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마주침
“크…악….”
붉은 머리의 사내가 건물 옥상 바닥에서 괴롭게 몸부림쳤다. 그는 며칠 전 강 현의 진료실로 찾아왔었던 그 사내였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목덜미를 쥐어뜯었지만, 목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위로 차분하기 그지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통의 몸부림과 비교되어 현실감이 없을 정도였다. 강 현은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가만히 선 채 발아래에서 몸부림치는 몸을 내려다봤다.
“살려… 컥… 줘….”
“인간의 삶을 사는 건 꽤 재미있습니다. 그들의 유기적인 사회, 복잡한 생리, 위계질서, 소속감….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그 수많은 감정이란. 도움을 주기도 하고, 거꾸로 해를 입히기도 하고. 동물에게선 관찰할 수 없는 것들이 수만 가지죠.”
그의 깔끔한 구둣발이 사내의 손가락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으악…!”
“내가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을 온전하게 살다 가지 못한 미명귀(未命鬼)에게 다시 인간의 삶을 살 기회를 준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 잘못했어, 다시는 시키지 않은 짓 하지 않을게, 약속해!”
“내가 그래서 인간을 예뻐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갚을 줄 알아요. 또 고개를 숙여야 할 상대를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복종하죠. 그러니….”
손가락을 짓밟던 구둣발은 사내의 얼굴로 올라가 입술도 사정없이 짓뭉갰다.
“읍-!”
“너도 복종해야 할 상대에게 예를 갖춰. 최소한 인간인 척이라도 해야, 그 육신을 선물한 보람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을 테니까.”
사내, 아니 사내의 몸을 차지한 미명귀는 고통으로 범벅된 얼굴로 서둘러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봤자 강 현의 다리를 붙잡고 바르르 떠는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네가 진짜 인간이라고…? 요괴보다 더 잔혹한 네가?’
미명귀의 눈에 가득 찬 공포를 확인하고서야 강 현은 천천히 구둣발을 떼 바닥을 밟았다.
“아아, 이래서 귀찮은 일을 처리하는 심부름꾼이 필요했던 건데 말이지….”
강 현은 즐거운 표정으로 잠깐 마주쳤던 건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이 퍽 재미있고 가여웠다. 가학심이 서서히 끓어오르자 그의 오른손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의 보석이 푸른색 아지랑이를 피웠다.
“유신라는 건드리지 마십시오. 아직은 지켜보고 싶은 인간이니. 나머지는 상관없습니다.”
눈인사도 없이 옥상 문을 통해 나가는 강 현을 보고, 미명귀는 뒤늦게 두려움에 억눌려 있던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의 살가죽을 매만지며 육신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이미 치아 몇 개는 으스러지고, 입술은 이리저리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젠장…. 저 자식이 몸속의 매개체를 열어버리면 인간의 영혼이 빠져나오면서 내 혼은 산산조각이 나버리겠지. 복종할 수밖에 없는 건가….”
사내는 이를 으득 갈았다. 이 분노를 다른 어딘가에라도 풀고 싶었다.
“유신라만 아니면 된다고 했겠다…. 큭큭….”
한편, 강 현은 옥상에서 내려와 복도를 산책하듯 걸으며 지나다니는 대학생들을 구경했다. 그도 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떠들며 살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그 순수함은 현재도 남아있다고 자부했다.
정장을 입은 멀끔한 사내가 돌아다니니 자연히 학생들의 시선도 그에게 머무르고 갔다. 여학생들은 다급히 귓속말을 하며 그의 정체를 추리하고 나섰다.
그때 주위의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강 현은 복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여러 학생들의 인사를 짧은 고갯짓으로 받으며 걸어오는 이는 비슷한 키와 체격을 갖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귀력이 버무려진 영력이 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 사방에 파동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먼 거리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짧은 눈인사를 했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는 듯싶었다. 그런데 그 찰나 서로의 구둣발 사이로 지갑 하나가 떨어졌다.
신후는 멈춰서 바닥에 떨어진 것을 내려다봤다. 주인인 듯한 사내는 그냥 걸어가고 있었다.
“저기.”
부름을 듣고 강 현의 발이 멈췄다. 그가 돌아보자, 신후는 바닥에서 지갑을 주웠다. 그리고 그를 향해 내밀었다.
“떨어뜨리셨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강 현이 미소를 띤 채 다시 걸어왔다. 그리고 그것을 건네받아 툭툭 먼지를 털어냈다.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퍽 곤란할 뻔했어요.”
“……”
별생각 없이 강 현을 바라보던 신후의 시선에 묘한 관찰의 느낌이 서렸다.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영력이라곤 한 점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의, 어떻게 보면 이렇게 태어나기도 힘든 체질인 것이다. 정반대의 타입인 여인이 한 명 떠올라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시오. 그럼.”
“네. 살펴 가십시오.”
신후가 먼저 돌아서 복도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강 현은 미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반듯하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오,랜,만,이,야.
* * *
다른 이의 시선이 차단된 조용한 룸 카페에서, 혜령은 턱을 괴고 건너편에 앉아 있는 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봤다. 혜령에 비하면 수수한 차림의 여인은 미소를 띤 채 혜령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늘 이곳이었다. 혜령과 여인이 만나는 장소는.
“오늘은 어때?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꾸미고 나왔는데.”
여인은 장난스레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결국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혜령이 행복하게 웃었다.
“날 패셔니스타로 만든 게 너야. 알아? 네가 예쁘다고 해주는 게 좋아서 하나둘 사 입기 시작했단 말이야.”
‘알아’.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품에서 어딘가에서 꺾어 온 듯한 꽃 한 송이를 건넸다.
“색깔 예쁘다. 나한테 어울려서 따 온 거지?”
