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26장. 백(魄)
27장. 불청객
28장. 함정_上
29장. 함정_下
30장. 단서
31장. 추적
32장. 신호
33장. 재회
34장. 미련
35장. 방학
36장. 과 캠프
37장. 금돼지
38장. 강화도
39장. 욕망
40장. 자라경
41장. 여우귀
42장. 회유
43장. 구미호
44장. 지국천왕
45장. 육도(六道)
46장. 49재
47장. 후생(後生), 희생(犧牲)
48장. 추식귀
49장. 잊혀진 여인
50장. 재회
26장. 백(魄)
낯선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끝에 눈을 뜬 그녀는 벽에 걸린 시계부터 확인했다. 아침을 맞기엔 좀 이른 시각이었지만 더이상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커피포트로 데운 물에 찻잎을 넣고 창가로 걸어갔다. 새벽의 기운이 맴도는 풍경이 시야를 시리게 적셨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지이잉, 탁자에 놓인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소낙비야.」
기척이라도 느낀 걸까. 위층에 사는 남자는 자신의 동태에 대해 귀신같은 촉을 갖고 있었다. 아니, 반은 귀신의 혼이니 당연한 일일까.
「교수님도 창가에 서 있나요?」
「응. 빗소리가 좋군.」
적의 우두머리가 고고학 연구실을 휩쓸고 간 뒤로 신라는 보호 조치로 신후가 사는 오피스텔 룸 아래층으로 이사했다. 모두를 위한 일이었기에 월세는 연구실 예산으로 부담하기로 했지만, 신라가 부득불 주장해서 예전에 살던 방값 정도는 본인이 부담하기로 했다.
「안개가 자욱해서 현실 같지가 않아요.」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건 위험한 징조인데. 혹시 갑자기 내가 나타나는 꿈도 꿔?」
그것이 떠보는 말인 줄 단번에 눈치챈 신라는 잠시 고민하던 끝에 키패드를 두드렸다.
「펄펄 끓는 물로 우려낸 차가 있는데, 꿈인지 현실인지 교수님 혀로 판단해도 된다면 내려오세요.」
목에 건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던 신후는 신라의 답장을 보고 작게 웃었다.
“확실히 깨어있네.”
적당히 근육이 잡힌 넓은 등 위로 방금 샤워한 물기가 맺혀 있었다. 이렇게 몸이 좋아도 뜨거운 것은 잘 마시지 못하는 그는 종종 연구실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오늘은 외근 나가는 날이니까 비가 그치면 천천히 출근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신라는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신후의 말대로, 곧 비가 그칠 것처럼 먹구름이 하나둘 물러나고 있었다.
* * *
고고학 연구실 사람들을 태운 승합차가 외곽 도로를 달렸다. 도심에서 한 시간여 정도 차를 타고 가야 나오는 산이 오늘 그들의 목적지였다. 주인이 없을 때에도 계속 불이 켜지고 인기척이 나는 낡은 산장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얘기만 들어보면 딱 공포 영화 스토리인데 말이지.”
운전하던 동주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조수석에서 우선이 그 말을 받았다.
“이제 그걸 조사하러 간 탐험대가 하나둘씩 실종돼야겠네?”
“비 온 뒤 질척거리는 흙바닥과 음기 가득한 산속이라~ 완벽한걸?”
“하긴, 산에 가면 꼭 하나둘씩 있지. 길을 잃고 헤매는 원혼들이.”
그러자 맨 뒷좌석에서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던 건우가 인상을 썼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잠 좀 자자.”
혜령이 핸드폰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키득키득 웃었다.
“제일 먼저 죽는 캐릭터가 딱 이렇거든.”
“야! 내가 왜 죽어! 사람을 골탕 먹이면 먹였지.”
“어쭈. 속죄의 삶이 아니라고 막 나가다가 다음 생에 미물로 태어나는 경우가 있어.”
“하! 그 정도로 벌을 받을 줄 알아? 이 몸은 전생에 이미 많은 공을 세웠다고.”
“그 공이 그렇게 대단한데 신들께서는 어찌 저런 육신을….”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 혜령을 보고 건우가 발끈했다.
“내가 뭐 어때서!”
“아니야, 어서 자. 친구.”
“우씨, 열 받네!”
