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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분노 (19/126)

18장. 분노

따뜻한 공기, 기분 좋은 진동이 그새 어떤 고초를 겪었었는지 까맣게 잊게 만들었다. 깜빡 잠들었다 깨어난 신라는 옆에서 조용히 운전하고 있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까 그 많은 요괴들을 단번에 쫓아버린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분하고 도시적인 이미지였다.

창밖으로 늦은 벚꽃 비가 내렸다. 아직 살짝 젖어 있는 옷과 바깥의 포근한 풍경이 꽤나 대비되었다.

“화나셨어요?”

신후는 좌회전 차선에 차를 세우고서야 신라를 묘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요.”

“위험한 상황에 날 부르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은 나중에 하도록 하고. 떨림은, 좀 멎었어?”

“제가 계속 떨었나요?”

“자는 내내.”

신라는 무릎을 덮고 있는 신후의 자켓을 내려다봤다. 자는 사이 잠깐잠깐 손등에 온기가 닿아갔던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아영이는, 제 친구는 괜찮을까요?”

“더이상 위험한 데 발 담그지 않는다면.”

“누군가 아영이를 부추겼어요. 영력이 없더라도 일시적으로 귀신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도록 수단도 제공했고요.”

신후도 아까 대나무 숲에서 흩어져 있는 구슬의 파편을 발견했다. 그래서 대략적인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얼굴은, 봤나?”

“아뇨, 기척만.”

“밤이었으면 다다르는 시간이 더 빨랐을 텐데 아깝군. 도시 전체를 암흑으로 물들여버릴 순 없으니까.”

“…그게 가능한가요?”

“선을 지키느냐 마느냐, 선택이지.”

“또 신에게 밉보이려고요?”

“……”

신후는 신라를 한 번 돌아보고는 신호가 바뀐 것을 확인하고 액셀을 밟았다. 고급 외제 차의 바퀴가 큰 소음 없이 매끄럽게 나아갔다.

신라가 사는 빌라 앞에 차가 멈췄을 무렵 그녀는 다시 잠에 빠져 있었다. 신후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혼자 직접 계약의 매개체를 빼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이렇게 녹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손을 뻗어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럼에도 눈만 조금 찡그릴 뿐 깨어나지 못했다.

“하아….”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차에서 내려 신라의 벨트를 풀고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계단을 모두 올라가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갈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정신을 차린 신라가 그의 팔에서 억지로 내려왔다.

“깨우지 그러셨어요….”

신라는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가 전기 포트에 물을 끓였다. 하지만 신후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스스로 차를 우렸다.

“옷은 다 마른 것 같으니 일단 쉬어.”

신라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부재중 전화 목록과 문자를 확인했다. 모두 형철에게서 온 것이었다.

「어디로 간 거야?」

「왜 연락이 없는 거야? 걱정되니까 보자마자 전화 줘.」

「아영이는 집에 잘 데려다줬어. 너한테 많이 미안해하고 있어.」

「무슨 일 있거나 몸이 불편하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연락할 기운이 남지 않은 그녀는 문자로만 답장을 보냈다.

「교수님이 집으로 데려다주셨어. 이제 쉬려고. 오늘 고생했어. 아영이랑은 따로 만나서 얘기해볼게.」

「구슬 파편을 주워서 조사해보려고. 그 교수라는 놈도 완전히 믿지는 마.」

신후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 잔의 차를 들고 와 신라의 옆에 앉았다.

“마셔.”

“…감사합니다.”

신라는 따뜻한 컵을 받아 마시지는 않고 무릎 위에 올려놨다. 이제 와서 한신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알 필요는 있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거죠?”

신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답했다.

“뭘?”

“전 모르고 당했지만, 교수님은 뭔가 알고 있는 눈치 같아서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분노해야 할 상대를 모를 때에는 그렇게 차분할 수 없으니까. 지금 당신 모습은 그 대상을 알고 있는데 꾹 참고 있는 것 같아요. 저번에 요괴들을 구슬리는 배후를 조사한다고 했었죠. 뭔가 찾았나요?”

“……”

“제가 알면 안 되는 문제인가요? 앞으로 저도 연구실 분들과 함께 행동할 텐데.”

“조교들도 아직은 정확한 사실을 몰라.”

신후는 반쯤 남긴 차를 근처의 책상 위에 올려놨다.

“모든 걸 아는 자를 만나고 연구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너에게 준 귀걸이가 네가 귀력을 쓴 걸 알려줬고, 그대로 차를 돌려서 그 산으로 달려간 거야.”

“누군가요?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자가….”

신라가 쥐고 있는 컵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대신 손을 들더니 아직 살짝 젖어 있는 신라의 머리끝을 매만졌다.

“교수님…”

“내가 만약에 이 집을 나오라고 한다면, 그래 줄 건가?”

“왜 그래야 하죠?”

“아무 이유 없이 따라와 주지는 않겠지?”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숨기는 게 분명한데 순순히 따라갈 것 같진 않은데요.”

