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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미명귀 (25/126)

24장. 미명귀

“혜령 선배가 늦네….”

시계로 밤 11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한 신라는 이불 위에 엎드려 핸드폰을 켰다. 연구실 단체 메신저 창에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지만 아무도 글을 확인하는 이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은 품는 순간부터 사그라지긴커녕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 신라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여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 밤에는 선선한 날씨였다. 반팔 티셔츠, 트레이닝 바지에 긴 가디건만 걸친 그녀는 일단 학교 쪽으로 달렸다. 어둑한 가운데 가로등 불만 간간이 켜져 있는 캠퍼스 안은 사뭇 을씨년스러웠다.

부르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려, 달리는 와중 화면을 확인하려던 신라는 옆에서 걸어 나온 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부딪힌 남자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신라를 쳐다봤다. 삐죽삐죽 삐쳐 있는 갈색의 상한 머리칼서부터 그의 괴팍한 성미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봐, 눈 똑바로 못 뜨고 다녀?”

“정말 죄송합니다.”

“젠장, 이래서 여자가 싫다니까….”

신라는 툴툴거리는 남자에게 연거푸 허리를 숙여 사과하고 다시 사학과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별생각 없이 돌아선 남자는, 잠시 뒤 걸음을 멈추고 신라가 사라진 쪽을 미심쩍게 바라봤다.

“잠깐만, 혹시 저 여자…?”

그때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새를 못 참고 보고하라시네….”

그가 중얼거리며 바라본 핸드폰 액정 화면에는 발신자 이름이 선명히 떠올라 있었다.

「 비 형 랑 」

* * *

소매 단추를 끌러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신후는 연구실 의자에 묶어놓은 남자를 멀찍이서 바라봤다. 분노하는 기색도 없이 느긋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은 상대로 하여금 극도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조교들은 신후가 미리 언질을 준 대로 끼어들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큭큭큭! 너희가 아무 짓도 못 한다는 건 알고 있어. 이 몸에 무슨 짓을 하면 너희는 인간 사회의 심판을 받아야 하니까!”

미명귀는 부러 큰소리를 치며 객기를 부렸다. 그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신후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의 근처로 걸어갔다.

“유감이군.”

“큭, 알면 당장 풀어라! 하찮은 퇴마사야!”

“네가 어리석게도 내가 준 기회를… 아니, 자비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게.”

미명귀는 잔뜩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앞에 멈춰선 이를 올려다봤다. 신후가 비집고 나오는 비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건가?”

“…뭘 말이지?”

“아아, 역시 넌 버리는 패였군.”

“알아듣게 설명해!”

“자신을 구천을 떠도는 귀신으로 만든 이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가엾은 놈에게 중책을 맡길 리가 없지.”

미명귀를 비롯해서 조교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자에 묶여 있는 미명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에게 잠깐이나마 세상을 아는 기쁨과 생기를 선물해준 것을 고려해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

“그게, 단 한 번의 마주침에서 내가 너에게 베푼 자비였지.”

나지막이 얘기한 신후는 손목시계도 풀어 조교들 쪽으로 던졌다. 그것을 동주가 한 손으로 여유롭게 받아냈다. 불안함을 느낀 우선이 나서려 했지만 금방 혜령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미명귀는 분노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네가…! 네가 그 반귀라고!?”

“오랜 기간 퇴마 일을 하면서 연구해 온 결과, 요괴들도 간단한 것은 ‘학습’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어. 하지만 넌 그 오랜 세월 동안 배운 게 없는 모양이야.”

신후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팔을 감싸며 내려온 검은 아지랑이가 연구실 안에 미풍을 일으키더니 곧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나, 나는 잘못한 거 없어! 서로 좋자고 한 일밖에… 아니!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다고!”

“누가 그걸 시켰지?”

“모, 몰라. 나에게 무슨 짓을 했다간 다 신고해버릴 거야, 알겠어!?”

“인간의 육신을 뺏어 기껏 한다는 게 고작 인간 사회의 법 뒤로 숨는 건가…. 그래. 네 정체가 보이지 않으니 우리가 어떤 진술을 한들 이승에서는 미친놈 취급을 하겠지.”

신후가 손을 한 번 휘젓자 검은 소용돌이가 미명귀를 덮쳐 그의 얼굴에 날카로운 상흔을 남기고 지나갔다.

“끄악!”

바로 배어 나온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다행이야.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신고할 수 없다는 것까진 아는 모양이니까.”

“뭐…?”

어둠의 소용돌이가 또 한 차례 격동 치며 미명귀를 덮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방금 전 생겼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상처’로는 어디에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을 것이다. 불길함에 사로잡힌 미명귀가 더듬더듬 말했다.

“서… 설마….”

“인간의 혼을 가둬버리고 대신 육체를 차지했다는 건, 바꿔 말하면 그 육체에 속박돼 버렸다고도 할 수 있지. 안 그래?”

조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뒤통수를 맞은 얼굴을 했다. 인간의 육신을 차지하고 꼼짝도 안 하는 귀신을 거꾸로 고문시킬 생각을 하다니, 한신후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사고였다.

“자, 잠깐, 잠깐만!”

미명귀가 다급히 외쳤다.

“마, 말할게. 궁금한 걸 다 말해주면 되잖아!”

“그럼 아까 질문의 답을 들어볼까.”

미명귀는 망설이던 끝에 얘기했다.

“비, 비형랑. 그 녀석이 모든 걸 꾸미고 있어.”

