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설계사
“예 씨 집안의 6대손이 자비로우신 암흑의 귀인(貴人)을 뵙습니다.”
방 한가운데에 내려진 발 너머로 정중하게 예를 갖추려는 중년의 사내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한 어둑시니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때는 공민왕 11년, 호족의 계보를 이은 신진사대부 집안의 병든 여식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일이다. 어둑시니는 예 씨 집안의 장손을 은밀히 불러 큰 값을 치르고 한 인간의 다음 생을 설계하고자 하였다.
“그 여인이 언제 어디에서 환생하든, 영생을 사는 당신은 만나고자 하면 만날 수 있을 터. 굳이 설계하여 확실히 하고자 하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만나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라도 좋다. 그러나 이번 생이 워낙에 박복한 여인이라, 내가 할 수 있는 한 다음 생에 복을 지니고 태어나도록 해주기 위함이다.”
“제 짝을 만나 병들지 않고 오래 살면 되겠습니까.”
“그거면 되었다.”
“사람의 수억 가지 명운들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어 없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나, 이미 정해진 자리에 먼저 줄을 서 놓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라.”
어둑시니는 또한 옷소매 안에 손을 넣어 향갑노리개(*향을 넣어 패용하는 휴대용 노리개) 하나를 꺼냈다. 박쥐 문양의 갑 아래로 봉술을 묶고 있는 검은 매듭이 퍽 특이했다.
“이것을 지녀라. 아마도 내 영생이 다 할 듯하여 나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예 씨 집안에 하사하고 다른 모습이 되어 찾아가도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겠다.”
“어찌하여 영생이 끝나신다는 말씀입니까.”
“신의 뜻을 거슬러 그 영역을 침범하였으니, 저 여인에게 안식을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 또한 반귀로서의 삶을 끝내고 인생의 굴레를 짊어지게 되었다.”
다가와 발아래로 노리개를 건네받는 설계사의 눈빛이 사뭇 가라앉았다.
“저희 집안에 드물게 찾아오신 귀인의 증표를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겠나이다.”
설계사가 멀어지자 그가 쥐고 있는 노리개의 봉술 매듭이 흑색에서 백색으로 천천히 변했다.
이튿날 밤, 설계사 집안의 몸종이 서찰을 들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청년은 주인이 시킨 대로 인기척 없는 오두막 평상 위에 서찰을 올려두었다.
청년은 그대로 돌아가려다가, 서찰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어째서인지 글을 읽어 내리는 청년의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 그는 품에서 새 종이와 붓을 꺼내 그 글을 비슷하게 적어 내렸다. 하지만 내용은 완전히 똑같지 않았다.
청년이 쓰는 붓 통은, 호족 집안의 여인이 은애하던 이야기꾼 사내가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
어둑해진 저녁, 신후는 교수실 창가에 기대서서 묵묵히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밤중에도 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위해 도서관의 불은 환히 켜져 있었다.
- 존재할 수 없는 연월일시입니다.
그는 아까 전 설계사 예진구와 은밀히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시켰다.
- 유신라가…?
- 귀력의 화수분은 대대로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렇게 굴레에서 벗어난 인생은 처음 봅니다.
- 어째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 알 수 없습니다. 수억 가지 인생의 굴레가 엉키지 않고 굴러가기 위해서는 죽음과 환생의 때가 정확히 정해져 있어야 하는 것. 그 질서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튕겨져 나온 나머지들이 드물게 있을 수도 있겠지요. 지금의 저 여인은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쉽게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수 있겠군.
- 그렇다고 보여집니다.
질서가 없는 명운이기 때문에 인간임에도 귀력을 내뿜고 귀신을 홀리는 삶을 사는 여인. 신의 허술함으로 벌어진 해프닝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신후는 계속해서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 혹시 유신라 양이 귀인께서 찾던 그 여인이 아닐는지요…?
예진구가 제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신후는 덤덤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 증표를 따로 남기신 모양이군요.
- 눈앞에 있다면 찾지 못할 리 없는 증표지.
신후는 손을 들어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느껴지거든.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고 있는 게….”
그러니 이 시대에 환생한 것은 분명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존재가 생겼다.
“유신라….”
명운의 실타래를 거스르고 눈앞에 나타난 보석 같은 존재는, 그로 하여금 기분 좋은 초조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더이상 이 삶이 맹목(盲目)이 아니게 만들어주었다.
* * *
혜령은 신후와 별개의 용무로 예진구와 학교 근처에서 긴 이야기를 마치고, 짐을 챙기기 위해 연구실로 돌아왔다. 신라는 먼저 그녀의 집에 도착해 쉬고 있을 터였다.
“다 챙겼다.”
쓸데없는 전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조명을 켜지 않고 가방만 들고나오려던 그녀는, 왠지 수상쩍은 기척이 느껴진 것 같아 어두운 연구실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기분 탓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문을 열어 복도로 나섰다. 복도 또한 센서가 오래 작동하지 않아 어둑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가 걸어 나가는 길마다 차례로 등불이 켜졌다.
딸칵… 딸칵… 딸칵…
계단 바로 근처의 센서 등은 고장 난 것인지 켜지지 않았다.
뚜벅… 뚜벅…
아래쪽에서 한 남자가 계단을 밟고 올라왔다. 학생이거나 교직원 중 한 명이리라.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별생각 없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응?’
