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장. 신호
- 저놈의 심장을 헤집어라.
- 샅샅이 뒤져 찾아내라.
침대 위에서 다부진 몸이 꿈틀거렸다. 에어컨이 적절한 실내 온도를 유지시키고 있었지만, 신후는 땀에 흠뻑 젖은 얼굴로 악몽에 시달렸다. 그의 손이 왼쪽 가슴팍을 상처가 날 정도로 쥐어뜯었다.
“허억, 허억….”
- 찾을 수가 없습니다.
- 너에게는 애초에 사랑이 없었구나.
베개 맡에 있는 그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유신라’라는 이름이 어두운 방 가운데 유일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는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 같은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저 심장을 예의주시하라.
- 언제든 헤집어 놔도 좋다.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심장에 통증이 찾아들었다. 단순히 과거의 잔재라고 하기에는 그 통증이 너무도 선명했다.
- 내가 죽어 묻히게 되면…. 가끔 보러 와주세요.
- 이리 조용히 짧게 살다 가는 것이… 금방 잊혀질까 두려우니….
- 찾아줘….
- 더 늦기 전에!
“헉!”
땀에 젖은 상체가 마치 발작처럼 튕겨져 올랐다. 그는 상처투성이가 된 가슴팍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막 진동이 멎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그러고 보니 어제 누군가 현관을 두드린 것 같기도 했다. 어젯밤은 보름달이 뜬 날이었다. 되찾은 인간의 감정이 하나둘 완전하게 선명해지면서 보름날 짐승의 모습으로 고통을 받는 정도는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다만 그럴수록 뚜렷하게 느껴지는 단 한 감정의 부재는 심장을 짓이기는 통증을 만들어냈다.
“더 늦기 전에…라….”
그는 꿈속에서 들렸던 목소리를 곱씹어보며 창밖을 내다봤다. 여름철 장대비가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신라는 장우산을 펼치면서 빗속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오늘은 공강인 날이지만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었다.
그때 지하 주차장에서 검은 세단이 매끄럽게 달려 나와 신라의 옆에 멈춰 섰다. 그녀는 창문이 내려가는 운전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간밤에 통 연락이 되지 않던 남자가 출근 복장으로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고 있었다.
“타. 태워다 줄게.”
잠시 생각하던 신라는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괜찮아요. 산책할 겸 걸어갈게요.”
“기분이 상한 거야?”
“상할 게 뭐 있겠어요. 괜찮은 모습을 보니까 좀 허무할 뿐이죠.”
그녀는 짧게 목례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뗐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신후가 우산도 받치지 않은 채 걸어 나왔다. 장대비에 그새 젖어 드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란 신라가 달려가 우산을 씌웠다.
“뭐 하는 거예요? 다 젖잖아요!”
“널 붙잡는 방법이 달리 생각나질 않아서.”
“……”
“일단 타.”
신후는 대신 우산을 들고 신라를 조수석에 태운 다음 우산을 접으며 운전석에 올랐다. 신라는 별다른 말 없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어딘가 기운이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살짝 젖어버린 머리칼이 이마 위로 몇 올 떨어져 내려 더 측은해 보였다. 뭇 여성들이 봤으면 섹시하다고 난리를 쳤을 모습이지만 말이다.
“오늘 수업 없는 날 아닌가요?”
“교수 회의가 있어. 그것만 참석하고 돌아와서 쉴 거야.”
차를 움직이려던 신후는 또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심장에 눈을 찡그리며 가슴팍을 짚었다. 신라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돌아봤다.
“교수님…?”
“하아….”
“아픈 거예요?”
가까스로 통증을 억누른 신후는 차를 운전했다.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도 이마에 맺힌 식은땀까지는 가리지 못했다.
차는 교수회관의 지하 주차장에 세워졌다.
“먼저 가. 난 좀 앉아 있다가 나갈게.”
“……”
신라는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으며 말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상 걱정을 표현하는 것이 지나친 걸까, 그가 바라지 않는데 억지로 상처를 끄집어내는 일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신라, 어서.”
