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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불청객 (28/126)

27장. 불청객

컴퓨터로 수업 자료를 정리하고 있던 신후는 사무실 전화 소리에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사무실에 얽매여 있다기보다 외근을 나가는 경우가 많으므로 명함에도 핸드폰 번호만 적어놓았다. 그래서 사무실 전화가 울리는 일은 꽤 드물었다.

“네, 한신후입니다.”

「안녕하세요, 거기가 고고학 연구실 맞습니까?」

“맞습니다. 어디시죠?”

「소개받고 연락드렸습니다.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도 조사를 나오신다고요. 그래서 의뢰를 드리고자 합니다만.」

“네, 말씀하시죠.”

전화 너머의 젊은 남자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 자치고 꽤 차분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게 차별성 있는 목소리는 아니라서 신후는 금방 생각을 접었다.

젊은 남자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입가를 매만졌다. 찻잔을 든 채 창가에 기대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은 사뭇 느긋해 보였다. 마치 신후가 얘기를 기다려주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입가가 조용히 당겨져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기말고사의 압박이라니. 신라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험 날짜를 핸드폰 달력으로 확인하며 사학과 건물 복도를 걸었다.

미리 공부하는 습관은 체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겼다. 언제 어디에서 빙의를 당할지 모르니 시험 범위를 미리 공부해두는 수밖에.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남들보다 일찍 공부하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아버렸다.

「신라야, 어디야? 밥 먹자~」

서영의 메시지가 왔다.

「3층 복도」

「그리로 갈게, 기다려!」

공부 계획을 머릿속으로 짜며 멍하니 서 있다 보니 어느새 복도에 사람이 없다. 아마도 방금 시작한 수업을 들으러 모두 사라진 모양이었다.

창틀에 쪼개져 들어온 햇살이 아무도 없는 복도를 따뜻하게 비추는 광경을 바라봤다. 눈에 조금 영기를 모으자 희미한 영들이 마치 산책을 하듯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산장에서 어린 백을 만난 뒤로 혼과 백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혼은 지하 사자의 인도를 받아 곧 환생의 굴레를 걸을 것이고, 백은 점차 희미해지다 자연스럽게 사라져갈 것이다.

그때 빈 강의실에서 걸어 나온 이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강의실로 끌려 들어와 벽을 등지고 선 신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온 사방에 달콤한 냄새를 뿌리고 다니는군.”

한신후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띤 채 신라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그렇게 말을 하는 이야말로 미소 한 번으로 뇌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놀랐어요.”

“한번 놀라야 다음부터는 이렇게 방심하지 않겠지.”

“그냥…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뭘?”

“혼과 백들.”

“그것들을 왜?”

“별 의미는…” 신후가 거리를 좁히며 더 다가왔다. 은은한 남성 향수의 내음이 함께 다가온다. 신라가 그의 가슴팍을 짚어 멈춰 세웠다.

“긴장하지 마. 기운을 둘러주려는 것뿐이니까.”

“언제 홀릴지 모르는 어둑시니 앞에서 긴장을 놓으라니요?”

“스승을 너무 늑대 취급하는군.”

“방심하지 말라면서요.”

“보호자는 열외야.”

신라는 뜸을 들이다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미 깊은 눈길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소리 없이 귀기(鬼氣)의 파동이 일었다. 어둠이 스물스물 그의 어깨 위로 삐져나왔다. 신라는 신기한 마음에 그것을 손으로 쥐어 보려 했다. 그 손을 붙잡은 신후가 눈을 지그시 감고 그녀의 손가락에 입 맞췄다.

“딴 길로 새지 마시고요.”

“집중하는 거야.”

검은 기운은 신라의 손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온몸으로 전해졌다.

‘진짜 심장에 해롭네….’

신라는 점점 박동이 커지는 심장을 느꼈다. 갈대밭에서 귀력을 전달하는 훈련을 했던 그 날, 서로의 진심을 엿볼 수 있었던 그날부터 한신후는 좀 더 노골적인 구애를 시작했다. 억지로 스킨십을 하거나 부담스럽게 갈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때그때의 진심을 감추지 않을 뿐이었다.

그때 밖에서 신라를 부르는 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봐야겠어요.”

“…가 봐.”

꽉 쥐고 있는 주먹은 아직 그 욕망을 풀어놓지도 못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의 절제력은 강했다.

신라는 잠시 신후와 눈을 마주치다가, 조용히 강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말없이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신후는 열 띤 눈을 떼지 못했다.

신라와 서영은 학생회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숟가락을 쥔 채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는 신라를 보고 서영이 손을 휘휘 흔들어보았다.

“무슨 생각해?”

“응? 별로….”

“또 뭐가 보이고 있는 줄 알았네.”

안도의 숨을 내쉰 서영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당 안에 있는 모니터에서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1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던 아이돌 네오 군이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대박! 신라, 저거 봐!”

서영이 밥풀을 튀기며 소리쳤다. 신라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뉴스를 봤다.

“누구인데?”

“너 네오 몰라? 솔로 아이돌 중에 최고 주가 달리던 애인데, 1년 전에 사고 나서 식물인간 됐었잖아! 지금 깨어났대!”

“그래? 잘됐네….”

“세상에, 너무 잘 됐다~ 누워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유전자였거든~ 꺄!”

서영의 반응이 재미있었던 신라는 작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뉴스를 봤다.

간혹 주위를 맴도는 영들 중에는 뇌사 판정이나 식물인간 판정을 받은 영들도 있었다. 오래 의식을 잃고 있으면 육신과 영혼이 자연스럽게 분리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다시 육신으로 돌아가면 깨어날 확률이 높아졌지만, 그렇지 못하고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경우에는 희망이 없었다. 육신에서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그들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깨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나 보네….”

