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추적
“감사를 표합니다.”
회중시계를 곳곳에 매단 희한한 정장 차림을 한 사내가 신후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사내는 교수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신후에게 다가가 자그마한 복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용이 승천하며 떨어뜨리는 은비늘입니다. 어떤 주술을 담든 힘이 배가 되는 물건입니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신후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 손으로 복주머니를 밀어냈다. 지하 사자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꿈틀했다.
“필요 없으신 겁니까?”
“귀한 물건이지만 쓸 데가 없으니까.”
“…뭔가 다른 걸 바라시는 거군요.”
지하 사자는 빼앗겼던 연쇄살인 피해 영혼들을 되찾아준 데에 대한 답례를 하러 온 것이었다. 그것은 지하 세계에서 생각보다 큰 건수였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군.’
신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지하 사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단 한 번.”
신후가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먼저 받아봤으면 하는데.”
“무엇을…?”
신후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가를 당기고 있을 뿐이었다. 곧 의미를 깨달은 지하 사자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것은 안 될 일이오!”
“징계를 받지 않은 걸 봐서 아직 상부에서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는 모양인데.”
“그건…”
“약점을 쥐려는 게 아니고, 서로 위기에서 도와주자는 얘기야. 신의 개가 되어 일하는 것은 피차일반인데, 상부상조해서 나쁠 건 없지 않나?”
“……”
입술을 꽉 깨물고 신후를 노려보던 지하 사자는 복주머니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고 몇 걸음 물러났다.
“바라시는 소식이 따로 있소?”
“나와 가까이 연결된 인물들. 그중 아무라도 좋아.”
“…알려주기만 할 뿐이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상사에 대해서는 날 붙잡고 늘어지지 마시오.”
신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하 사자는 목례를 남기고 검은 안개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자마자 교수실의 문이 두드려졌다. 질문을 하러 온 사학과 학생들 같았다.
“들어오세요.”
시험 때가 다가오자 캠퍼스에는 다시 공부 분위기가 조성됐다. 신라는 연구실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강의가 끝나면 서영과 함께 독서실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학기 초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시험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생기는 사학과 학생들이 학부 연구생인 그녀에게 질문을 하러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 분식점에서 간단히 점심 끼니를 때우고 온 신라와 서영은 도서실 건물 밖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신라야. 전부터 생각만 했던 건데 말이야.”
“응?”
“고고학 연구실 조교님들도 혹시 너처럼 신기가 있어?”
“…어?”
조금 당황한 신라의 반응을 보고 서영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왠지 그럴 줄 알았어. 중간고사 때 동주 조교님이 너한테 다녀간 이후로 네가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한 것도 그랬고, 왠지 분위기들이 범상치 않아 보이기도 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네가 많이 안정된 느낌이 들거든. 그 연구실에 들어간 후로.”
“…그래?”
신라는 말없이 음료수의 뚜껑을 따 마셨다.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무리 없이 믿어준 서영이었다. 이제 와서 주변의 일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럼 교수님도?”
“응….”
“위험한 일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그 사람들, 너무 자주 다치잖아.”
“괜찮아. 교수님도 조교님도 늘 날 먼저 걱정해주니까.”
그때 이상한 것을 감지한 신라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며칠 전 건우가 모두에게 나눠줬던 소환견의 기운이 깃든 자수정이었다. 그 자수정이 붉게 빛을 내고 있었다.
“설마….”
“이게 뭐야? 왜 그래?”
“서영아, 너 먼저 독서실 들어가. 알겠지?”
신라는 마시던 음료수를 서영에게 맡기고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갔다. 신라를 뒤쫓아 가려다 멈춘 서영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독서실로 먼저 들어갔다.
신라는 연구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메신저 창에 범인을 발견한 것 같다는 메시지를 남기고는 자수정과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분명히 캠퍼스 안에서 느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누구를 노리고 들어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급해졌다.