혜령은 그것을 받아 귀 뒤에 살짝 꽂아보았다. 곱슬한 단발 위로 꽃잎이 얹어지니 꽤 볼만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혜령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가방을 챙겼다.
“그럼 이만 가볼게. 더 땡땡이치면 교수님이 월급 깎는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혜령은 방을 나서기 전 여인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여인은 그 자리에 얌전히 앉은 채로 혜령에게 손을 흔들며 밝게 인사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 * *
사학과에는 몇 안 되는 유명인사가 있었다. 왜 저 얼굴로 교수를 할까, 하는 의문의 눈초리를 한가득 받는 한신후를 시작으로, 왜 저 얼굴로 연구실에 처박혀 있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내는 잘생긴 조교들까지. 모두 고고학 연구실에 모여 있다는 것은 사학과를 넘어 캠퍼스 전체의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학생들이 제기하는 의견 중 그나마 가능성이 유력한 것은, 한신후라는 사내의 근처에 감히 머무를 수 있으려면 그 정도 외모 수준은 되어야 아우라를 견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조교님!”
“안녕하세요~”
그중에서도 단연 인기가 좋은 것은 고고학 연구실의 랩장을 맡고 있는 민우선 조교였다.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학생들의 반응을 보면 자명한 일이었다. 한신후 교수가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라면, 우선은 자상함의 대명사이자 사학과의 미소 천사, 혹은 어머니 같은 이미지였다. 덕분에 덩달아 주목을 받게 된 동주도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로 뭇 여심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안녕. 중간고사 잘 봤어?”
우선의 물음에 학생들은 울상을 지었다.
“너무해요~ 그런 건 물어보지 마세요~”
“하하, 이미 아는걸?”
“조교님 미워요~”
“괜찮아, 열심히 해서 기말고사 잘 보면 되지. 화이팅 해~”
“네~!”
학생들을 보내고, 우선과 동주는 연구실을 향해 걸었다. 동주가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우선을 힐끔 쳐다봤다.
“사학과 애들 고고학 성적 좋은 이유가 한신후 교수 때문이 아니라 민우선 조교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실없는 소리 하지 마.”
“그렇게 얘기하면 나라도 공부 열심히 하겠다. 큭큭. 그렇게 자상해서 하루가 멀다고 날아오는 러브레터들은 어떻게 거절했데.”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둘러대면 상처를 덜 받는 것 같더라고.”
“아이고, 배려심 깊어라.”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다 보니 연구실에 다다랐다. 우선이 웃음의 여운이 남은 얼굴로 문고리를 열었다.
“…!”
누군가 보았다면 백팔십도 돌변한 그의 인상에 경악했을지도 모른다. 천사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 차며, 달려드는 수상한 기척을 제압하고 팔을 뒤로 꺾어 벽에 짓눌렀다.
쿵-!
동주가 미처 따라서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하, 항복… 항복!”
“셋 셀 동안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한동안 정상적인 생활은 힘들게 될 거야.”
“장난이야, 장난이라고!”
허탈한 웃음을 흘린 동주가 우선의 손을 붙잡아 말렸다.
“우선아, 아무래도 손님인 모양이다.”
“…손님?”
의뭉스러운 시선을 동주 너머로 보낸 우선은,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있는 신후와 건우를 발견하고 떨떠름하게 정체불명의 사내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역시 우리의 랩장이야. 믿음직스럽구먼.”
건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박수를 쳤다.
“아야야, 아야….”
팔을 매만지며 엄살을 피우는 사내는 꽤나 요란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페도라 아래로 삐쳐 있는 금발의 머리칼, 옅은 그레이 컬러의 똑 정장과 색깔을 맞춘 듯한 깔끔한 단화까지. 그는 눈물이 삐죽 고여 있는 눈으로 뒤늦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예진구라고 합니다.”
“예진구? 예 씨라면….”
곰곰이 생각하던 동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아, 그‘설계사’ 집안 예 씨?”
알아주는 이가 있자 남자는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다시 배꼽 인사를 했다.
“예, 소인이 바로 대대로 인생의 명운을 점치고 설계하는 예 씨 집안의 27대손 예진구이올시다.”
그는 다름 아닌 신후의 손님이었다. 예 씨 집안은 대대로 수집해 내려온 방대한 자료들로 인간의 명운에 대한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으며, 나아가 환생하는 삶의 조건들- 태어나는 장소, 연월일시, 길흉화복 등을 세부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설계사’로 불렸다.
“설계사가 우리 연구실에는 웬일이죠?”
우선이 물었다. 예진구가 신후를 정중히 가리키며 답했다.
“여기 계신 한 교수님이 저희 집안 대대로 VIP 고객이시기 때문에 몸소 출장을 나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교수님이…?”
그때 연구실의 문이 열리고 혜령이 걸어 들어왔다. 미녀를 보자마자 또 한 번 표정이 확 핀 예진구가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다가갔다.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우선에게 당한 것처럼 똑같은 포즈로 벽에 짓눌려야 했지만 말이다.
“으악-! 항복, 하, 항복!”
“뭐야, 이 금발 변태는.”
설계사 집안이긴 하나 영력이 거의 없는 축에 속하는 예진구는 조교들의 신체 능력에 비하면 거의 어린아이 수준이었다. 그가 울먹이며 고통을 호소해서야 혜령은 선심 쓰듯 그의 팔을 놔 주었다.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오후 수업을 마친 신라가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왔다. 그동안 방정맞은 분위기를 풀풀 풍기던 예진구의 눈이 신라의 모습을 담자마자 진지하게 바뀌었다.
“오호….”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한 연구실 풍경에 어색한 모습으로 멈춰선 신라는, 그녀를 수상쩍게 바라보는 낯선 남자를 물끄러미 마주 봤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신후가 멀찍이서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