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생일
토요일 아침, 혜령은 평소와 다른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일어나자마자 허기가 지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 이유는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고소한 냄새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져서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가 봤다.
“어머, 신라. 뭐하니?”
앞치마를 두른 신라가 부엌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신라는 멋쩍게 미소 지으며 혜령을 돌아봤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깨셨죠.”
“아니, 원래 일어날 시간이긴 한데…. 뭐 하는 거야? 아침 하는 거야?”
“네.”
식탁 위에는 이미 계란말이, 감자조림, 나물무침 등등이 올라와 있었고, 마지막으로 가스 불에 데우고 있는 것은 미역국이었다. 혜령은 가슴이 찡해져서 입가를 가렸다.
“뭐야, 이 이벤트는? 너무너무 껴안고 싶은데 일단 참을게.”
그녀가 미역국의 간을 보는 동안, 신라는 앞치마를 풀면서 말했다.
“1년에 한 번 하는 거라서, 입에 안 맞으실지도 몰라요.”
“1년에 한 번? 누구 생일이야?”
“제 생일이요.”
챙그랑-
혜령의 손에서 떨어진 숟가락이 부엌 바닥을 뒹굴었다. 그것을 줍기 위해 신라가 허리를 숙이자, 혜령이 그녀의 두 팔을 붙잡아 다시 세웠다.
“…나가자.”
“네?”
서둘러 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들고나온 혜령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핸드폰 너머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주말 아침부터 왜 전화를-」
“오늘 다 집합이야.”
「뭐!?」
건우가 무언가 더 말하기 전, 혜령은 가차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신라를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독촉에 얼결에 외출 준비를 하게 된 신라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에야 의중을 물을 수 있었다.
“선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어디긴, 생일이라며! 생일은 무조건 시끌벅적해야 하는 거야.”
“전 괜찮은…”
“이 언니만 믿고 따라와!”
현관문을 열자 따사로운 햇살이 기분 좋게 온몸을 감싸 왔다. 난처한 기분이 단번에 날아가 버릴 정도로 좋았다. 결국 신라도 미소를 내 짓고 말았다.
두 사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런데 들떠 있던 혜령의 표정이 무언가를 보고 갑자기 식어버렸다.
“아아, 그럼 그렇지.”
그녀의 집 대문 앞에 잘 빠진 외제 차 한 대가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에게 모두 익숙한 차종이 말이다.
곧 운전석의 문이 열리고, 차보다 더 잘 빠진 남자가 땅을 딛고 나왔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깃 사이에 걸며 혜령에게 살짝 턱짓했다.
“이다음부터는 내가 맡지.”
혜령은 진심으로 배알이 꼴린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뺏어가지 마시죠?”
“왜 당연하지 않지? 이쪽이 엄연히 보호자인데.”
“지금 직접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더라?”
“박 조교. 지금 나와 설전을 펼쳐보겠다는 소리지?”
신후가 제법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혜령에게 다가섰다. 구두도 높은 걸 신었겠다, 혜령도 지지 않고 신후에게 고개를 쳐들었다.
“못 할 것도 없죠. 아무리 지도 교수님이라도 데이트 찬스를 가로채시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거 아닌가요?”
“데이트는 제자리를 찾아가서 하도록 해. 내가 애써서 묶어준 인연인데 그쪽에 소홀한 걸 보니 퍽 유감이군.”
“제 연애 사업은 제가 알아서 하거든요?”
보다 못한 신라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두 분 같이 가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신후와 혜령이 동시에 대답했다.
“싫어.”
할 말을 잃은 신라는 그저 한숨을 쉬었다.
신후가 제안했다.
“누구를 따라갈지 주인공에게 직접 고르라고 하지.”
혜령이 격하게 반겼다.
“좋네요! 신라야, 언니 따라…”
그때 신후의 눈동자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휘몰아쳤다. 주변의 사람과 사물이 모두 느리게 흘러가는 착각이 들었다. 오로지 그만이 역동적으로 빛나고,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홀린 듯이 앞으로 걸어간 신라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키스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깜짝 놀라 물러섰다. 신후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더 멀어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답이 나온 것 같군.”
신라의 못마땅한 눈빛을 보고 신후는 어깨만 으쓱했다.
“매력 어필이 한 번에 먹힐 줄은 몰랐지.”
“매력이 아니라 요력 아닌가요?”
“그건 중요치 않아. 네가 나한테 홀렸다는 게 중요하지.”
“빠져나왔거든요?”
“아닐걸.”
신후는 차의 조수석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신라에게 고갯짓했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속 남주인공 같아서 신라는 살짝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주술 후유증이야, 후유증….’
