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단서
오전 8시 반, 평소처럼 남들보다 일찍 연구실에 출근한 동주는 문이 잠겨 있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들어섰다. 그런데 오늘 보이지 말아야 할 얼굴이 보여 미간을 좁히며 멈춰 섰다. 우선이 자리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는 것이다. 동주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태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출근, 안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우선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죄를 지어서 잡혀갔던 것도 아니고. 별일 아니었잖아.”
“시체 더미를 발견하고 두 시간을 넘게 취조실에 갇혀 있었던 게 별일이 아니냐? 그것도 장 형사랑 같이? 무리하지 말고 어서 집에 들어가.”
“싫어. 연구실이 편해. 집에 있으면 할 것도 없단 말이야.”
“…으휴, 미련하긴.”
말은 그렇게 해도 옆자리에 앉으며 우선의 머리칼을 슥슥 헝클어뜨리는 동주였다. 그다운 위로 방법에 우선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학생들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어 다니는 캠퍼스에서, 거친 갈색 머리칼을 가진 사내가 벤치에 앉아 인상을 푹 쓴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자판기에서 뽑아 마신 빈 콜라 캔을 구겨 멀찍이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튕겨 나오자 욕지거리를 했다.
“수고를 들인 거에 비해 결과가 퍽 재미없군. 강철이 아니라 그 계집애가 걸렸어야 하는 건데….”
그는 비형랑이 직접 고고학 연구실을 휩쓸고 간 밤, 캠퍼스 안에서 신라와 우연히 부딪혔던 그 사내였다. 심드렁하게 핸드폰을 뒤적거리던 그는 갑자기 근처에서 소란스러워지는 소리가 들려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야?”
걸어 다니기만 해도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화사한 외모의 인간이 정문을 통해 캠퍼스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났다고 뉴스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아이돌, 네오였다. 아무리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푹 눌러써도 사람들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정체를 숨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나무 기둥을 지날 때마다 그 뒤로 몸을 숨기는 모습을 보고, 지켜보던 사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자식은 적응하라고 했더니 왜 여기에서 저러고 있는 거야…?”
한편, 네오는 지도를 보고 냄새를 맡으며(?) 겨우겨우 사학관 건물에 도착했다. 강의 시간이라 학생들이 몇 없었기에 망정이지, 쉬는 시간이었으면 아마도 그를 둘러싸고 인산인해를 이뤘을 것이었다.
“그래도 여기에 오니까 숨통이 좀 트이네.”
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하고 소속사에서 발성 연습을 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다였다. 숨이 막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생활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만 십여 분 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유리문 너머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네오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맨눈으로 그가 누군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숨을 곳을 찾았다.
“또 왔네.”
“으악!”
그때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네오의 몸이 속절없이 튕겨 올랐다. 무미건조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고고학 연구실의 학부 연구생, 신라였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거지?”
“이,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인터넷 프로필상으로는 한참 동생이던데? 아니야?”
“…일단 다른 데로 옮기자.”
“동주 선배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왜 다른 데로 옮기려고 해?”
“어, 어떻게 알았어?”
“생각보다 친절한 분이야. 그렇게 두려워할 거 없어. 어떻게 할래?”
신라가 유리문에 거의 가까이 다가온 동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오는 입술을 깨물고 초조하게 서성거리다가 결국 휙 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그때 동주가 유리문을 밀고 나왔다.
“신라, 여기서 뭐 해?”
우뚝- 네오의 발이 멈추고 말았다.
“저 수상한 복장의 사나이는 누구?”
신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네오의 손목을 붙잡고 끌고 왔다.
“선배도 아는 친구예요. 왜, 저번에 학교에 왔었다던.”
“…어? 설-마 TV에 나오는 그 친구?”
“초면… 맞죠?”
“당연히 초면이지~”
시원스레 웃으며 걸어간 동주가 네오에게 악수를 건넸다.
