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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 애초에 없었다 (26/126)

25장. 애초에 없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간밤에 난리가 났었다는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역시나 학과장이었다. 그녀는 고고학 연구실로 들어서자마자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질렀다. 창문은 모두 깨져서 바깥바람에 커튼이 휘날리고 있었고, 바닥은 어느 정도 정리했다 해도 아직 먼지와 서류 종이들이 즐비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청소를 하던 우선과 동주가 태연스레 학과장을 맞이했다.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그게….”

서로 시선만 교환하는 두 사람을 보고, 학과장이 소리쳤다.

“한신후 교수님은 어디에 있니!”

잡아먹을 듯한 그녀의 물음에도 그들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 * *

봄바람이 부는 갈대밭에 두 남녀가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긴 머리가 휘날리는 것을 내버려 둔 신라는 눈을 감고 무언가에 집중했다.

- 먹이가 찾아왔다….

- 귀력을 내놓아라….

신후는 잡귀들의 향연에도 웬일인지 조용히 그의 기운을 죽이고 신라를 지켜봤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후 심호흡을 한 신라가 천천히 신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귀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하면 몸 안에서 맴도는 귀기(鬼氣)를 느낄 수 있었다. 이 힘을 같은 편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실제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훈련을 하러 나온 것이었다.

“윽….”

귀력을 팔로 모으자마자 형체 없는 귀신들이 몰려들어 하나둘씩 그것을 빨아들이고 갔다.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게 느껴져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팔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하며 곧 다리도 휘청거렸다.

“더 집중해.”

신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섯 걸음 정도 떨어져 서 있는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신라가 스스로 귀력을 자신에게 전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쪽으로 전달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내 쪽에 집중하고 뚜렷한 목적성을 가져.”

“그러고 있는데, 자꾸 방해하는 것들이….”

“시간을 끌다간 더 많은 것들이 몰려올 거야.”

재촉만 하는 신후가 못마땅했지만, 신라는 어떻게든 손에 모인 기운을 신후에게 보내기 위해 애썼다. 온갖 잡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귀력이 형태를 갖고 흘러나와 신후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러는 와중에도 귀력을 조금씩 빼앗아가는 얄미운 잡귀들이 있었다. 신라는 조금씩 신후 쪽으로 발을 옮겼다. 세 걸음 간격을 만들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그녀의 귀력이 신후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잘했어. 조금 더.”

“윽….”

그때 어디선가 빠르게 날아온 혼이 신라의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신라의 면역력이 약해진 사이 그녀의 몸을 차지한 것이다. 신라는 그대로 신후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조르며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땅에 머리를 대고 누운 신후는 표정 변화 없이 배 위에 앉아 있는 신라를 올려다봤다.

“아직 의식이 있겠지. 스스로 떨쳐내 봐.”

“으… 으….”

“그건 네 몸이야.”

신라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처녀귀에게 몸을 빼앗겼는지 그렁거리는 눈으로 달뜬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답답한 옷가지를 모두 벗어버리고 속옷 차림이 됐다.

“안아… 줘….”

‘아니야…!’

의식과 다르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이 신후의 손을 잡아끌어 젖가슴에 올려놨다. 그의 바지 벨트를 풀고, 속옷 위를 지분거린다. 그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남근을 느끼고 온몸이 애욕에 차오른다.

‘이건 내가 아니야!’

신라는 마치 안아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하다가도, 잠깐잠깐 이성을 되찾아 고개를 내저었다.

신후는 신라가 스스로 이성을 되찾기를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그동안 속옷도 벗어버리고 전라가 된 신라가 신후의 옷가지마저 벗겨냈다. 그녀는 살갗이 맞닿는 감촉에 환희하며 그의 몸 곳곳을 애타게 핥았다.

‘뜨거워…. 몽롱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무감정한 얼굴로 신라를 지켜보던 신후는 끝내 콧등을 찡그렸다. 그녀의 손이 단단해진 성기를 뿌리부터 쥐어 올리고 있었다.

“…신라.”

신라의 혀가 기둥을 핥기 위해 다가왔다. 신후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녀의 턱을 쥐어 그 행위를 막았다.

“교…수님….”

“정신 차려.”

“…저 좀…. 구해주세요….”

