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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덫_下 (18/126)

17장. 덫_下

딸랑, 맑은 차임벨 소리에 초점 없는 두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또 뭐지?”

가게 안쪽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비파를 켜고 있던 준호는 반갑지 않은 인물에게 노골적인 살의를 뿌렸다. 그런 반응에도 신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 들어가 건너편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처음 보는군, 비파를 켜는 모습은.”

“용건만 간단히 해.”

“당신이 이승에 와 있는 이유를 고민해봤어. 단서가 하나둘 쌓이다 보니 오래전에 알았던 이름이 하나 떠오르더라고.”

“……”

“토사구팽…, 요괴로 요괴를 붙잡고 쓸모가 없어지니 버리셨지. 잔인한 신들께서는.”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준호의 비파 소리가 멎었다. 신후는 나지막이 웃었다. 헛다리를 짚은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놓친 거로군. 녀석의 혼을.”

“……”

“언제부터지?”

묵묵히 앉아 있던 준호는, 손을 뻗어 비파의 현을 하나하나 튕겨냈다.

“그저 놓친 거였다면 일이 이렇게 복잡하진 않았을 테지. 그놈은 가져가선 안 될 것을 훔쳐서 달아났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을 가진 혼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도 찾을 수 없는 혼이라…. 그래서 직접 이승으로 내려와 찾고 있는 거였군. 귀력의 화수분을 미끼 삼아서.”

신후의 입술이 의미심장한 호선을 그렸다. 그는 말을 이었다.

“어쩐다. 신의 심기를 건드려 속죄의 삶을 살고 있는 반요 따위가 그런 귀중한 미끼를 낚아채 버렸으니.”

비파를 연주하는 준호에게서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 묵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신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쪽은 우수한 인재를 잃지 않기 위해 그놈을 직접 잡아다 바치면 되는 건가.”

“이번에는 달라. 일반적인 요괴라 여기면 그 자취조차 발견할 수 없을 거야.”

“이승에서 누군가를 찾는 것은 우리 쪽이 더 전문이니까….”

신후는 할 말이 더 남은 얼굴이었지만 입을 다물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에 여유가 사라지고 모종의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준호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버림받았던 개들이 다시 한번 사냥감을 물어올 테니, 나머지 신들께도 초조해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전해주시길.”

“…건방지기는.”

“그리고 당신이나 나나 자주 만나서 좋을 게 없으니 미리 해두는 말인데.”

준호의 연주가 멎었다. 마침 손님 한 명이 카페에 들어와 메뉴판을 구경했다. 신후는 준호만이 들을 수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 아이를 지키는 게 목적이라면, 이제부터는 신경을 끄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군. 누군가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으면.”

“……”

그 말을 끝으로 신후는 미련 없이 카페를 나섰다. 준호는 이를 꾹 깨물고 있었다.

“저, 사장님…?”

조심스레 그를 부른 여인은 깜짝 놀랐다. 순하디순했던 젊은 사장의 얼굴이 수치와 분노, 자조감으로 범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팅… 가만히 있던 비파의 현 하나가 허무하게 끊어져 내렸다. 하지만 손님을 맞아 주방으로 걸어간 준호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 * *

“으….”

신라의 무릎이 힘없이 접혀 땅에 닿았다. 마치 극지에 떨어진 것 같은 무시무시한 한기에 그녀는 온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여전히 나무줄기에 얽매여 있는 형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팔에 힘을 줬다. 그럴수록 줄기는 뜯어지긴커녕 더, 더, 그의 살을 조였다. 찢어진 살갗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진아영!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정신 차려!”

그때까지 신라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아영은 형철을 한번 올려다봤다.

“보면 몰라? 알려주는 거야. 힘의 차이를. 이제 나는 너희들이 알던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고.”

그녀가 손을 펼치자 신라의 주위로 칼바람이 불었다. 신라의 몸이 기어코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다.

“유신라. 형철이도 처음에 너랑 똑같은 반응이더라? 어떻게 구슬려놨으면 형철이까지 날 저렇게 대하는 거야?”

“그…건…… 형철이도… 널 걱정…해서…”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는 알잖아.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유일하게 알았으면서. 어떻게 날 이렇게 배신을 해!?”

아영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고 멀지 않은 과거를 회상했다.