“반가워요. 예전에 방송에서 많이 봤어요. 퇴원한 것도 축하하고.”
“……”
풀 눌러쓴 모자 아래로 붉어진 뺨을 감춘 네오는 소심하게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초면인가 보네.’
동주의 얼굴을 보고 신라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네오만 전부터 동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난 이만 가볼게!”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은 네오는 그대로 줄행랑을 치듯이 달려가 버렸다. 아직까지 그를 지켜보던 여학생들이 꺄악 비명 소리를 내며 그를 쫓아갔다.
“이야, 신라. 의외의 인맥인데?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동주의 물음에 신라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친구예요. 저번부터 우리 연구실에 관심이 있어 보여서요.”
“우리 연구실? 웬일이래?”
“저도 그게 궁금해서 억지로 선배를 만나게 한 거였어요.”
“응, 난 몰라. 만난 기억이 전혀 없어. 저렇게 생겼으면 기억을 했겠지. 전생에 다른 모습으로 만났다면 모를까.”
그렇게 말하며 동주는 자판기로 걸어가 또 생수를 세 병 정도 샀다. 신라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
“선배들은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게 이해가 되지만, 그 기억을 갖고 태어날 수 있는 다른 경우도 있나요?”
“우리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기억이 남겨진 거지만, 원래 환생할 때는 기억을 모두 지우게 되어 있어. 그냥 해본 소리야.”
“저쪽도 요괴였을 확률은요?”
“글쎄. 요괴였다 하더라도 귀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걸?”
“그건 그렇지만….”
동주는 피식 웃으며 신라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경계를 늦추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골머리 썩히지는 마.”
“네….”
그때 아직 출근하지 않았던 건우와 혜령이 함께 나타났다. 보기 드문 조합에 신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들은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조사를 나갔다가 다녀오는 길이었다.
“단서를 찾아냈어.”
건우는 그렇게 말하며 모두 연구실로 모이도록 했다. 신후가 교양 강의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도착하고서야 본론이 시작됐다.
건우는 이야기하기에 앞서 무언가를 소환해냈다. 그것은 활기차 보이는 진돗개였다. 귀력으로 소환해낸 것이라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신라에게 귀를 쫑긋하며 다가간 진돗개는 왈왈 짖으며 그녀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러다 언짢아 보이는 신후와 눈이 마주쳐 바로 꼬리를 내리며 물러났지만 말이다.
“냄새로 추적한 건가?”
신후의 물음에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혜령이 인맥으로 사건 현장을 좀 둘러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 소환견한테 단서가 될 만한 게 없는지 찾아보라고 시켰는데, 머리카락 하나를 주워왔어요.”
“머리카락?”
“예로부터 머리카락을 뽑아 귀력을 발휘하는 요괴들이 몇 있었다고 하죠. 여기에서 귀력의 냄새를 맡았나 봐요.”
건우가 내밀어 보인 투명 지퍼백 속에, 그다지 결이 좋아 보이지 않는 갈색 머리칼이 있었다. 함께 지켜보던 신라가 말했다.
“우선 선배 머리칼보다 조금 더 진한 색이네요. 이렇게 비교해 두면 나중에 진짜 찾아냈을 때 바로 확인할 수 있겠죠?”
“더 정확한 방법이 있지.”
신후는 그 지퍼백에서 머리칼을 꺼내 신라의 손바닥에 올려놨다.
“워낙 미약하게 남아 있는 귀력이지만, 네가 조금만 더 힘을 보태면 뚜렷해질 거야.”
신후의 말대로 신라는 머리카락을 쥔 채로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러자 정말 낯선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기운에 집중하자, 엎드려 있던 진돗개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그새 활기차져서 왈왈 짖기 시작했다. 신라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가져가 진돗개에게 냄새를 맡게 했다.
