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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장. 함정_上 (29/126)

28장. 함정_上

햇살이 잘 드는 아기자기한 느낌의 룸 카페에서, 혜령은 언제나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담소를 나눴다.

“네가 명품만 차고 다니는 나한테 혀를 쯧쯧 차면서 채워줬던 거잖아. 기억나?”

그녀는 손목에 찬 수공예 팔찌를 들어 보였다.

“그때 엄청 감동했잖아. 그때부터 액세서리 고르는 기준이 확 바뀌었다니까?”

여인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혜령이 옅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보다. 그럼 다른 얘기 해볼까? 무슨 일이 있었더라….”

혜령은 왠지 과거의 얘기만을 의식적으로 꺼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문밖에서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미안,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혜령은 룸에서 나와 문을 닫고서야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사람의 것이 아닌 기척을 쫓아 맞은편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얘기가 끝났던 걸로 아는데. 왜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거지?”

“이 근처에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사내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그의 양복에는 각각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회중시계들이 매달려 저마다의 초침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중 한 시계의 초침이 12시를 가리키며 알람을 울렸다.

“가봐야겠군요.”

사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혜령이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자칫 저 애한테 모습을 보였다간 내 계획이 모두 틀어질 수 있어. 그렇게 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물론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쪽 수장과 거래가 되어 있으니까요. 단순한 감시…정도라고 생각해 두십시오. 당신들도 저 ‘영혼’을 빼돌릴지 어떻게 압니까?”

“이봐…!”

“그럼 이만.”

사내는 짧게 목례하고 룸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검은 실루엣이 희미해지다가 사라졌다. 꽉 쥐어진 혜령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직… 아직은 안 돼….”

그녀의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 여인이 있는 룸 쪽으로 향했다.

* * *

탁… 탁… 백색의 맹인 지팡이가 사학과 건물 복도를 두드렸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흔치 않은 광경에 한 번쯤 눈길을 주고 지나갔다. 간간이 그가 누군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오기도 했다.

준호는 목적지에 다다라 지팡이를 접고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이 안쪽으로 열리고 사무실의 주인이 걸어 나왔다.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군.”

신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준호는 교수실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먼저 몸을 앉혔다. 신후는 묻지도 않고 따뜻한 차를 우려내 그의 앞에 놓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준호의 물음에, 신후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과는 마주친 건가?”

“얼마 전 이 연구실을 휩쓸고 갔지. 입이 싼 심부름꾼을 포획했지만, 현재 모습의 정체까지 캐내기 전 타이밍 좋게 나타나 그 혼을 박살 내고 가더군.”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세력을 키웠을 거란 소리군.”

“그렇다고 보고 있어.”

“신라와의 접촉은?”

“……”

말없이 고요한 눈빛만을 보내는 신후를 보고 준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감정은 뭐지?”

“이런. 감히 신에게 품어서는 안 될 불순한 감정을 들키고 말았군.”

“분노라…. 신라를 놈에게 노출시킨 게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텐데.”

준호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차를 몇 모금 마셨다.

“재미있네.”

준호의 말에 이번에는 신후의 표정이 굳었다.

“뭐가 재미있지?”

“네가 점점 인간과 같이 변해가는 모습이.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너에게는 애초에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애(愛)’의 감정이 없었다고 하더군. 사실인가?”

“……”

“그렇다면 죄의 동기가 불분명해진다. 다문천왕은 무엇을 근거로 너에게 벌을 내린 거지?”

“무엇이 동기였든 당신들 기준에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니까.”

“……”

준호는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놨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신후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확인해 봐도 되겠지?”

아주 오래전, 다문천왕도 죄의 근거를 찾기 위해 이 심장을 모질게 헤집어놨었다. 신후는 그를 빤히 올려다볼 뿐 저항의 뜻은 내비치지 않았다.

준호의 손이 신후의 왼쪽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때 연구실 쪽에서 바쁜 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벌컥, 문이 열리고 신라가 교수실로 들어섰다.

“준호 오빠….”

준호의 손이 거둬졌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신라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 신라야.”

“누군가 지팡이를 짚고 교수실로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혹시나 해서 와봤어요.”

“그래?”

“여기는 어쩐 일이에요?”

“용건이 있어서 왔다가, 막 일어나보려던 참이었어.”

“벌써요?”

“응. 답은 벌써 들었으니까.”

그는 지팡이를 펼쳐 복도로 통하는 문으로 향했다. 신라가 그를 따라가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

“별일 없는 거죠?”

“응, 물론이지. 너도 늘 조심하고.”

무엇을 조심하라는 말인지 몰랐지만, 신라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준호가 복도 끝 편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교수실로 다시 들어왔다. 그런데 소파에 앉아 있는 신후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교수님…?”

거칠어진 호흡을 내뱉는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신라가 놀라서 다가가 앉아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손이 왼쪽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다.

“왜 그래요? 아픈 거예요?”

“…아니…. 흔적일 뿐이야.”

“거짓말이죠? 이렇게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그의 심장은 예전의 처참했던 고통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견디듯이 호흡하던 그가 갑자기 허탈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신라의 눈에 더욱 걱정이 어렸다.

“큭큭… 이렇게 단합이 안 돼서야….”

“네?”

“정말 재미있는 건 이건데 말이야.”

신후는 가까스로 눈을 떠 고통의 여운이 남은 눈빛으로 신라를 바라봤다.

“그렇지…?”

그는 대답이 없는 신라의 어깨에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거칠던 호흡이 점차 제 속도를 찾아갔다.

“뺏기지 않을 거야. 내가 가지지 못하더라도….”

“……”

“너도… 그 자리에 있어….”