‘근처에 있어.’
쫓아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범인은 캠퍼스 밖으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정문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 건물을 통과한 신라는 멀찍이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갈색 머리의 사내를 발견했다.
“이봐요!”
신라의 부름에 사내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반만 돌아서서 그녀의 존재를 확인했다. 피식, 작게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거기 멈춰!”
사내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신라의 핸드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그것을 받을 새 없이 갈색 머리 사내를 향해 달려가려 했다. 그때 건물 출구 쪽에 갑자기 군중이 나타나 길을 차단했다. 여학생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며 구름처럼 몰려든 것이다.
“저기, 잠깐만 지나갈게요!”
그녀가 비집고 통과하려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군중의 한가운데에 있던 이가 여학생들을 가르고 나오더니 신라의 앞에 우뚝 섰다.
“어라? 또 만났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
화려한 차림의 소년. 그는 다름 아닌 아이돌 스타 네오였다.
“너….”
“여러분! 이 누나가 제가 잘 아는 사학과 누나예요.”
네오의 말에 여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신라에게로 쏠렸다. 그새 더 많은 학생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들고 있었다. 그 관심의 가운데에 자리 잡게 된 신라는 곤란한 얼굴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한 발자국도 나갈 공간이 없었다.
“네오랑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둘이 많이 친해요?”
“사학과 몇 학번이에요?”
질문 세례가 쏟아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그때 신라가 들어왔던 방향으로부터 천천히 길이 생겨났다. 학생들이 하나둘 물러나며 자연스럽게 길을 텄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키가 큰 남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걸어왔다. 그를 발견한 네오의 눈에 왠지 긴장이 서렸다.
“왜 다들 몰려있지?”
신후가 등장하자 여학생들의 흥분도가 배가 됐다. 학교 안에서는 네오 못지않은 유명인사가 등장했으니 말이다.
“교수님~! 아이돌 네오 모르세요?”
“어서 사진 찍으세요!”
연예인과 함께 서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신후를 보고 학생들은 다시 한번 그의 진가를 느낄 수 있었다.
신후는 학생들의 관심이 집중돼 있는 허여멀건 소년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네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교수님.”
신라가 나지막이 불러서야 시선을 뗀 신후는 학생들에게 길을 터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신라의 손을 붙잡고 그사이를 헤쳐나갔다.
“멋있어….”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다들 동의했다. 순간 관심을 뺏겨버린 네오는 뾰로통한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째려보고 있었다.
신라를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온 신후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자수정의 기운을 가만히 느껴봤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멀리 도망쳤어.”
“저쪽에 너무 오래 붙잡혀 있었어요.”
“모습을 본 건가?”
“뒷모습만요.”
“다음부터는 혼자 쫓아가지 마. 또 어떤 함정을 파놨을지 모르니까.”
“네.”
“전화 받고.”
“…알겠어요.”
신라는 아직 꼭 붙잡혀 있는 손을 내려다봤다.
“이제 놔주셔도 될 것 같아요.”
“또 인파에 안 휩쓸릴 자신 있어?”
“놀리지 마시고요.”
신후는 쿡쿡 웃으며 신라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저 꼬맹이는 뭐지?”
막 건물을 빠져나오는 네오를 보며 신후가 말했다.
“며칠 전부터 학교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어요. 고고학 연구실에 관심이 있다면서.”
“우리 연구실에?”
“수상하죠?”
눈이 마주치자마자 딴청을 피우며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리는 네오를 보고 신후는 코웃음을 쳤다.
“적이라고 의심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군.”
“그렇긴 하지만….”
“차라리 주위를 돌리기 위해 적이 심어놓은 눈속임이라고 보는 게 낫겠어. 일단은 요기가 전혀 없으니까 지켜보자고.”
“네.”
한편 캠퍼스를 빠져나온 네오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세워뒀던 자가용에 오르려 했다. 그때 차도에서 캠퍼스로 진입하는 배달 오토바이가 차에 가린 네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를 향해 돌진했다.