건우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진돗개를 주머니에서 꺼낸 자수정에 가두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쪼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범인이 근처에 있으면 자수정이 반응하게 될 거야. 그럼 서로에게 알려주기로 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쇄살인마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뉴스에 나왔다. 연구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접하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들이 붙잡으려 하는 자는 연구실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던 숨겨진 또 다른 범인이었으니까.
우선은 귀가하기 전 들를 곳이 있어 동주를 먼저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홀로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내린 곳은 도보를 만들어 두어 걷기 좋은 어느 산자락이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자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절이 있었다. 이곳은 그가 어렸을 때 양친을 여의고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란 곳이었다.
“계십니까?”
그의 부름에 불전 안에서 불경을 외우고 있던 소리가 멎었다. 나무로 된 문이 열리고 중년의 승려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는 아주 반가운 얼굴을 하면서 맨발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내가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오래간만이구나!”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그럼, 그럼!”
승려의 이름은 진해(眞海). 우선의 먼 친척 중 하나로, 작은 절을 운영하며 살고 있으며 타고난 영력이 일반인보다 강한 편이었다.
20여 년 전, 우선의 양친 장례식에 찾아왔던 그는 상복을 입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린 우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린아이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요기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은 본인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챈 먼 친척에게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무작정 달려가 안긴 채 펑펑 울었다. 그런 우선에게 안쓰러움을 느낀 진해 대사는 그 자리에서 우선을 데려가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바람이 통하는 시원한 방에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안색이 좋지 않구나.”
“일은요, 무슨.”
“하는 일이 워낙 위험한 것이니 늘 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예불을 드린단다.”
우선은 요즘 불가 신들의 신경이 온통 어디로 쏠려 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았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기도 했고 말이다.
자조적으로 웃고 있는 우선을 보고 진해 대사는 표정을 어둡게 했다.
“여전하구나. 스스로를 모질게 대하는 것은.”
“……”
“아직도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냐?”
우선은 말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진해 대사는 마음으로 낳은 자식을 품에 안고 따뜻하게 다독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가 전생에 어떤 대단한 존재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죄의 생을 살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치죠.”
“마음으로 짓는 업이 더 크다고 했다. 세상에 나가면 더한 죄를 저지르고도 스스로를 용서하는 자들이 모래알같이 많다. 너는 이미 오랜 시간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지냈어. 더 하는 것은 삶을 제대로 건강하게 살지 못 하게 하는 불필요한 족쇄일 뿐이다.”
‘저는 아직 그 족쇄가 필요한가 봅니다.’
우선은 속으로만 말하며 찻잔을 마저 비웠다.
마중 나온다고 하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고 우선은 절을 나왔다. 날이 많이 저물어 있었다.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햇빛의 잔재에 의지해서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는데, 나무 기둥에 기댄 채 코를 골고 있는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숨을 쉬며 장 형사를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 멈춰 섰다.
- 네 부모, 네가 죽인 거 맞지?
- 솔직히 털어놔. 그런 거 끌어안고 살아가기 벅차지 않겠어?
죽음을 많이 보는 직업 특성상, 그를 에워싸고 있는 원혼들이 많았다. 앞만 보며 돌진하는 성격 탓에 주위에 원한도 많이 샀을 것이다.
우선은 기척을 숨긴 채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손을 휘휘 저어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원혼들을 쫓아 주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장 형사는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선잠에서 깨어났다. 진범도 잡힌 마당에 왜 우선의 학교에 찾아갔는지 본인도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집으로 향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택시를 타는 우선을 보고 무작정 따라왔다.
이 절이 우선이 학창 시절을 보낸 곳인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귀신이 있느니, 자신에게 이상한 능력이 있느니, 찾아갈 때마다 허무맹랑한 소리만 늘어놓던 꼬마에게 시커먼 속내가 있을 것이라고 늘 생각했었다.
그는 멀찍이서 택시를 잡아타는 우선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짜인가.”
만성 근육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 몸을 두어 번 주물러본 그는 싱거운 표정으로 하품을 쩍 내뱉고는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