아영은 형철을 이성으로서 좋아했다. 하지만 형철은 그 마음을 알고도 모른 체했고, 결국 없던 일처럼 지나가게 되었다.

며칠 밤낮을 눈물로 보낸 아영은 겨우 상처와 어색함을 털어내고 형철과 친구로서 잘 지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게다가 형철과 신라, 두 사람의 끈끈한 유대감은 결코 흉내로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고, 그렇게 시작된 소외감이 점점 변질되고 곪아버렸다.

“미안…해…. 내가… 무심…했어….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줄 알았어….”

“아니, 이제 괜찮아. 강해졌으니까. 이제 너희만 바라보고, 기다리고, 혼자인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혼자가 싫을 때 누구든 마음껏 불러낼 수 있거든.”

아영이 허공에 손을 휘젓자, 이번에는 그들이 서 있는 숲에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한기에 휩싸여 있던 신라의 몸은 비에 맞아 더욱 세차게 떨렸다.

“신라! 젠장, 신라야!”

다급하게 울부짖는 형철을 노려본 아영은 그의 몸을 결박하고 있던 나무줄기를 풀어 바닥으로 떨어지게 했다. 그리고 그를 해칠 듯이 살기를 내뿜으며 걸어갔다.

신라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잠재되어 있던 힘이 각성했다 해도 아영이 부리는 귀력은 무언가 과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아영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니, 그녀의 주위를 살폈다. 그녀를 맴돌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이 낄낄대며 비웃고 있었다. 힘을 빌려주고 있으면서 그 모습을 비웃다니-? 맥락이 맞지 않았다.

‘설마….’

아영이 형철에게 집중하느라 한기가 잦아든 틈을 타, 신라는 무릎을 짚고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리고 가만히 느껴봤다. 세 사람 말고 다른 기척이 있는지를.

바스락… 탁…

희미하지만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난 요괴들에게 귀력을 제공하고 그 힘을 빌리는 거야…. 저 귀신들도 분명히 뭔가를 대가로 아영이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는 거겠지. 누군가 그런 모종의 계약을 맺게 만든 거야. 도대체 누굴까. 아영이에게 이런 위험한 계약을 맺게 만든 녀석이.’

분노가 차오르자 이성이 돌아오고 정신이 더 집중됐다. 라디오 잡음처럼 들리던 소음들이 차차 언어로 바뀌어 들렸다.

- 그냥 도망쳐….

- 저 여자는 이미 글렀어, 영혼을 먹히게 될 거라고!

- 날 이용해줘, 너의 맛있는 귀력을 먹고 저 잡귀들을 물리쳐 줄 테니!

- 아니야, 날 꺼내줘!

- 나야!

머릿속이 여러 개의 목소리들로 시끄러웠다. 신라는 지끈대는 머리를 짚은 채 좀 더 도움이 될 만한 목소리를 기다렸다.

그때 처음 듣는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 과하게 먹은 게 체한 것이니 등을 쳐 토해내게 해라.

“과하게 먹은 것…?”

- 힘을 빌려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해.

한편, 아영은 형철을 원망스레 노려보고 있었다. 포기했던 사람이었다. 영원히 볼 수 없다면 친구로라도 남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사랑을 깨달았을 때 이미 그의 사랑은 신라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의 자리마저도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아아…. 우린 왜 이렇게 꼬여 버렸을까.”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괴로움 속에서도 두 사람을 놓을 수 없는 건,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 속에 늘 두 사람이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사랑을 포기한 아픔쯤 함께하는 기쁨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도 너희들에게 언제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형철이 상처 난 팔을 움켜쥔 채 말했다.

“진아영. 넌 늘 그랬어. 네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거짓말….”

“나나 신라나 표현할 줄 몰라서 여태까지 말하지 않은 건 미안해. 그러니 오해를 풀 시간을 줘.”

“신라는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영의 뒤로, 어느새 신라가 다가와 있었다.

“아니. 넌 늘 우리의 빛이었어. 나에겐 구원이었고.”

말을 끝맺은 그녀는 아영의 등을 맨손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단순한 타격이 아니라 귀력이 담긴 타격이었다. 그러자 아영이 목을 움켜쥔 채 헛구역질을 했다. 마치 무언가 기도에 걸린 것처럼 컥컥거렸다.

무언가를 감지한 형철이 다급히 외쳤다.