그녀는 속으로 열심히 되뇌며 조수석으로 걸어갔다.
그 사이, 본인도 한신후에게 홀릴 뻔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있던 혜령이 소리쳤다.
“이 변태 옴므파탈! 이건 반칙이죠!”
조수석에 앉은 신라는 때마침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신라야, 오늘 생일이지? 와서 커피 마시고 가.」
준호였다. 피식 웃은 신라는 두 사람에게 그 문자를 들어 보였다.
“약속이… 또 생겼어요.”
“……”
곧장 뭐 씹은 표정이 되어버린 신후를 보고, 혜령은 꼬신 듯이 입가를 가렸다.
신후가 운전하는 차로 준호의 카페에 들른 신라는 십여 분 뒤에 테이크아웃 잔을 양손에 들고나왔다. 조수석에 타자마자 커피를 건네는 그녀를 보고 신후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 거야?”
“커피 맛이 좋다면서요. 자요.”
“……”
신후는 일단 별말 없이 컵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반도 채 넘기지 못하고 도로 뱉었지만 말이다. 신라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그를 돌아봤다.
“왜 그러세요?”
“아니. 뜨거워서.”
“…그거 아이스인데요.”
유치한 신 같으니, 커피에 소금을 잔뜩 탄 모양이다. 신후는 한숨을 내뱉으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딱 점심 먹을 시간이군. 약속한 대로 근사한 데 가서 대접하지.”
“근사한 데에 가기에는 너무 준비 없이 나왔는데요?”
신후가 입꼬리를 작게 당기며 그녀를 돌아봤다.
“네가 너무 준비하면 내가 긴장하게 되니까 지금이 딱 좋아.”
“……”
그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신라의 안전벨트를 잡아당겼다. 남자다운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와, 자기도 모르게 그와 눈을 마주친 신라였다. 그 자세에서 잠시 멈춘 신후가 그녀의 얼굴 곳곳에 시선을 뿌렸다.
“선글라스는 왜 그렇게 자주 쓰시는 거예요?”
“눈부셔서.”
“남들보다 많이요?”
“응.”
신후는 그대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학교 근처라 보는 눈이 있을 수도 있는데요.”
“우리가 뭐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주말에 학교도 아닌 곳에 둘만 따로 있는 것부터가 충분히 수상해요.”
“주말에 외근시켰다고 할게.” 피식 웃은 신후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그리고 그 정도 인기척 정도는 파악할 수 있어.”
“…어련하시겠어요.”
차가 매끄럽게 차도로 진입했다. 신라는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살짝 팔을 걸쳤다. 바깥 풍경을 둘러보는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삼십여 분을 달려서야 차는 도심의 한 건물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곳은 딱 봐도 상류층들이 찾을 것 같은 느낌의 고급스러운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신후는 능숙하게 신라를 에스코트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자를 빼 그녀를 먼저 앉혔다. 신라는 직원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재빠르게 정독했다.
‘와….’
다른 나라에 와 있나 싶은 의심이 들 정도로 가격의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그녀는 아연실색해져서 건너편에 앉는 신후에게 속삭였다.
“우리 나가요.”
“왜?”
“음식 하나 가격이 한 달 치 과외 값이라니. 이건 낭비예요.”
“낭비라….”
신후는 직원에게 잠시 후 와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리고 신라에게 말했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 알지?”
“…네.”
“사람은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돌아간다…. 지난 세 번의 생 동안 깨달았지. 아무리 모아 봤자 그걸 다음 생으로 가지고 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그가 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죽기 전에 다 써야지.”
반박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말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한신후가 죽는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기도 했다. 솔직히 마지막 생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을 때가 많았다.
“농담이야.”
“……”
세월이 녹아든 언변에 신라가 넋을 놓은 사이 신후는 알아서 음식 주문을 넣었다.
레스토랑은 내부 인테리어와 분위기도 고급스러웠지만, 창가 너머로 보이는 풍경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도시의 중심가와 그 뒤로 멀찍이 산등성이가 굽이치는 절경이 어우러져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생일 축하해.”
꽤나 기습적인 말이었다. 신라가 멍하니 신후를 돌아봤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
그 뒤로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간간이 시선은 마주쳤다. 음식이 나오고부터는 조용히 음식만 먹었다. 불편해할 자신을 배려해주는 걸까 싶어서 신라는 먼저 입을 열었다.
“맛있네요.”
“얼마든지 더 시켜. 이걸로는 내 재산에 기별도 안 가니까.”
“남으면 죽기 전에 기부하고 가시면 되잖아요.”
“생각해볼게.”
신라는 피식 웃었다. 그녀가 웃는 걸 보고 신후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네 생일이잖아.”