남자의 목소리에 초조함마저 서렸다. 신라는 결국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우산을 든 채 조수석의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
그때 차 안이 온통 암흑으로 가득 찼다. 간발의 차로 늦었던 걸까. 반대편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그녀의 고개를 돌리고, 다급한 입맞춤이 시작됐다.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애가 타는 키스에 그녀는 완전히 저항 의지를 잃었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부터 점막까지 유려하게 훑고 갔다. 그와 동시에 이를 세워 아프지 않게 혀를 깨물고 자연스레 새어 나오는 타액을 모조리 빨아들인다. 숨을 쉬면 그 숨마저 빼앗아가는 기분이었다.
빈틈이라고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다급하게 밀어붙이는 신후 때문에 신라는 호흡이 가빠졌다. 그 와중에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보였다. 그녀는 키스를 당하면서도 그의 이마에서 땀을 닦아내고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주춤한 신후가 잠시 고개를 떼고 신라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을 향한 걱정이 담겨 있는 열띤 눈동자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는 긴 한숨을 안타깝게 내뱉으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만의 체취가 가슴의 통증을 서서히 잠재워주는 것 같았다.
“…미안해.”
한껏 잠긴 목소리가 애처로웠지만, 신라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좀 괜찮아졌어요?”
“응….”
“어제의 여운인가요?”
“그런 것 같아.”
신후는 천천히 신라를 품에서 놔 주었다. 그러자마자 차 안의 암흑이 걷히고 다시 밝아졌다. 그는 손을 뻗어 신라의 입술을 꼼꼼히 닦아줬다. 입술에 약간 까진 상처가 보였지만 그것까지 없애고 싶지는 않았다.
“공부 잘하고.”
“네.”
우산을 펼친 그녀가 차에서 멀어져 갔다. 한여름이라 짧은 청바지를 입고 다리를 다 내놓고 있는 게 눈에 거슬렸다.
“하….”
이렇듯 소유욕으로만 가득 찬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워 신후는 자조적으로 웃어버렸다. 어서 빈 감정을 채워놓지 않으면 언제고 그녀를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공간에 가둬버릴지 모를 일이었다.
* * *
독서실에서 신라와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자리에 앉은 서영은 며칠 전부터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볼펜을 똑딱거리는 소리를 주기적으로 냈기 때문이다. 귀마개를 끼어도 워낙 사소한 소리라 오히려 더 귀에 잘 파고들었다.
‘계속 똑같은 패턴으로 똑같은 시간대에…. 이러다가 노이로제 걸리겠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서영은 넓은 독서실을 천천히 돌아다녀 보았다.
똑… 딱똑딱… 똑… 딱…
볼펜 소리는 계속해서 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볼펜을 쥐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간혹 볼펜을 쥐고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손장난을 하는 이는 없었다.
“이상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신라가 입 모양으로 ‘왜 그래’하고 묻자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말았다.
서영은 집중이 되지 않는 멍한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똑딱이는 소리대로 낙서를 했다. 긴 선, 짧은 선…. 그러다 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평소 밀리터리 영화를 즐겨보던 그녀는 호기심 때문에 모스 부호를 독학한 적이 있었다.
‘설마!’
서영은 받아 적은 기호를 암호라고 가정하고 해독해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심심풀이로 시작한 것이었다.
‘어…?’
7시… 독서실 4층…
놀랍게도 똑딱이던 소리가 모스 부호를 통해 언어화되고 있었다. 다 해독한 글을 한 번에 읽어 내린 서영은 천천히 입가를 가렸다.
[7시 독서실 4층으로 와줘 기다릴게]
서영은 잔뜩 움츠린 상태로 독서실 4층에 발을 들여놨다. 공부하는 자리가 마땅히 없는 4층은 강의 시간이 끝나면 보통 불이 꺼졌다. 지금 시각은 6시 55분. 겁이 많은 주제에 왜 찾아왔는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불은 우리가 못 켜?”
뒤따라 들어온 신라가 물었다. 이럴 때 신라의 존재가 이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신라는 흔쾌히 따라와 주기로 했다. 마침 집중력이 흐트러질 시간대이기도 했고 말이다.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핸드폰 조명으로 밝혀보자.”
바깥에서 캠퍼스 조명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와 어렴풋이 책장으로 가득한 4층 풍경이 보였다. 그녀들은 천천히 책장 사이사이를 돌아봤다. 아직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몇 시야?”
신라의 물음에 서영이 핸드폰 시간을 확인했다.