“한 번 더!”

신라는 주먹을 쥐고 손바닥 쪽으로 다시 아영의 등을 내리쳤다.

“콜록…!”

아영이 입에서 커다란 구슬이 토해져 나와 바닥을 굴렀다. 형철은 재빨리 자신의 피로 바닥에 부적의 글귀를 적고 그 위에 구슬을 올려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파삭-

구슬이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다.

원망과 분노에 휩싸여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맑아진 아영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아….”

자신이 벌인 모든 일이 한꺼번에 실감 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힘을 얻어 두 사람과 동등한 위치가 되고 싶은 마음, 그래서 돕고 싶은 마음, 그뿐이었다. 그런데 구슬을 삼킨 순간부터 무의식에 가둬놓은 어두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듯 휘몰아쳤다. 자신이 더이상 자신이 아니게 되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혼란에 휩싸인 아영에게 다가간 신라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영아, 괜찮아. 넌 이용당했던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너희를 해치려고 하다니….”

“하아…. 다행이다.”

“흑, 신라야….”

아영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신라에게 안겼다.

멀찍이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그림자가 큭큭 대며 웃었다. 그는 손가락을 튕겨 아영에게 힘을 빌려주었던 요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비열해 보이는 입매가 벌어지며, 이렇게 얘기했다.

이. 제. 먹. 어. 도. 좋. 아.

낄낄거리는 기괴한 웃음소리가 대나무 숲을 시끄럽게 울렸다. 신라와 형철은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아영을 감쌌다. 욕망에 찬 검은 기운들이 점차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아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뭐…야? 얘들아, 나 이제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아….”

“엎드려!”

신라가 아영을 안고 바닥에 쓰러졌다. 대신 앞으로 나선 형철이 요괴의 공격에 당해 바닥을 굴렀다. 아영은 그녀를 소중하게 감싸 안은 신라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절대 못 줘…. 절대 못 가져가. 내 친구의 영혼은… 절대로….”

이토록 절박한 신라의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언제나 무심해 보이던 신라를 이렇게까지 떨게 만드는 존재들을 겁도 없이 이용하려 했다니, 얼마나 안일했던가. 아영은 후회와 자책감에 죽고만 싶었다.

“신라야…. 날 두고 도망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더는 폐 끼치고 싶지 않아, 제발….”

빠져나갈 방법을 팔방으로 생각해봐도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형철이 아무리 퇴마술을 배웠어도 이 많은 귀신들을 다 물리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꽤 다친 상태였다.

- 먹을 것이 배로 늘었다….

- 다 먹어 치워 버리자….

이미 귀력을 대가로 힘을 빌려 썼기에 신라로서도 이들을 대항할 힘은 턱없이 부족했다. 요괴들이 징그러운 이빨을 드러내며 단체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모든 걸 체념하고 아영을 더욱 끌어안았다.

그때 대나무 숲에 검은 장막이 휩싸인 것처럼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모든 빛이 차단돼서 이미 저승에 있는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캬악-

카악…

카르륵….

소름 끼치는 귀신들의 비명이 들리고 난 뒤, 스산한 바람이 차차 멎었다.

숨 막히는 고요함 속에서 신라가 먼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낯익은 체취가 먼저 코에 닿았다. 한참을 달렸는지 가빠진 숨을 점잖게도 고르고 있는 그다. 어둠을 담은 눈동자가 이토록 안락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은 그가 허공에 손을 휘젓자, 요기의 잔재마저 어둠에 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더불어 다시금 주위가 원래의 시간대에 맞게 밝아졌다.

신후는 멍한 시선을 보내고만 있는 신라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젖어서 뺨에 붙어 있는 머리칼을 천천히 떼어내 줬다. 새하얗게 질린 뺨이 얼음처럼 찼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조퇴는 금지야. 알겠어?”

“…네.”

형철이 다가와 아영을 일으켰다. 함께 아영을 부축하려던 신라의 몸이 휘청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신후는 예상했다는 듯이 그녀의 몸을 받아냈다. 그리고 번쩍 들어 안았다.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죠?”

형철이 물었다. 신후는 자리를 떠나기 전 짧게 답했다.

“더 안전한 곳.”

반박할 수 없는 대답에 형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눈물 흘리고 있는 아영에게 다가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신라가 있었어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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