“제 생일인데 왜 교수님이 기분 좋으세요?”
“네가 이날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거나 다름없으니까. 특별한 날이지.”
“……”
특이하기 그지없는 연월일시를 타고 난 탓에 귀력의 화수분이 되었고, 그로 인해 퇴마사로 일하는 그를 만나게 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신라는 기분이 묘해져서 잠시 포크를 멈췄다.
“왜 그래?”
“…기분이 이상해서요.”
“어떻게?”
신후도 손을 멈추고 신라의 말에 더 집중했다.
“그냥…. 여태까지는 내가 이런 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졌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예를 들면?”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귀신이 들러붙고…. 외롭게 혼자 살아가게 되고.”
“……”
“그런데 특별히 이날에 태어난 걸 축하받은 건 처음이라서…. 그래서.”
시선을 테이블 위에 두고 한참을 생각하던 신라는, 먼저 멈췄던 포크를 움직였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기분이지만, 감정이 일렁거리는 것은 확실했다. 이 남자는 늘 그렇다. 한마디 말로도 사람의 생각을 흔들어 놓는다.
신라가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후가 말했다.
“미안해. 네가 생일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줄 몰랐어. 너무 내 감정만 앞세운 것 같군.”
“아,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기분이 묘할 뿐이죠.”
“앞으로는 그런 기분 들지 않아도 돼. 축하해야 마땅하고 축하하지 말아야 마땅한 생일이란 건 없으니까.”
“…교수님은 생일이 언제예요?”
“1월. 한창 추울 무렵이지.”
“부모님들은 어디 계시나요?”
“양친 다 안 계셔.”
신라가 아차 싶어 당황해하는 얼굴을 보고 신후가 작게 웃었다.
“왜 이렇게 놀라? 같은 처지끼리.”
“어쩌다가….”
“귀태의 힘을 지닌 인간을 잉태하려면 부모도 어느 정도 영력이 있지 않으면 안 돼.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태어난 걸 알아버린 부모님들은 차츰 날 자식보다 더 먼 존재로 여기게 됐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평범하게 만들 방법을 찾으러 다니다가, 산속에서 잡귀에게 홀려서 실족사하셨어.”
“……”
“좋은 부모님이셨어. 내 정체를 알고도 끝까지 보듬어 안으려고 노력하셨던 분들이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네 번의 생 중 처음으로 진정한 슬픔(悲)이 느껴졌어.”
신라가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던가요. 그 감정은.”
“…괴롭더군.”
신후는 그때를 회상하듯 창가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요괴의 감정과는 확실히 다르지. 마치 세상이 반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상실감이었거든. 보내고 싶지 않은 미련, 세상에 나 홀로 된 것만 같은 끝없는 고독…. 어쩌면 인간에게 몇 가지의 감정들은 선물이 아니라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갖게 되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
그의 희미한 미소에는 이미 그만의 답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이미 인간과 귀신의 감정 모두를 지니고 있었던 남자다. 오히려 신라는 궁금했다. 오랜 세월을 반귀로 살아왔던 그가, 왜 요괴가 아닌 인간의 감정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인생의 굴레에 들어와 보니, 귀신이었을 때 느꼈던 인간의 감정이 다르게 느껴지던가요?”
“정확히는 부딪쳐 오는 상황과 인연들이.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고, 그래서 유기적이고 무엇이든 다발적이야. 한 가지 감정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신체로 곧장 반응이 나타나게 되지. 뇌가 심장을 때리면, 말초 신경까지 그 감정에 전이되니까.”
“신이 당신에게 인간으로서 속죄의 삶을 살도록 만든 건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문득 궁금해졌다. 이 남자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만들고, 기나긴 인간의 삶을 시작하게 만든 여인이 어떤 사람일지.
“제가 느끼기에는….”
신라가 운을 뗐다. 신후의 시선은 오롯이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당신이 모든 감정을 되찾는 일이 후회로 끝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결과가 어찌 됐든….”
이미 천 년이 넘는 시간을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홀로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때문에 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건, 당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일 거라고 생각해요.”
신후는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했던 때가 떠올랐다. 아주 잠깐 곁에 머물렀던, 낳아준 모친이 있었다. 그녀는 정이 많은 인간이었고, 그래서 아들에게 그 감정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왜 이런 다루기 힘든 것을 주려고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 그 기억은 바래지고 또 바래졌고, 어느새 그저 맹목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말, 겨울이 되면 또 해주겠어?”
“네?”
“듣기 좋아서.”
신후가 미소 지었다. 진심으로 행복해서 우러나온 듯한 웃음에는 어쩐지 그리움과 애잔함도 잔뜩 묻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까마득한 추억에 잠겨 있는 신후를, 신라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