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장. 불안
- 꺼내줘… 날 꺼내줘….
- 네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나는 알고 있지….
-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걸 빼앗아버려도 돼?
꿈과 현실의 경계에는 늘 ‘그것’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부쩍 늘어난 잠은 아마도 의식을 갉아먹으려는 속셈을 가진 존재들이 꾀한 것이리라.
연구실에서 준 약 덕에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일은 드물었지만, 괴롭히는 목소리들은 더 늘어났다. 특히 지난번 아영이 혼의 매개체에 유혹을 당했던 사건 이후로 정도가 심해졌다.
- 귀력을 주지 않으면 네 친구를 내가 먹어버리겠어!
- 꺼내줘… 꺼내줘!
- 꺼내줘-!!
“헉…!”
몸을 마구 흔드는 감각에 신라는 숨을 집어삼키며 현실로 돌아왔다.
“신라! 괜찮아? 땀범벅이잖아!”
사학과 친구 서영이었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교양 과목 강의를 함께 듣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잤어?”
“20분 정도? 엄청 피곤한 것 같길래 놔뒀더니….”
“…화장실 좀 다녀올게.”
신라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급히 강의실 뒷문으로 나갔다. 화장실 구석 칸에 들어가자마자 문도 잠그지 못하고 토악질을 했다.
“허억, 허억….”
이럴 것 같아서 혜령의 집에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기척에 예민한 혜령은 분명히 이런 상태를 눈치챌 것이었기 때문이다. 해결하지 못 할 일을 얘기해서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주말에 거한 생일 파티를 해준 다른 연구실 선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신경쇠약이야….’
그녀는 단순히 자신의 나약함을 탓했다. 입을 말끔히 헹구고 핸드폰의 문자 내역을 뒤졌다.
“연락… 해볼까.”
— 강 현 선생님
아무래도 심리적인 것은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게다가 이 젊은 의사는 ‘빙의’라는 현상이 어느 정도 현실에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눈치였으니까.
‘진료는 앞으로 필요 없다고 먼저 말한 주제에….’
신라는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강의실에 들어가면 답답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그녀는 잠시 건물 바깥으로 나갔다. 제법 따뜻해진 늦봄의 날씨는 산책하기에 딱 좋았다. 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별일 없지? 그 구슬에서는 별다른 걸 알아내지 못했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줘.」
형철이었다. 그때 그렇게 많이 다쳤으면서도 계속해서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게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따지고 보면 형철은 자신 때문에 늘 위험에 처하곤 했다.
어떻게 답장을 보낼지 고민하며 서 있을 때, 그녀의 머리 위로 작은 그림자가 생겼다. 건물 옥상에서 누군가가 팔을 뻗었고, 그 손에는 꽤 커다란 벽돌이 들려 있었다. 정체불명의 인영은 씨익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에서 벽돌을 탁 놓았다.
누군가 신라의 몸을 감싸 힘껏 끌어당겼다.
쿵-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벽돌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반 바퀴 회전하며 휘청하고 만 신라는 깜짝 놀라서 자신을 껴안고 있는 인물을 쳐다봤다. 그 사이 옥상에 서 있던 인영은 혀를 차며 모습을 감췄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서 있어서 상황 판단은 더 늦었다.
“휴…. 위험했네.”
“선…생님?”
그녀답지 않게 벙 쪄버린 얼굴을 보고 강 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많이 놀랐어요?”
“…아….”
“어쩐다. 다칠까 봐 좀 격하게 끌어당겼더니 더 놀란 모양이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올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겠군요.”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신라는 일단 강 현의 팔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벽돌이 떨어진 옥상을 올려다봤다.
“공사 중인 것 같더니… 큰일 날 뻔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런데 선생님이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신라는 이 상황에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이 학교 심리 상담센터에 아는 분이 있어서요. 같이 점심 한 끼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그랬구나….”
멍하니 대답하는 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 현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신라의 턱을 살짝 쥔 채로 상태를 살폈다.
“잠시 내 눈 좀 쳐다볼래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방금 일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던 모양인데. 내 말 맞죠?”
“……”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남자는 진실을 알아챌 것 같아서, 신라는 포기하듯이 시선을 내렸다. 강 현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 얘기라도 들어줄 테니까.”
“아뇨, 그러면 죄송해서.”
“나 대접해준다고 했잖아요. 안 그래도 별거 아닌 걸로 받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이러면 서로 미안할 거 없는 거죠?”
그럼에도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라를 보고 강 현은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리고 내밀었던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가요. 난 학교 카페에서 파는 커피로도 충분하니까.”
사학과 건물 근처의 야외 카페에서 두 사람은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강 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신라의 고민을 들었고, 간간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친구들을 아끼는 마음이 신라 씨의 약점이 된 거군요.”
“무의식적으로 겁이 나나 봐요.”
“그 존재들이 정말 친구들에게 해코지를 할 가능성이 있나요?”
“보통 그런 경우는 없다고 들었지만….”