“59분…. 막 7시 됐어.”
그때였다. 그녀들이 열고 들어온 4층 독서실의 문이 갑작스럽게 닫혔다. 서영은 비명이 나올 뻔한 입을 틀어막았고, 신라가 핸드폰으로 그쪽을 비추었다. 그러나 문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깥에서 닫았나 봐. 어떡해!”
서영의 울먹거리는 소리에 신라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이 공간 안에 두 사람 말고 또 다른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순순히 모습을 드러내. 당신이 부른 대로 이곳에 왔잖아.”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신라를 보고 서영은 재빨리 그녀에게 팔짱을 끼고 착 달라붙었다.
똑딱… 똑… 딱똑… 딱…
“또 암호 같아.”
서영은 불안한 와중에도 핸드폰을 켜서 그 암호를 적어 내렸다. 그리고 찬찬히 해독했다.
“한 명만… 오라고 했는데…. 두 명이라서… 실망했다….”
똑…딱… 똑딱… 똑… 딱…
“난… 학생이었고… 징집되었다…. 적을 많이 죽여서… 훈장을 받으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볼펜을 딸깍이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라는 더욱 주위를 경계했다.
“100명을 채우기 전… 한 명을 남기고… 죽어버렸다….”
핸드폰을 쥔 서영의 손이 덜덜덜 떨려왔다.
“네가… 마지막…이야.”
화악- 어둠 속에서 피로 물든 두 손이 서영의 목을 노리고 뻗어져 나왔다.
“서영아, 물러서!”
신라는 재빨리 서영을 뒤로 물러나게 만들고 그 손을 쳐냈다. 수차례의 전쟁을 거친 군인의 원혼인 만큼 끈질겼다. 그는 계속해서 서영만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요괴의 능력을 빌린 신라가 눈을 빨갛게 빛내며 군인의 몸을 강하게 밀쳐냈다. 그러자 멀찍이 날아간 원혼이 희미해지다가 사라졌다.
“하아, 하아….”
귀력이 소진된 신라가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서영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신라를 올려다봤다.
“신…라?”
“사라졌어…. 괜찮아?”
“사라…진 거야?”
“응. 어서 여기에서 나가자.”
신라는 서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기운이 빠진 모습으로 신라에게 이끌려가던 서영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진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에 아주 희미하게, 군복을 입은 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신라!”
신라가 뒤늦게 돌아봤을 때였다. 서영에게 달려들려던 군인의 원혼이 갑자기 어디론가 밀쳐졌다. 그를 몰아낸 것은 또 다른 영혼 같았다. 병원 환자복을 입은 그 영혼을 보고 신라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어…?”
그때 독서실 안이 갑자기 밝아졌다. 조명을 켜고 들어선 것은 그녀들에게 반가운 얼굴이었다.
“너희 여기에서 뭐 해?”
동주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대로 울음을 터뜨린 서영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얼결에 그녀를 다독여준 동주는 입 모양으로 신라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곳에 군인의 원혼이 있어요.”
“학교에?” “네. 서영이를 노리고 이곳으로 불러내더라고요.”
그렇다는 건 서영도 어느 정도 영력을 갖고 있다는 소리였다. 동주는 훌쩍이며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서영을 한 번 내려다봤다.
“너희들은 먼저 나가 있어. 내가 마무리 짓고 나갈 테니까.”
“조심하세요.”
“걱정 마.”
동주가 나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바깥에 있는 간이식 테이블에 잠시 앉아 있었다. 신라는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서영을 다독여주었다.
“이제 좀 괜찮아?”
“응…. 너 평소에도 이런 무서운 일을 겪는 거야?”
“자주는 아니지만….”
“조교님은 괜찮을까?”
“응. 괜찮을 거야.”
눈물을 닦아낸 서영은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공부 시간 뺏어서 미안해.”
“무슨 소리야….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지.”
“그런데 아까, 그 귀신 말고 다른 영혼도 있었던 것 같지 않아?”
“그것까지 봤구나.”
“정말이네…. 날 구해준 것 같았어. 착한 영혼이겠지?”
“……”
신라는 잠깐 목격했던 하늘색 머리칼의 영혼을 떠올렸다. 워낙 찰나라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아이돌 네오의 모습과 비슷했던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