혜령의 옆에 앉아 있던 신라가 소리 죽여 웃었다. 네 사람 사이에 껴 있으면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는 것 같았다.
산기슭 적당한 자리에 차를 댄 그들은 바깥으로 나왔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곳곳에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동주가 지도를 보고 선두로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신라, 혜령 누나, 바지 안 더러워지게 조심해서 올라와요.”
우선과 건우는 맨 뒤에서 따라 걸으며 수상한 기척이 있는지 살피는 역할을 맡았다.
30여 분을 올라가서야 평지가 나타나고 사진으로 본 것과 똑같은 낡은 산장이 드러났다. 예전부터 수렵꾼들을 위한 중간 쉼터로 운영했다는 2층짜리 산장은 오래되긴 했어도 관리를 꼼꼼히 한 티가 났다. 다만 무엇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나한테 열쇠가 있어.”
우선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고리에 꽂아 넣었다. 열쇠가 돌아가는 것에 모두들 집중하고 있었다.
덥석-
그때 맨 뒤에 있던 건우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끄악-!”
꼴사나운 비명을 내지른 건우가 벌렁대는 심장을 누르며 돌아봤다. 해골처럼 생긴 마른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일찍이 기척을 느끼고 있던 혜령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하고 말았다.
“오시기로 한 대학교 연구실 분들이시지요? 제가 지인을 통해 제보 드린 사람입니다. 이곳을 일주일에 한 번 관리하러 오는 산장지기죠.”
사내가 덤덤하게 자신의 소개를 했다. 우선과 동주의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고 건우는 새빨개진 얼굴로 항변했다.
“귀, 귀혼의 기척에만 너무 집중해서 그래!”
“네, 네….”
다섯 사람은 산장지기의 안내를 받아 산장 내부로 들어갔다. 전등 스위치를 켜자 다소 칙칙한 분위기의 풍경이 드러났다.
우선이 산장지기에게 말했다.
“그럼 조사를 좀 해보고 말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 주십시오. 이거 무서워서 관리를 할 수가 있어야지, 참….”
산장지기가 산장을 완전히 나서는 것을 확인한 조교들은 들고 온 짐을 풀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귀신이 지나간 행적이 있는지 기척을 되짚어 보는 것이었다.
동주가 쫓을 추(追) 자가 적혀진 부적을 1층 동서남북 방향에 붙여 놓고 염불하기 시작했다. 워낙 기운이 희미해서 힘이 모자라자 우선도 동참해 두 손을 합장하고 함께 염불했다. 그러자 푸른 영(影)이 돌아다녔던 모습이 언뜻언뜻 그들의 눈에 보였다.
신라가 동주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귀력을 넘겨주었다.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강한 기운에 놀란 동주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혜령이 그에게 다시 집중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보인다.”
건우가 속삭였다. 푸른 영이 더욱 뚜렷한 형체를 나타냈다. 그것은 산장의 전등 스위치를 매만지기도 했고, 창문을 열어보기도 하다가 스르륵 2층으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온 기척이 없으니 아마도 2층에 머무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건우를 선두로 모두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좁은 다락방이었다.
달그락, 달그락… 천장에 달린 전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깜짝 놀라 멈췄다. 그리고 도망치기 위해 창문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어딜!”
혜령이 활 세 개를 동시에 뽑아 들어 활시위로 당겼다. 창문 가장자리에 동시에 박힌 화살들이 만든 결계 때문에 혼은 나가지 못하고 당황해서 2층 다락방을 맴돌았다.
“원혼은 아닌 것 같고, 망자의 백(魄)(*인간의 사후에도 몸속에 사는 존재)이 스스로 사라지지 못하고 머무르는 것 같은데. 이 근방에 시신이 있을 확률이 높겠어.”
건우의 말에 우선도 동의했다.
“네. 그것도 이 산장 안에요.”
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 백을 보고 신라는 왠지 가여운 감정이 들었다.
‘알고 싶어. 왜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
신라는 허공으로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두려움에 방황하던 백이 도망치듯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신라는 그 백에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육체에 받아들여 기억을 엿봤다.
백의 주인은 어린 소녀였다. 수렵꾼인 소녀의 아버지는 매일 사냥을 나갔다. 심심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창밖을 내다보는 일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사슴이 산장 근처로 나타났다.