신라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신후는 훈련을 관두기로 하고, 악귀를 쫓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그때였다. 신라의 양손이 다시 신후의 목을 세게 졸랐다.

“큭….”

“죽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몸은 아직 의식이 남아있다는 증거였다. 신라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다시 까매졌다 반복했다.

‘이 남자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누구의 생각인지 모를 섬뜩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 울렸다. 한신후가 죽으면, 다음 생은 없다. 이생에서 애타게 찾고 있었던 것도, 살아왔던 모든 시간도 물거품이 되어버릴 테지. 그의 초연한 눈빛은 혹시라도 모를 그런 결말을 대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못 오는 삶인데… 날 구하다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신후는 손을 뻗어 이리저리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대신 정리해주었다.

“그럼 그렇게 가는 거겠지.”

“……”

“인간은 그렇잖아.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떤 재산을 가지든, 죽으면 그 생은 끝이야. 그래서 인생이야.”

이 남자는 죽음의 허무함마저도 인간의 속성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게 인생이라는 걸 진즉에 알았으면서도 감정마저 결여된 불완전한 굴레에 덤덤하게 뛰어든 것이다.

뚝… 뚝…

뜨거운 눈물이 신후의 뺨 위로 떨어졌다. 입술을 꾹 깨문 신라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맺혔다 떨어졌다.

그녀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음을 눈치챈 신후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아마도 그를 위한 것일 눈물 위로 입술을 대었다. 뺨에서 머금고, 눈가로 올라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도 머금었다.

두 사람의 나신이 석양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왜 울었지?”

“…없을 것 같아서요.”

“뭐가 없어.”

“당신을 위해 이렇게 울어준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신후는 자조적인 미소를 띤 채 가만히 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는 격동 치던 감정의 여운으로 도무지 멎지 않는 눈물을 계속해서 훔쳐냈다.

“맞아. 여태껏 없었지. 이렇게 서럽게 울어줬던 사람은.”

“읏… 흑….”

두려움, 사랑, 분노 등 모든 감정을 맹목적으로 갈구하던 어둑시니로서 살았던 자신에게, 그들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삶은 너무나 가혹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경외하고 선망해도 와 닿는 것이 없으니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녀가 울어주는 것이 기뻤다. 욕망 깊은 곳이 충족되면서 생명력이 펄떡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슨 마음으로 우는지는 모른다.’

비어 있는 감정의 공간에는 대신에 아쉬움, 희열, 욕심만이 들어찬다. 이것이 얼마나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감정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을 안고 태어난 인간들도 본인의 미성숙함에 휩싸여 상대를 욕심껏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없는 감정을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신후의 물음에 신라는 눈을 가린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갈망한다면… 언젠가 찾아진다면….”

그는 그녀의 손을 얼굴에서 조심스레 걷어냈다. 눈시울도, 뺨도, 모두 열에 달아오른 얼굴이 있었다. 애가 탔다.

“미안….”

짤막한 사죄를 내뱉은 그의 입술이 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커다란 두 손이 가녀린 등허리와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굳은 자세로 신후의 혀를 받아들이던 신라는 잠시 후 그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강한 바람에 갈대가 쓰러질 듯 휘어지든, 그들은 오직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결여된 것을 채우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처럼.

젖은 뺨에서 눈물 자국을 모두 핥아낸 다음에야 신후는 잠시 떨어졌다. 달뜬 숨을 내뱉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달콤하게 시각을 자극했다.

갖 고 싶 어

만 지 고 싶 어

정 복 하 고 싶 어

누 구 에 게 도 주 고 싶 지 않 아

나 만 의 것

그는 널브러진 옷가지를 가져와 그녀에게 먼저 입혔다.

“다른 데 가지 말고 기다려.”

고압적인 말보다 신라를 짓누른 것은 그의 애처로운 눈이었다.

“만약 당신이 다른 곳에 간다면….”

“내 사지를 잘라서 가둬놔도 좋아.”

“목줄도 채울 거예요. 그리 오래 안 기다릴 거예요.”

“우울하게 만들지 마.”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떼를 쓰는 남자는 스스로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아는 사람 같아서 다소 얄미웠다. 신라는 그의 이마를 밀어냈지만 바로 손목이 붙잡혀 손등에 키스를 당했다. 심술이 난 그녀는 힘껏 그의 가슴팍을 밀어 갈대밭에 드러눕게 만든 다음 옷을 마저 챙겨입고 먼저 자리를 떴다.