신라의 혼잣말에 서영이 격하게 동의했다.

“당연하지! 아이돌로 살면 얼마나 행복하겠어? 돈도 많이 벌지, 그 많은 사랑도 받지. 아~ 행복하다. 요새 주위에 꽃미남들이 넘쳐나. 한 교수님을 비롯해서, 너희 연구실 조교님들까지. 게다가 좋아하던 아이돌도 다시 돌아왔어!”

“서영이 너 어지간한 얼빠구나….”

“얼빠라니! 난 심성도 본다고~ 호호호….”

신라는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들은 공강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정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누가 왔나?”

궁금한 건 못 참는 서영이 신라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얼결에 함께 뛰어가게 된 신라였다.

굉장히 화려한 모습의 사람이 나무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머리칼은 아주 연한 하늘색이었고, 귀에는 특이한 모양의 피어싱이 꽂혀 있었다. 선글라스를 껴서 잘은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스무 살 갓 지난 듯싶은 앳된 외모였다.

그 소년을 먼저 알아본 것은 서영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핸드폰이 툭 하고 떨어졌다.

“저… 저… 저 사람…. 신라… 뉴, 뉴스….”

“어?”

“뉴…스, 방금 뉴스에 나왔던 그…!”

서영이 말을 끝맺기 전, 소년의 고개가 먼저 그녀들 쪽으로 틀어졌다. 그는 그녀들을 발견하자마자 씨익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마치 바닷물이 갈라지듯 사람들이 뒷걸음질 쳤다.

“이봐.”

소년이 기운찬 목소리로 부르며 멈춰선 대상은 다름 아닌 신라였다. 그가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깃 사이에 꽂자마자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라도 그 얼굴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

“날 알아? 아아, 물론 알겠지. 이 얼굴을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점점 학생들이 근처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 시선들이 부담스러운 신라는 그저 이 소년을 한시라도 빨리 떨쳐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무슨 용건이시죠?”

신라의 딱딱한 대꾸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네오는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겼다. 그 모습에 서영은 탄성이 비집고 나오는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너, 유신라 맞지?”

“맞…는데요.”

“흐응, 겉모습은 꽤 평범하네.”

그러고서 네오는 킁킁, 냄새도 맡았다.

“네가 고고학 연구실에서 일한다지? 내가 거기에 방문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말이야.”

“저희… 연구실이요?”

“응, 궁금했거든. 전부터 말이야.”

네오가 씨익 웃었다. 만화에서 금방 빠져나온 듯한 그 미소에 서영의 눈은 이미 하트가 되어버렸다.

‘전부터라고…?’

한편 신라는 진지한 눈빛으로 네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다는 말은, 식물인간이 되기 전부터 고고학 연구실의 존재를 알았다는 소리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인간인 ‘중에’ 연구실에 대해서 알았다는 소리이다. 즉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상태에서 말이다.

“당신 혹시…”

신라가 입을 열었을 때, 네오의 표정이 급변했다. 여유로움이 단번에 사라지고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신라는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쪽으로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함께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는 우선과 동주가 있었다.

“선배들…”

“저기!”

그때 네오가 신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

“나, 나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올게. 알았지?”

재빨리 선글라스를 다시 낀 네오는 쏜살같이 정문을 달려 나갔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스포츠카가 그를 태우자마자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뭐가 지나간 거냐….”

서영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스스로의 볼을 아프게 꼬집어보기도 했다.

“뭐가 지나갔는데?”

어느새 그녀들에게 다다른 우선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서영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봤다.

“아, 조교님!”

“왜 이렇게 북적거려? 연예인이라도 왔다 갔어?”

“네! 그게 있죠~”

서영이 우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한 동주가 신라에게 말을 걸었다.

“신라, 밥은 먹었어?”

“네. 다음 수업 시작 전에 커피라도 테이크아웃 해 올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식물인간에서 깨어난 아이돌이라는 애가 길을 막아서….”

“아이돌? 아아, 뉴스에 나온 그?”

“선배도 아시네요?”

“하하, 나도 TV는 본다고. 이상한 친구네. 깨어나자마자 하필 왜 이 학교에 찾아왔지?”

“그게….”

어디서부터 이상한지 조차 애매한 상황이었기에, 신라는 그저 웃어넘기고 말았다.

“별거 아니었나 봐요.”

다만 꺼림칙했던 것은 멀리서 다가오는 동주를 보자마자 네오의 표정이 잔뜩 굳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소속사로 돌아가는 스포츠카 안에서, 네오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 만나고 왔어. 그 여자 말이야.”

「누가 단독행동을 하라고 했지?」

싸늘한 말투에 네오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저, 전혀 눈치 못 채던걸? 꽤 평범해 보이던데, 보스는 그 여자의 어디가 마음에 든 거지?”

「쓸데없는 짓 말고 그만 돌아다니도록 해. 그 ‘몸’이 세상에 얼마나 알려진 존재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나도 알아. 꽤 귀찮더라고. 앞으로는 주의할게.”

「다음 연락 때까지 그 몸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자중하고 있어라. 일단 이번 일에 대해서는 보고드리지 않도록 하지.」

전화를 끊자마자 네오는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명령질이야? 재수 없게….”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어폰을 꼈다. 아까 캠퍼스 안에서 잠깐 마주쳤던 인물이 떠올랐다.

“그런 모습이구나….”

말끝에 큭큭, 의미심장한 웃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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