“지금 어디에 있지?”

“…그, 그건….”

정말 모든 걸 말해버리면 이 육신을 빼앗기고 무(無)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미명귀의 망설임이 더욱 길어졌다. 신후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소용돌이의 칼날로 미명귀의 몸을 마구 채찍질했다.

“으악! 그, 그만-!”

“무엇을?”

멈추지 않는 통증에 절규하던 미명귀는, 어느새 상처는 사라지고 피투성이만 되어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공황 속에 헐떡거렸다.

연구실 바깥에서 문이 조심스레 열렸을 때, 미명귀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이 더 궁금해할 만한 얘기를 또 알고 있는데….”

연구실로 들어선 것은 신라였다. 그녀는 연구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혜령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조교들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그에 개의치 않은 미명귀는 신후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큭큭. 예전에 환생을 설계한 적이 있지? 그 사람은 잘 만났나?”

“……”

“만났을 리가 없지…. 어때. 이게 더 알고 싶지 않아?”

표정이 없는 신후에게서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미명귀의 주위에서 매섭게 휘몰아치던 어둠의 소용돌이가 점차 사라졌다.

그 옛날 전달받았던 서신 속 내용이 조작되었다는 것은 예진구를 통해 이미 확인했다. 이제 와 범인이 누구인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싶었지만, 이렇게 알아서 찾아와 자백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수수께끼가 하나 풀렸다. 결국 이 또한 스스로가 뿌린 씨앗이었던 것이다.

신후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뒤쪽을 쳐다봤다. 조교들 사이에 덤덤한 모습으로 서 있는 신라가 보였다. 진작 품에 안았을 수도 있는 여인에게 다다르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는 족쇄는 다름 아닌 스스로 채워놓은 것이었다.

금세 의기양양해진 미명귀가 신라를 향해 빈정거리듯 말했다.

“무슨 대단한 능력을 가진 지는 모르겠지만, 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겠다는 존재가 하찮은 인간한테 왜 그렇게 지대한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눈살을 찌푸린 신라가 한 걸음 나서며 물었다.

“비형랑이라는 자가… 날?”

“그래! 널 섣불리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그때 연구실의 창문들이 요란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바람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세기가 심했다. 게다가 바깥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는 미동도 없었다.

화아악-

회오리가 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안쪽으로 와장창 깨져 들어왔다. 폭풍은 연구실 안을 구석구석 휩쓸었다. 물건들이 이리저리 낙하하며 천재지변을 방불케 했다.

“읏-”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한 신라의 몸이 단단한 가슴팍에 부딪혀 멈췄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던 신후는 그녀를 품에 가둔 채 모두의 주위로 어둠의 장막을 쳤다. 어떤 빛도, 소음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공간 안에서 기회를 보기를 잠시, 조용해진 것을 확인하고 다시 나와 보니 의지에 묶여 있던 미명귀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건우가 먼저 다가가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자세히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이 몸에서 사라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처리한 모양이군. 몸의 주인이었던 영혼이 매개체에서 빠져나오면서 그 충격으로 미명귀의 혼은 산산조각이 났을 거야. 혼의 매개체는 그걸 만든 이만이 개폐할 수 있으니… 직접 왔다 갔겠군.”

신후의 말에 그들은 심각해진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적의 수장이 코앞까지 다가왔었다는 사실은 충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명귀 말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신라가 깊이 연관된 모양이에요.”

우선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누구보다 심각하게 굳어 있던 건우가 신라에게 다가가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너, 비형랑과 마주친 적 있어?”

“…아뇨, 모르겠어요.”

“자세히 기억해내! 정말 수상한 놈이랑 마주친 적 없는 거야!?”

세게 잡힌 손목이 아픈지 신라의 눈가가 찌푸려지자, 동주가 다가와 건우의 손을 떼어냈다.

“진정해요, 형. 정말 놀란 사람은 당사자일 거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가 애초에 숨어 있는 집단도 아니었고, 어디서든 지켜볼 수는 있었을 거야.”

“제길!”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건우가 연구실을 박차고 나갔다.

신라는 혼란에 휩싸여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일전에 친구인 아영과 함께 노려졌던 건, 단순히 신후의 연구실에 속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게.

“유신라.”

어지러운 생각들을 비집고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신라는 그녀의 턱을 쥐어 드는 남자를 저항 없이 바라봤다.

“당신은… 알고 있었군요. 내가 이 싸움에서 단순한 들러리가 아니라는 거.”

“그놈이라면 너라는 존재에 흥미를 갖고 접근할 수 있다고 짐작은 했어. 이렇게 빨리 발견할 줄은 몰랐지만.”

놈이 빨리 발견한 이유. 인간의 모습으로 이승에 왔어도, 그 존재감마저 숨길 수 없는 사천왕이 신라의 곁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 뻔했기에, 신이 그녀의 주위에 머무른다는 걸 알았을 때 이유를 불문하고 분노부터 차올랐었던 것이다.

그는 신라의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찬찬히 쓸어 넘겼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네가 주목을 받는다면 그만큼 이쪽도 대비를 하면 되니까.”

“…저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나요?”

자조적으로 묻는 그녀에게 신후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신라는 잠시 두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을 했다. 애초에 함께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녀 스스로였다.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을 뿐. 다만 저번처럼 그녀를 지키려다가 다치는 이가 없었으면 했다.

“이제부터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뭐부터 하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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