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장. 비형랑(鼻荊郞) (20/126)

19장. 비형랑(鼻荊郞)

다음 날 이른 아침, 형철과 아영이 함께 신라의 집에 찾아왔다. 문이 두드려지는 소리에 일어난 신라는 먼저 방 안을 둘러봤다. 밤새 창가에 기대서서 생각에 잠긴 듯이 바깥을 바라보던 남자는, 찻잔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갔다. 아직 김이 나는 걸 보면 떠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울음을 왈칵 터뜨린 아영이 신라를 끌어안았다. 신라는 힘없이 웃으며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신라와 눈이 마주친 형철도 웃음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네가 구원이었다는 거 사실이야. 늘 혼자 다녀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날 끌어당겨 준 건 너뿐이었어.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고 해야 하나….”

멋쩍은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며 말하는 신라였지만, 아영은 충분히 감동받았는지 또 서러운 눈물을 쏟았다. 눈이 퉁퉁 부은 모습을 보고 형철이 ‘이러다 울보 귀신 나오겠다’라고 하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분노의 주먹을 날렸지만 말이다.

신라가 연구실로 출근할 준비를 마치고, 세 사람은 함께 빌라에서 나왔다. 그런데 웬 이질적인 외제 차 한 대가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진한 레드 컬러 세단의 운전석 문을 열고 걸어 나온 인물은 모델같이 죽죽 뻗은 몸매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신라의 앞으로 걸어와 찡긋 윙크해 보였다.

“좋은 아침~ 잘 잤어?”

“혜령 선배….”

혜령은 신라 뒤에 서 있는 두 명을 보고 추리하듯 말했다.

“저 남정네는 분명 조연사의 꼬맹이일 거고.”

“꼬, 꼬맹이라니…!”

“옆에는 어제 호되게 당했다는 그 친구겠군? 다들 많이 다치지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이네. 물론, 다치진 않아도 영혼이 통째로 먹혀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생글거리며 말하지만, 내용은 간담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아영은 사색이 되어 슬금슬금 형철의 뒤로 숨었다.

“데리러… 오신 건가요?”

신라의 물음에 혜령은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어서 타. 짐은 나중에 가지러 오고, 일단은 출근부터 하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신후를 비롯한 모든 조교들이 연구실에 모여 있었다. 신후의 옷차림이 어제와 같은 것을 보고 신라는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췌한 몰골은 아니었다. 오히려 묘하게 색기가 더 흘렀다.

‘누가 옴므파탈 어둑시니 아니랄까 봐….’

“신라, 괜찮아?”

우선과 동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신라에게 다가왔다. 뒤에 서 있던 건우는 괜히 툴툴거렸다.

“그러게, 수상한 곳에 왜 혼자 쳐들어가서 혼쭐이 나? 하여간 겁도 없다니- 아야야!”

혜령에게 구레나룻을 꼬집혀 금방 입을 다물었지만 말이다.

우선이 진중한 표정으로 신라에게 말했다.

“건우 형 말이 틀린 건 아니야, 신라야. 앞으로는 모든 걸 우리와 공유하고 도움을 청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잘못되면, 우리는 널 돕다가 다치는 것보다 더 절망적일 테니까.”

“죄송해요, 선배. 앞으로는 꼭 그렇게 할게요.”

동주가 신라의 머리를 장난스레 헤집었다.

“짜식, 그래도 혼의 매개체를 혼자서 빼냈다며? 꽤 어려운 해법인데 용케 해냈네.”

“온 힘을 다 썼어요…. 도대체 누가 그런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는 건가요?”

벽에 기대 서 있던 신후가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영혼이 드나들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드는 건 금지된 술법이었어. 그걸 일반인에게 통용시키는 건 더더욱. 영력이 없는 일반인은 귀신의 혼을 감당하기 힘들거든.”

신라가 물었다.

“어제처럼 몸에서 그 매개체를 빼내 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네가 그 친구를 빨리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좀 더 오래 뒀으면 다시는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주인이 바뀐 껍데기만 남았을 테니.”

“귀신의 혼이… 그 몸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인가요?”