“하아….”

아쉬움을 한숨으로 토해낸 신후가 뒤늦게 바닥에서 일어나 몸을 털었다.

‘인내의 끝을 봤군.’

그는 허탈한 모습으로 옷을 챙겨입었다.

그때였다. 그가 갑작스레 통증이 느껴진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순간 심장이 통째로 떼어내지는 섬뜩한 감각이 들었다. 마치 자석과 자석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더 가까워졌다.’

찾아 헤매던 것이, 때가 다가오자 더 강하게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짙게 내지었다.

* * *

주말 이른 아침, 강 현은 한적한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왠지 들떠 보이는 표정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카페 문을 열고 신라가 걸어 들어왔다.

“여기예요, 신라 씨.”

한사코 거절하는 신라에게 음료를 사준 강 현은 그녀를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요새는 어때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된 강 현의 물음에, 신라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차분하게 답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이겨내고 있어요.”

“앞으로도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많은가요?”

“네. 아직 상상도 안 될 정도로.”

강 현이 옅게 미소 지었다.

“신라 씨라면 어떤 역경이 찾아와도 씩씩하게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선생님이 그렇게 보셨다면 정확한 거겠죠.”

당찬 대답에 강 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후로는 시시콜콜한 잡담이 이어졌다. 학교 얘기, 병원 환자 얘기, 날씨 얘기 등…. 그런데 오래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신라는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전혀 다른 분위기에, 다른 외모를 가진 이 남자에게서 한신후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건우, 우선, 동주의 모습까지.

왜 그런지 홀로 고민에 잠겼을 때, 의외의 말이 정신을 깨웠다.

“아쉽네요.”

“뭐가요?”

강 현이 뺨을 살살 긁으며 할 말을 머뭇거렸다. 보기 드문 그의 모습에 신라의 관심이 쏠렸다.

“선생님답지 않게 망설이시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사실…. 곧 여기를 떠나요. 병원을 그만두게 됐거든요.”

“아…. 다른 곳으로 옮기시는 건가요?”

“아니요. 다른 일을 찾아볼까 해서요. 터전도 옮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 하는 거죠. 하지만 아주 멀리 가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가끔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신라 씨가 내 연락을 무시하지 않고 나와 준다면.”

신라가 작게 미소 지었다.

“선생님이라면 언제든지요.”

“정말요? 약속해요.”

강 현이 새끼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다 큰 남자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할 생각을 하다니. 결국 웃음이 터진 신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됐죠?”

“이제 안심이네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요.”

“네.”

잠시 후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를 몰고 온 강 현이 먼저 신라를 보내기로 했다.

“정말 안 태워다줘도 되겠어요?”

“학교에 들러야 해서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아, 이렇게 아쉬울 줄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한 번 해볼 걸 그랬나?”

신라는 그저 가볍게 웃었다.

“어? 농담 아닌데. 나처럼 잘생긴 남자는 아무 데서나 고백 비슷한 거 안 해요.”

“네, 네. 선생님 잘생긴 거 알아요.”

“후훗. 들어가요.”

신라는 마지막 눈인사를 남기고 가방끈을 치켜올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강 현은 캠퍼스 쪽으로 멀어지는 신라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고 있었다.

“…또 봐.”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 * *

그 옛날 다문천왕이 어둑시니를 벌하기를-

애(愛)- 사랑의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둑시니가 질문했다.

애초에 없는 것을 빼앗아갈 속셈인가?

다문천왕은 그 말을 믿지 않고 어둑시니의 심장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빼냈으니 그곳에 물론 사랑은 없었다. 이번에는 빼앗은 것들 중 사랑을 찾았다. 그런데 거기에도 사랑은 없었다.

빼앗은 것에도 없고, 남아 있는 것도 없으니 너에게는 애초에 사랑이 없었구나.

어둑시니는 반박하지 않았다.

다문천왕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인의 수명을 늘렸느냐?

어둑시니가 조소하며 답했다.

그것은 당신이 저지른 죄를 들춰보면 알 것이다.

다문천왕은 입을 다물었다.

그 후 다시는 어둑시니에게 죄의 자초지종을 캐묻지 않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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