다.

“아뇨,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요.”

- 으아악…!

- 더, 더, 불길을 올려라! 신에게 대항한 죄가 어떤 것인지 고통 속에 깨닫도록 만들어라!

- 으아아아아-!!

그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너무 웃긴 얘기인데, 다음에 들려줄게요. 다음에.”

강 현은 겨우 웃음을 진정시킨 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디쓴 아메리카노가 그의 입에 매우 달게 느껴졌다.

* * *

어린 소년은 여느 때처럼 집 밖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의 퇴근 시간은 늘 정해져 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그때 파란 스포츠카 한 대가 골목에 세워졌다. 소년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그곳에 닿았다.

운전석 문을 열고 걸어 나온 이는 주변에 누가 없는지 확인하고 소년에게로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안녕. 여기에서 뭐 하니?”

그렇게 물은 이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소년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예쁜 미소 위로 하늘색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야?”

“……”

“몇 살이니?”

“……”

“내가 그 사람한테 데려다줄까?”

반응이 없던 소년의 고개가 반짝 들렸다. 네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시험이 시작되는 주라 그런지 캠퍼스 안은 비교적 한산했다. 어둑시니의 능력을 부리는 신후를 의식해서인지 밤보다는 낮에 얼쩡거리는 적의 동태 때문에 조교들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캠퍼스 내 순찰을 돌았다.

오전 순찰 담당인 우선은 커피가 든 텀블러를 손에 든 채 유유자적하게 캠퍼스 전체를 산책했다. 더운 날씨에 흐르는 땀은 본인의 능력으로 증발시켜버리면 그만이었다.

‘어?’

학교 안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낯익은 실루엣이 스쳐 갔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에 그는 바쁘게 시선을 되짚었다.

“맙소사….”

아니나 다를까, 운동장 분수대 앞에 낯익은 소년이 멀뚱히 서 있었다.

“동욱아!”

우선은 주위를 살피며 재빨리 동욱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동주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통화 중이었다.

“형 만나러 온 거야? 혼자 어떻게 여기까지 왔니?”

불안해하는 듯한 동욱을 다독이며 우선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가 돼서야 동주는 전화를 받았다.

“연구실이야? 놀라지 말고 들어. 동욱이가 학교에 와 있어.”

「뭐…?」

“어떻게 된 건지 알아?”

「거기 어디야! 바로 갈게.」

우선은 동주에게 위치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잘못한 일을 한 아이처럼 동욱의 얼굴이 시무룩해 보여서 우선은 그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시 후 동주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그는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동욱아…. 혼자 온 거야?”

동욱은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동주는 우선과 잠시 심각한 눈빛을 교환했다.

“일단 집으로 가자. 데려다줄게.”

동주는 동욱을 한 팔에 안아 들었다. 그리고 우선에게 말했다.

“…다녀올게. 아직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아줘.”

“다녀와서 얘기하자.”

우선은 정문을 통과해 나가는 동주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처럼 무엇 하나 약점이라도 잡히면 불리한 시기에 동욱의 존재는 동주에게 꽤나 큰 것이었다. 우선으로서는 잃을 것이 별로 없지만, 늘 장남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주위를 살뜰히 살피는 동주는 아니었다.

잠시 후 동주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돌아왔다. 연구실로 돌아가기 전 두 사람은 근처의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동욱이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면 뻔해. 그 녀석들 짓이야.”

동주가 이를 갈며 말했다.

“네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시험해본 거야. 아마 지켜보고 있었겠지.”

“이미 눈에 띄어버렸으니 어떡한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애써 돌려서 생각하려는 동주를 보고 우선은 깍지 낀 손을 쥐었다 풀며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주먹을 꽉 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내가 도울게.”

“…뭘?”

동주의 불안한 시선이 우선에게 닿았다.

“동욱이…. 떠나게 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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