“혼의 매개체는 귀신의 혼뿐만 아니라 인간의 혼도 가둘 수가 있어. 인간이 그 매개체를 삼키면 귀신은 자신의 힘을 빌려주는 척하다가, 서서히 인간의 혼과 자신의 혼을 바꿔치기할 거야. 그러면 거꾸로 매개체에는 인간의 혼이 갇히게 되고 그 몸의 주인은 뒤바뀌게 돼. 본인 힘으로 그 매개체를 뚫고 나오지 못하는 이상 방법은 거의 없어.”

“결국 인간의 몸을 뺏어서 귀신들에게 주려는 속셈이었군요.”

“놀랍지는 않아. 금지된 걸 가장 즐겨 하던 놈이었으니까.”

건우가 퇴귀록을 가져와 접힌 장을 펼쳐 탁자 위에 내려놨다. 신라는 탁자 근처로 다가가 그가 가리키는 그림을 내려다봤다. 삼국 시대 의복으로 보이는 새하얀 옷을 입은 고상한 느낌의 사내가 화폭에 담겨 있었다.

“그 이름은 비형랑. 귀신의 아들로 태어나 속세를 어지럽히다, 어둑시니에게 죽임을 당해 천 년 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리고 얼마 전 탈출을 한 모양이야. 신의 약점을 쥔 채로.”

“신의 약점이요?”

“감추고 싶은 과오 같은 거겠지. 누구도 찾지 못하도록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걸 갖고 있는 자도 찾을 수가 없는 거야. 그 뒤에 교묘히 숨어서 우리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 거고. 골치 아프게 됐어.”

“그럼 저희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거죠?”

“이제부터 단서를 모아야지. 일단은 도망친 혼으로 환생을 한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 그래야 확실히 숨을 수 있으니까. 기회를 엿보다가 때가 되자 세력을 키우고 있는 걸 거야. 원래 혼자서 직접 행동하는 건 싫어하는 놈이거든.”

“단서를 모은다…. 긴 싸움이 되겠군요.”

혜령이 다가와 신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걱정 마, 신라. 비형랑이든 뭐든, 넌 이 언니가 지켜줄 테니까. 언니 믿지?”

“감사합니다. 저도 얼른 강해질게요. 선배들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으유, 이 예쁜 것.”

대견한 듯 바라보는 건 다른 조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노을이 질 무렵 조교들은 차례로 퇴근할 준비를 했다. 짐을 옮겨야 하는 신라와 혜령은 먼저 퇴근했고, 건우는 신후와 교수실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가방을 챙기고 있는 우선의 뒤로 동주가 다가왔다.

“우선아, 같이 가자.”

“그래.”

집 가는 길이 비슷한 그들은 평소에도 출퇴근 메이트였다. 정확히는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에 살았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신이 특별히 두 사람의 인연을 묶어놓은 것이었다.

골목길 담벼락 아래를 터덜터덜 걸으며, 동주가 입을 열었다.

“이때를 대비해서 모두 가까운 곳에 묶어놓으신 게 아닐까.”

“그러게. 과거에는 우리가 멀리 떨어져 때문에 비형랑 무리를 소탕하는 데 참여하지 못했었으니.”

“건우 형과 교수님이 이겼던 상대면, 우리가 합세하면 더 수월하게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우선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상대가 모습을 완전히 감췄잖아. 우리 쪽 정보도 이미 많이 모아놨을 거야.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돼.”

“내 괴력과 너의 능력이 있으면 결코 쉽게는 못 덤빌걸?”

우선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가, 사뭇 가라앉은 눈빛으로 동주를 돌아봤다.

“정말 각오가 돼 있는 거야?”

“응? 어떤 각오?”

“넌…”

그때 그들이 걸어가던 방향 쪽에서 작은 발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형~!”

“오빠~!”

동주의 어린 동생들이었다. 금방 표정이 활짝 펴진 동주는 당장에 달려가 사랑스러운 동생들을 한 품에 끌어안았다. 그 뒤쪽에는 장을 보고 온 듯한 동주의 모친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우선은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언제나처럼 우선을 향해 자상하게 웃어 주는 그녀였다.

우선은 동주에게 못다 한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동주 넌… 잃으면 안 되는 게 너무나 많잖아.’

* * *

신라는 이불 속에 누워서 어색한 기분으로 천장만 바라봤다. 혜령은 아직 체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신라를 배려해 이부자리를 일찍 마련해 주었다.