그런데 이상했다. 남자가 지나쳐 온 센서 등도 켜지지 않아 고장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기척에는 센서가 곧바로 반응한 것이다.
‘뭐지…?’
그녀는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계단을 올라간 남자를 돌아봤다.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어느새 걸음을 멈춘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기척은 사람의 것이 맞았다. 그런데 집중해서 느껴 보니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사람의 것이라기보다 귀기(鬼氣)에 가까웠다.
“이봐요.”
그녀는 경계의 태세를 취하며 남자를 노려봤다. 그러자 남자가 어깨를 움찔대기 시작하더니 곧 킥킥대며 웃었다.
“…너 정체가 뭐야.”
혜령의 질문에 남자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혜령은 혀를 차며 가방을 내던지고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때마침 남자가 돌아서 혜령을 향해 걸어 내려왔다.
코웃음을 친 혜령은 남자의 가슴팍을 발로 내리찍어 넘어뜨린 다음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주먹으로 내리쳐 충격을 줬다. 빙의했던 육체에서 빠져나가고도 남을 강력한 부적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으….”
남자의 입이 벌어지며 신음을 흘렸다. 혜령은 천천히 그의 몸에서 내려와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턱-!
그때 남자의 두 손이 혜령의 양손을 불시에 그러쥐었다. 사람의 것이 아닌 악력이 가느다란 손목을 부러뜨릴 듯이 쥐어짰다.
“무슨…!”
“방심하면 안 되지. 난 아직 ‘여기’ 있거든.”
“어떻게!”
미명귀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거꾸로 혜령을 자신의 아래에 넘어뜨리고 짓눌렀다. 손과 함께 목이 세게 졸린 혜령이 괴로운 신음을 뱉어냈다.
“윽… 너…!”
“큭큭! 아무리 영력이 강해도 인간은 이 수준이로군. 가지고 놀기 재미있겠어.”
“귀…태?”
“아아, 내가 가장 혐오하는 단어를 뱉어버렸군. 유감이지만 아니야.”
미명귀는 더럽게 입술을 핥으며 혜령을 제압하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거렸다.
“아아, 오랜만이야. 여자의 몸을 만지는 건 이런 감각이었어.”
“더러운 손 당장 떼…!”
“이제야 이 몸을 얻은 보람이 느껴지는군…. 큭큭! 이 즐거움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어버렸으니까.”
혜령의 목을 움켜쥔 미명귀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숨이 턱 막혀버린 혜령에게서 발버둥이 점차 느릿해졌다.
그때였다. 혜령을 짓누르고 있는 미명귀의 뒤로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퍼억-!
그가 사정없이 휘두른 의자 다리에 머리를 맞은 미명귀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크윽…!”
“그럼 또 죽으면 되겠군.”
위기의 순간 나타난 건 다름 아닌 동주였다. 뒤따라 달려온 우선은 곤란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상황도 상황이지만, 불의를 보면 눈이 돌아가 버리는 동주의 스위치가 이번에 제대로 켜진 모양이었으니까.
“아니, 아예 갈기갈기 짓뭉개 없애주지.”
동주가 미명귀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채 올렸다. 그리고 계단 아래로 패대기치듯이 내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리석 바닥에 나뒹군 미명귀가 고통을 호소하며 꿈틀거렸다. 그사이 우선이 혜령에게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누나, 괜찮아요?”
“응, 괜찮아. 그보다 어떻게 알았어? 퇴근한 줄 알았는데.”
“왠지 모르게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서 있었어요. 그래서 애꿎은 설계사만 거칠게 대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 뒤로도 촉각을 곤두세워 보니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동주랑 학교 근처를 둘러보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내가 방심했어. 저 자식 요괴 맞지?”
“네. 그런데 육체는 분명 인간이에요. 빙의했다고 하기에는 육체와 혼이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아 보이네요.”
“귀태도 아니라고 했어. 신라 친구 때와 같은 상황 아닐까? 매개체를 써서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 자리를 바꿔치기해버린다는.”
“육신을 아예 빼앗아버렸다…. 그렇다면 골치 아프겠네요.”
즉, 인간 사회에서 보기에 저 사내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는 소리다.
우선은 일단 동주를 말리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히익-!”
동주가 미명귀에게 주먹을 내리꽂기 전, 우선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워낙 센 힘에 우선의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차동주, 정신 차려. 저 몸의 주인은 아무 죄가 없어!”
“육신을 빼앗았다면 고통은 고스란히 느낄 거 아니야. 놔.”
“멍청아, 또 경찰서 갈래?”
“상관없어. 두들겨 패서 나오게만 할 수 있다면.”
동주를 말리는 우선의 힘이 다해갈 무렵, 또 다른 이가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왔다. 그리고 그 광경을 사뭇 주의 깊게 지켜봤다. 정확히는 동주의 손에 멱살이 잡혀 있는 미명귀를 주의 깊게 바라본 것이었다.
“차동주 조교.”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이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동주의 팔에서 점차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우선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런데 가까이로 걸어온 신후는 딱히 상황을 종료시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끄악-!”
그는 미명귀의 목덜미를 구둣발로 사정없이 지르밟았다.
“이다음부터는 내가 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