소녀는 절대로 밖에 나오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도 잊고 신이 나서 맨발로 뛰쳐나갔다. 사슴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때 탕- 하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
의식을 차려 보니 아버지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진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도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그를 만질 수도 없었다.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다가와 끌고 갔다.
- 왜 죽었는지 모르는 눈치인데.
- 죽은지도 모르는 것 같아.
- 그냥 데려가자. 설명은 아래에서 해주겠지.
거기까지 보고 신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혜령이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해주고 있었다.
“뭘 봤어?”
그녀의 물음에 신라는 본 것을 모두 얘기했다. 그들은 신라의 말을 단서로 삼아 소녀의 사진과 유골이 담긴 작은 단지를 찾아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사진 속 소녀를 바라보던 혜령이 말했다.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들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아서 혼은 떠나갔지만 백은 여태 이 장소에 머무르고 있었던 모양이야. 가엾게도.”
신라가 덧붙였다.
“아이가 원하는 건 별거 없는 것 같아요. 날마다 창밖으로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모습을 발견하는 게 기뻤던 모양이거든요.”
“그래. 원하는 대로 해주자.”
신라가 유골함에 손을 대자 그녀의 육체에서 빠져나온 백이 다시 유골함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유골함을 들어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로 옮겨주었다. 이제 불안할 일이 없는 백은 유골에 머무르다가 자연스럽게 사라져갈 것이었다.
“허탕을 친 기분이지만 썩 나쁘진 않네.”
건우가 코끝을 문지르며 하는 말에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고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에 우선이 산장지기와 통화를 마쳤다.
“아이가 맞은 총이 아버지가 쏜 거였대. 과실치사로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지만, 본인이 원해서 실형을 선고받고 들어가 있는 중이래. 그래서 이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어. 지금도 많이 괴로울 테니까.”
그 말에 다들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귀력을 소진해 피곤한 눈을 감고 있던 신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가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에요. 이제 여느 때처럼 창가에서 아빠가 오길 기다리다가 편히 잠들 수 있을 테니까….”
혜령이 미소 지으며 신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역할이 컸어, 신라야. 어서 푹 자.”
“아뇨… 전 별로 한 게….”
말도 끝맺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리는 신라를 보고 조교들은 소리 죽여 웃었다.
완전히 먹구름이 걷힌 하늘이 한나절 품고 있던 햇살을 조각조각 떨어뜨리고 있었다.
일을 마친 우선과 동주는 노을 진 하늘을 등지고 퇴근길을 걸었다.
“와, 아직도 힘이 쌩쌩해.”
동주가 팔뚝을 툭툭 두드리며 하는 말에 우선이 피식 웃었다.
“신라가 괜히 귀력의 화수분이 아니네. 잠깐 귀력을 나눠준 것만으로 하루 종일 에너지 만땅이라니.”
“그러게. 위험한 것들이 접근 못 하도록 내가 더 신경을 써줘야겠어.”
그때 네 명의 아이들이 길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형!”
“오빠~”
“우선이 형도 있다!”
동주의 동생들이었다. 그가 퇴근한다고 집에 연락하면 늘 이렇게 마중을 나왔다.
“나오지 말라니까 자꾸 말 안 듣지!”
“보고 싶었어!”
아이들은 깔깔대며 동시에 동주의 몸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작은 몸집이라도 세 명이 동시에 엉겨 붙으면 동주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윽, 무거워, 이놈들아!”
“헤헤헤!”
“안 되겠다! 먼저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한테 용돈 준다!”
“우와! 용돈이다~!”
그 말에 승부욕이 발생한 아이들이 다시 우르르 집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던 우선이, 아직 머뭇거리며 서 있는 소년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동욱이도 나왔네. 안녕?”
쑥스러움에 고개를 숙인 소년은 슬금슬금 동주 쪽으로 숨었다. 동주는 피식 웃으며 동욱을 번쩍 들어 안았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을까 싶은 소년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왠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왜, 동욱아. 아직 우선이 형이 어려운 거야? 네가 제일 오래 봤으면서.”
동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동주의 품에 코를 박았다.
“훗. 항상 이렇다니까.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 잘 들어가, 우선아.”
“그래. 내일 보자.”
우선은 동주가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아까 산장에서 봤던 소녀의 백을 떠올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이라….”
그의 씁쓸한 시선이 다시 동주의 집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