혜령의 집은 학교 근처의 주택이었다. 그녀의 성격처럼 선명한 컬러감과 모던한 가구가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정말 바닥에서 자도 괜찮겠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혜령이 신라의 머리맡에 무릎을 접고 앉아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신라는 그녀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원래 바닥도 익숙해요. 예전에 살던 곳에는 침대 자체가 없었거든요.”

“그래도 마음이 불편한데….”

“어차피 잠시 신세 지는 거니까요, 이편이 저도 마음 놓고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다면 하는 수 없지.”

자료를 정리할 게 남은 혜령은 책상에 앉아 스탠드 불빛을 켰다. 신라는 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눈이 저절로 감겨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빨리 체력을 되찾는 게 더 많은 도움이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 선배는 어떻게 해서 고고학 방의 조교가 된 거예요? 두렵지 않았나요?”

혜령이 턱을 괴며 신라를 내려다봤다.

“물론 처음에는 너무 이질적이었지. 요괴의 환생들이라니, 경계심도 많이 생겼고. 하지만 겪어보니까 다들 똑같은 인간이더라. 오히려 더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맞아요…. 선배들은 다 착해요. 건우 선배도, 말은 거칠게 하지만 속정이 많은 게 느껴지거든요.”

“심성이 착한 건 맞아. 가끔 바보 같아서 문제지만.”

“제가 선배들에게 정말 힘이 될 수 있을까요?”

혜령이 따뜻한 미소를 내지었다.

“물론이지. 이미 큰 힘이 되고 있는걸.”

“다행…이다….”

잠시 후 신라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혜령은 잠시 책상에서 내려와 신라의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려주었다.

‘속정이 많은 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우리가 널 좋아하는 거고. 네가 어떻게 해서 돌풍의 핵에 있게 되었든… 반드시 우리가 지켜줄게.’

한층 진지해진 그녀의 눈빛에는 신라를 향한 우려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 * *

진료가 끝난 늦은 시각, 강 현은 아무도 남지 않은 병원에서 홀로 진료 기록들을 정독했다. 전날 휴가를 내서 그런지 환자가 많아서 하루 종일 숨 돌릴 틈도 없는 하루였다.

우우웅, 그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무심한 눈빛으로 문자를 확인한 그의 얼굴에 아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뭇 여성 환자들이 봤다면 얼굴을 붉혔을 만한 화사한 미소였다.

「조언해 주신 대로 빠르게 해결하려고 한 게 큰 도움이 됐어요. 다음에 꼭 대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입가를 매만지며 한참 문자를 들여다보던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답장을 보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9할은 모두 신라 씨 능력일 겁니다. 좋은 밤 돼요.」

그때 소리 없이 진료실의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구둣발에 진흙이 묻은 남자가 조용히 들어섰다. 순식간에 표정에서 감정을 지운 강 현이 그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부르기 전에 오셨군요. 할 말이 따로 있는 겁니까?”

남자는 캡을 벗고 헝클어져 있는 붉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애인이라도 생기셨나, 그렇게 보는 사람 설레게 웃고 있을 겁니까?”

“……”

“어제 짧게 들려준 얘기를 좀 자세히 풀어볼까 해서 찾아온 건데. 필요 없으신가 봐?”

“이미 눈에 빤히 보이는 얘기는 길게 듣는 걸 싫어합니다.”

“난 과정이 즐거운데, 그쪽은 결과주의자시군.”

“막 퇴근하려던 참입니다. 같이 다니기엔 눈에 많이 띄겠죠?”

강 현은 입가를 당기며 정중하게 문 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에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한 붉은 머리 사내는, 중세 시대마냥 과장된 인사를 하더니 휘파람을 불며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진 문가를 바라보던 강 현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과정이라…. 재미있는 관점을 가지고 있네.”

우우웅, 그의 손에 있던 핸드폰이 또 한 번 기분 좋은 진동을 울렸다.

「선생님도 좋은 밤 되세요.」

강 현의 눈꼬리가 또 한 번 길게 접혔다. 그는 쿡쿡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에 편히 기대섰다.

“기분이 괜찮나 보네…. 역시 씩씩해, 유신라 씨.”

핸드폰 액정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한순간 뚝 멈추었다.

“이러면 얼마나 더 씩씩할 수 있는지 궁금해지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