신라는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는 식은땀 가득한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공감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뺨을 쓰다듬자 신후의 목 깊은 곳에서 기분 좋은 울림이 일었다.

다음 날 오전, 신후를 비롯한 연구실의 인원이 모두 교수실로 모였다. 며칠 전 신후에게 걸려온 의뢰 전화 때문이었다.

“간추리자면, 이 근방에 있는 한 모직 공장에서 전기 전원을 모두 차단한 야밤에 자꾸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는 내용이야. 최근에 연달아 발생하는 여성 실종사건 중 한 명도 그곳의 직원이었다고 하더군.”

우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귀신의 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군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혜령이 입을 열었다.

“맞는 추측일지도 몰라요. 최근에 만난 이 구역 지하 사자가 평소와 달리 꽤 바빠 보였거든요. 옷이 온통 회중시계들투성이였어.”

“일단 방문해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동주의 말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후가 우선에게 사원증같이 생긴 것을 건넸다.

“의뢰자가 보내온 방문증이야. 견학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도록 해.”

“알겠습니다.”

건우와 혜령은 신후와 따로 조사할 것이 있어서 남기로 하고, 우선과 동주, 신라 세 명이 모직 공장으로 외근을 나갔다.

방문증을 보여주자 공장 직원들은 별 의심 없이 그들을 공장 내부로 들여보냈다. 삼교대 근무 시스템을 갖춘 공장은 불이 꺼지는 일이 드물다고 했다. 그런데 가끔 일이 일찍 마무리되어 모든 전원이 차단되는 날이면 꼭 그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기계가 돌아가는 공장, 품질관리실, 식당 등을 둘러본 세 사람은 마지막으로 여자 휴게실로 향했다. 근무 시간이라 휴게실은 텅 비어 있었다.

“느낌이 쎄~하긴 한대, 흩어져서 찾아볼까?”

동주가 제안했을 때였다. 휴게실의 문틈 사이로 시선을 느낀 신라가 그쪽을 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기…!”

우선과 동주가 뒤따라 돌아봤을 때는 이미 기척이 사라진 뒤였다.

“쫓아가자.”

세 사람은 일단 휴게실을 달려 나갔다. 그런데 사라진 줄 알았던 영혼이 복도 저편에 서 있었다. 공장 유니폼을 입고 있는 여인은 힘없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손짓했다. 마치 따라오라는 행동 같았다.

“이상한데…. 백 같지는 않은데, 미련이 남은 원혼 같지도 않아.”

우선이 말했다. 동주도 동의하듯 섣불리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은 그들이 따라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조를 나누도록 할까?”

우선의 제안에 신라가 한 걸음 나섰다.

“위험하지 않다면 제가 다녀올게요. 그편이 덜 수상하지 않을까요?”

동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종사건이잖아.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동주 말이 맞아. 일단 내가 따라가 보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면 전화를 할게. 너희는 여기에서 기다려.”

동주의 제안으로 우선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채로 영혼을 따라가기로 했다.

“지하로 내려가고 있어.”

「지도상으로는 그냥 기계 정비실 비슷한 곳이야.」

영혼이 벽을 뚫고 들어가자, 우선도 문을 찾아 열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동주의 말대로 갖가지 파이프들과 기계들이 가득한 지하 공간은 어두침침하고 행동반경도 좁았다.

「뭔가 보여?」

“아니, 아직. 그런데 더이상 가지 않고 멈춰 있네. 보여주고 싶은 게 이 근처에 있나 봐.”

구석에 다다른 영혼은 손짓을 멈추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그녀의 동태를 살피며 천천히 다가가던 우선은 잠시 멈춰 섰다. 기계들 뒤에 숨어 있던 다른 영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원혼은 아니지만 백도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

「뭐가?」

“다른 영혼들도 이곳에 모여 있어.”

「뭐?」

“설마….”

우선은 자신을 인도한 영혼이 서 있는 곳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우선이 다가오자 영혼은 스르륵 자리를 비켜주었다. 바닥에 녹이 슨 큰 뚜껑이 있었다. 모종의 저장 공간 같았다.

우선은 긴장 속에 침을 한 번 삼키고 그 뚜껑의 손잡이를 잡았다. 최근에 열린 적이 있는 모양인지 문은 쉽게 열렸다.

“읍!”

썩은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그는 이게 무슨 냄새인지 잘 알았다.

「우선아, 뭔가 찾은 거야?」

“어…. 이거 곤란하게 됐는데.”

그때였다. 우선이 들어왔던 문이 세게 열리면서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들은 일제히 손전등으로 우선을 비추며 권총을 조준했다.

“꼼작 마!”

“손들어!”

「우선아, 민우선! 무슨 일이야!」

손전등 불빛에 시린 눈을 찌푸린 우선은 입술을 깨물며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형사들 중 한 명이 여유로운 걸음으로 우선을 향해 다가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험악한 인상을 가진 중년의 남자는 우선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우선은 더욱 곤란해진 상황 속에 땀이 찬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장 형사….”

형사들은 곧 우선에게 수갑을 채우고 그의 뒤쪽에 있는 저장 공간에서 여성들의 시신을 발견했다. 옷가지들을 보면 최근에 실종됐던 여성들의 시신이 맞았다. 그녀들의 영혼은 형사들이 시끄럽게 구는 사이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민우선, 널 연쇄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체포하도록 하겠다.”

수갑이 채워진 우선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챈 중년의 형사는 우선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널 이런 식으로 붙잡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

질긴 인연은 자그마치 20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라고 주장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불리했다.

“왜, 이번에도 귀신이 그러라고 시켰나 보지? 말을 해 봐, 민우선 군.”

누가 이런 함정을 파놓았는지는 몰랐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우선은 일단 순순히 형사의 손에 끌려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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