신후는 낮게 웃었다.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 널 더 끼어들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분명히 혼자서라도 알아내고 쫓아올 테니까.”

“제가 당했어요. 아니, 친구들도 같이요. 알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답답한지 넥타이 끈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든 신후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신라는 그가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감춰야 할 정도로 뚜렷하게 지니고 있는 감정이 분노라는 사실이 유감이었지만 말이다.

“그거 알아?”

그가 웃으며 신라를 돌아봤다. 물론 기분 좋아 내 짓는 웃음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거. 물론 요괴들도 마찬가지야. 하찮은 미물의 사정 따위 신들이 신경 쓸 리 없거든. 더 큰 걸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니까.”

“……”

“그렇게 말해놓고 항상 뒤처리는 소홀해서 꼭 사건이 터지고, 멸시하는 존재들에게 손을 빌리지. 난 그들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오랫동안 봐왔어. 어떻게 다 쓴 걸 버리는지, 교묘하게 끌어들여 다시 희생시키는지.”

“버린다….”

신후의 말을 되뇌며 신라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그의 분노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보면, 이번 일이 꽤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더불어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곧이곧대로 다 들어주지 않아. 멍청하게 싸지른 걸 치워주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게다가….”

그는 신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더이상 순순히 내 걸 뺏기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

두 사람이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 신후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혜령의 전화였다.

「늦으시네요. 혹시 성질 못 죽여서 벌이 가중된 건 아니시죠?」

“솔직히 말해 머지않아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어. 벌써 우리 쪽 사람이 휘말렸거든.”

신후는 그렇게 말하며 신라의 얼굴을 잠깐 쳐다봤다.

「우리 쪽? …설마 신라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혜령의 목소리가 단번에 심각해졌다.

“영력이 없는 친구가 누군가의 부추김에 혼의 매개체를 삼킨 모양이더군. 절제를 못 하고 귀신의 힘을 쓰다가, 거꾸로 당하기 직전에 도착해서 처리했어.”

「하아. 도대체 누가 그런 걸 함부로 일반인한테! 그보다 신라는 괜찮아요? 다친 데는요?」

“무사해.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네가 같이 지내줘야겠어. 내가 데려가고 싶지만, 여러모로 불편해할 것 같으니까 말이야.”

「당연하죠. 저 아니면 누가 지켜주겠어요? 여.러.모.로.」

신후의 눈썹이 살짝 비틀렸다. 하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하겠지만, 우리가 우려했던 게 사실인 모양이다. 다들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신후는 전화를 끊고 신라에게 의중을 묻듯 시선을 보냈다.

“선배한테 실례가 안 된다면 그렇게 할게요.”

신라는 대답함과 동시에 현기증이 돌아 힘없이 눈을 감으며 입가를 가렸다. 신후는 그녀를 천천히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줬다.

“오늘은 그냥 여기에서 쉬도록 해. 내가 있을 테니까.”

신라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그럴 필요는…”

“그럼 데리고 내 집으로 갈까? 그게 훨씬 편하긴 한데.”

“…아뇨. 둘 다 불편한 걸로 하죠.”

신후는 잠시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치고 그 사이로 바깥을 살폈다. 아마도 오늘은 신라의 힘을 시험해본 것일 거다. 해치려고 했으면 근처에서 지켜보는 것에서 끝내지 않았을 테니까.

“강해지고 싶어요.”

신라의 말에 신후가 창가에서 시선을 거뒀다. 신라는 피곤한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적어도 내 주변의 사람들이 허무하게 당하는 일이 없도록요. 그러니까 알려주세요. 적이 누구인지. 함께 싸우고 싶어요.”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해줄 테니까, 일단 눈 좀 붙여.”

“당신이 그렇게 경계하는 걸 보면, 위험한 인물이겠죠?”

신후는 말없이 노을 진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붉게 물든 해가 아주 오래전 처절했던 악전고투를 더욱 선명히 떠올리게 했다.

“같은 귀태로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지. 난 인간을 인간으로 봤지만, 그 녀석에게 인간은 처음부터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도구…. 자기도 반은 인간이면서.”

“반요이기 때문에 요괴의 가학성과 인간의 잔혹함, 모두 가지고 있는 최악의 케이스지.”

신후는 다시 신라에게 다가갔다. 이마를 짚어보니 미열이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분하네요….”

“뭐가?”

“당신은 빼앗긴 걸, 그런 놈은 가지고 있다는 게…. 그런 걸 보면 당신이 말하는 신이란 존재들이… 무능하긴 한가 봐….”

신라는 느릿하게 말을 맺고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결국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내려다보며, 신후는 작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돼.”

그는 고개를 숙여 신라의 이마에서 식은땀을 닦아내 주고 그 위에 입술을 닿을 듯이 가져갔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신도, 친구도 아닌… 내가, 바로 네 유일한 편이니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어둠이 스물스물 빠져나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빌라 바깥에서 얼쩡거리던 잡귀들이 놀라서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날 정도로 강한 기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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