“그런데 왜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불안하고 초조한 거죠? 특별한 이유가 더 있나요?”
“……”
“‘왜’는 중요한 물음이에요. 반복해서 물을수록 더 깊은 곳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거든요.”
“…최근에 다소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됐어요. 내가 다치거나 어떻게 되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영향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까지 끼칠 수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어요. 한 번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안심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는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방금 한 말에 해답이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신라가 시선을 들고 강 현을 쳐다봤다. 그가 평소와 달리 다소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신라 씨가 다치거나 어떻게 되는 게 상관없는 일이죠?”
“…그건….”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아니요, 인간은 어떻게든 위험을 피하며 살아가는 생물이에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굴복하는 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죠. 자신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니까 위험한 일에 뛰어들게 되고, 주변 사람들도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제 말이 틀려요?”
“……”
“하아…. 신라 씨.”
강 현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신라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이렇게 현명한 사람이, 왜 모르지? 본인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강 현의 얼굴은 의사가 아니라 정말 친구로서 걱정하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 위험하다는 일, 안 하면 안 되는 겁니까?”
“……”
“돈이든, 장래든, 이유를 말해주면 내가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울게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선생님 말도 맞아요. 제가 제 안전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 하지만 돈이나 장래 때문이 아니에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결론적으로는 그게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길이 될 수도 있고요.”
“……”
쉽게 흔들림이 없는 신라를 바라보며, 강 현은 고민하듯 입가를 매만졌다. 눈은 계속 심각했지만, 손으로 가려진 입가는 서서히 당겨지며 은밀한 미소를 만들었다.
신라는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깊은숨을 토해냈다.
“선생님 덕분에 불안한 게 좀 걷혔어요.”
강 현은 쓰게 웃었다.
“그럼 다행이지만.”
“조언을 못 받아들여서 죄송해요.”
“어쩔 수 없죠. 우려하는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랄 수밖에요.”
희미하게 웃음을 담고 있던 강 현의 표정이, 신라의 뒤로 시선을 옮기자마자 잠시 굳었다. 그의 시선을 쫓아 뒤를 돌아본 신라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실의 조교들이 카페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정말 땡땡이잖아?”
건우가 헤죽거리며 먼저 걸어왔고, 나머지 조교들은 키득거리며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신라는 민망함에 그들과 강 현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데 누구….”
건우가 주춤 멈춰 서자, 강 현은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악수를 건넸다.
“신라 씨 연구실 분들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라 씨 주치의입니다.”
“주치의? 어디가 아픈…”
“그냥 홈닥터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강 현은 신라의 입장을 고려한 듯 자리를 떠날 채비를 했다.
“신라 씨, 얘기 잘 나눴어요. 혹시 문제 생기면 부담 말고 연락 줘요. 알았죠?”
“…네. 감사했습니다.”
“그럼.”
강 현은 마지막으로 건우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그를 지나쳐 카페 계단을 내려갔다. 건우는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잠시 떨떠름하게 쳐다봤다.
“멀끔하게 생긴 게 왠지 모르게 찝찝한 놈일세….”
주문을 마치고 다가온 혜령이 건우의 허리를 쿡 찔렀다.
“윽!”
“뭐가 찝찝해. 너보다 잘 생기면 다 찝찝해?”
“이씨, 그런 소리가 아니거든!”
“좀 잘 생기긴 했더라. 그런데 누구야?”
“홈닥터인지 뭔지래. 쓸데없이 영어를 쓰고 난리야.”
“한국에는 드문 가정의(家庭醫) 개념이니까 그렇지.”
“그렇게 우리말로 하면 되잖아!”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동주와 우선이 음료를 들고 다가왔다. 동주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신라의 앞에 엄지를 들어 보였다.
“중간고사 1등이라고 벌써 땡땡이치는 여유를 부리다니. 멋진 걸, 우리 학부 연구생.”
“선배…!”
신라의 뺨이 금세 달아올랐다. 그녀는 오늘 아침 발표 난 중간고사 결과에서 고고학과 1등을 차지했다. 안 그래도 왠지 민망해서 오전 교양 수업 전 연구실에 들르지 않았었다.
“하아.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아신 거예요?”
신라가 묻자, 우선이 혜령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네가 요새 통 잠을 못 자는 것 같다고 혜령 누나가 걱정했었거든. 네가 듣는 교양 과목 강의실을 슬쩍 들여다봤는데 없길래, 교수님한테 부탁해서 행적 좀 파악해 봤지.”
“아….”
신라는 그가 줬던 귀걸이를 잠시 매만졌다. 혜령이 다가와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네, 괜찮아요.”
“힘든 게 있으면 언제든 털어놔. 네가 겪는 고민들은 우리도 대부분 겪었던 것들이니까. 알았지?”
“감사합니다. 이제 정말 괜찮아요.”
잠이 들지 못하는 걸 혜령이 모를 줄 알았다. 하지만 다 알고도 모른 체해준 것이었다. 신라는 민망하고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걸 보고 혜령은 그저 먹먹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