“어…!”
아차 싶어 몸이 굳은 찰나, 강한 힘이 팔을 잡아당겨 오토바이를 피하게 해주었다. 자신을 구해준 이를 쳐다본 네오는 그만 눈이 왕방울만 해지고 말았다.
“와, 눈알 굴러떨어지겠다.”
동주가 캠퍼스에서 파는 커피를 빨대로 마시며 태연스럽게 서 있었다. 다른 손으로는 네오의 팔뚝을 붙든 채였다.
“또 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조심해야지.”
“아… 아…. 네…. 고맙… 감사….”
“우리 학교에는 또 웬일일까?”
네오는 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신라가 그를 의심했던 것이 생각난 동주는 잠시 그에게서 요기를 느껴 보았다. 하지만 신후가 판단한 것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오래 식물인간인 상태로 있다가 깨어나면 간혹 유체 이탈을 했던 경험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
동주는 작게 미소 짓고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그런 그의 옷소매를 소심하게 내밀어진 손이 붙잡았다.
“뭐야?”
“어, 어디 가?”
네오의 물음에 동주는 어색하게 답했다.
“집… 들르러 가는데.”
“타…도 좋아. 태워다 줄게.”
“응?”
“태워다 준다고! 내가 가는 방향이면.”
“……”
왠지 어느 주소를 말하든 가려던 방향이라고 말할 것 같았다. 동주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네오가 타려던 차로 걸어갔다.
“그래, 연예인 차 한 번 얻어 타 보지, 뭐.”
금세 표정이 밝아진 네오는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주소로 차가 출발했다. 마치 면허를 처음 딴 사람처럼 운전이 서툴게 보였지만 동주는 별생각 없이 차창 밖을 내다봤다.
“며, 몇 살이야?”
운전에 집중하던 네오가 물었다.
“스물일곱.”
“스물일곱…. 어리네.”
더 어린 것이 분명한 소년의 말에 동주가 어이없이 웃었다.
“너는? 프로필 나이가 진짜인가?”
“나는… 어….”
당황한 표정을 하는 네오를 보고 동주가 대신 말했다.
“아아, 오래 누워 있다 깨어나서 나이가 헷갈리는구나?”
“으, 응.”
집에 다다를 때 즈음, 생각에 잠겨있던 동주가 물었다.
“혹시 의식을 잃고 병상에 있었을 때, 영혼이 빠져나오는 기이한 경험을 했니?”
“어?”
좁은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차가 잠시 멈추었다.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네오에게, 동주가 애써 평범한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네 몸은 병상에 누워 있지만, 영혼은 여행을 하듯이 이곳저곳 돌아다닐 수 있었을 거야. 그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지 않고 다시 몸으로 찾아간 건 정말 대견스러운 일이고.”
“……”
“그 사이에 우리 연구실 중 누군가, 혹은 내가 악귀로부터 널 지켜줬을 수도 있어. 그 기억이 희미하게라도 남아 있어서 네가 계속 우리 학교에 찾아오는 건지도 몰라. 안 그래?”
네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숙연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동주는 작게 미소 지으며 그런 네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감사의 인사는 이걸로 됐어. 현실과 동떨어졌던 기억은 이만 잊고, 힘들게 얻은 새 삶을 살아가도록 해. 아직 살날이 많잖아. 나도 멀리서 응원하고 있을 테니까.”
“……”
“그럼 잘 가.”
동주는 차에서 내려 골목길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그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네오는 동주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어보았다.
“힘들게 얻은 새 삶…. 멀리서 응원해준다고….”
하얀 뺨이 또 한 번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기분 좋게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던 네오는 차창 밖으로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배짝 마른 어린아이였다. 동주가 사는 집 근처에서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는 네오의 눈에 점차 이채가 생겨났다.
“오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