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장. 덫_上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고마워요.”
젊은 정신과 의사가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신라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늘 환자들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것은 의사 쪽이었으니까.
직장인들은 오후 업무를 시작했을 시간에, 두 사람은 카페의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았다. 단 하루 신라의 주치의였던 강 현이 병원에 휴가를 내고 그녀가 사는 곳 근처의 커피숍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표정이 안 좋네요? 신라 씨.”
“아…. 좀 피곤해서요.”
간밤에 아영이 갈 만한 곳을 전부 돌아다니느라 잠을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귀력을 맛보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녀석들에게 영문을 물어도 낄낄거릴 뿐 제대로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미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강 현이 말했다.
“신라 씨는 남에게 잘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죠?”
“분석하시는 건가요? 진료는 끝난 걸로 하기로 한 것 같은데.”
“아뇨,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저한테는 보이거든요. 모든 걸 혼자서 끌어안은 사람이 짓는 표정이 딱 그래요.”
신라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강 현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잘못이라고 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그렸던 신라 씨 모습과 꼭 닮아서요.”
“환자를 미리 머릿속에서 그려보시나 봐요?”
“몇몇 흥미로운 환자의 경우에만. 그게 진료를 하는 데 꽤 도움이 되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신라는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1시 20분경이었다. 두 시 전까지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는 게 연구실의 룰이었다.
“여쭤볼 게 있어요.”
“신라 씨 얘기는 아니고, 친구의 친구 얘기겠군요?”
“…그렇게 들어주세요.”
신라는 깊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세 명이 친구였어요. 그중 두 명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어요. 나머지 한 명은 해당이 없는 비밀이지만, 두 친구의 비밀을 알고 있죠. 같이 숨겨줬고요.”
“네, 이해했어요.”
“두 명은 나머지 친구를 위해서 되도록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만나면 좋은 얘기만 하면서 지내길 바랐던 거죠. 하지만 나머지 친구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 봐요. 해당이 없던 그것을, 억지로 가져버렸어요. 남들이 보기에 흉일 수밖에 없는 그걸 말이에요.”
“그랬군요.”
“자신이 억지로 그걸 가지게 된 걸 축하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외롭고, 불행한 일인지 잘 아니까.”
“흠….”
깍지 낀 손의 손등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던 강 현이 말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상담해요. ‘기다려라.’”
“무작정…이요?”
“네.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환자니까요. 사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줘요. 그걸 빠르게 해결하려고 할수록 부딪치고, 소음이 생기고,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이죠. 그러면 분명히 누군가의 마음에는 생채기가 남아요. 전 그 생채기를 치유하고 예방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죠. 어차피 그 친구는 자연히 알아서 깨닫고 도움을 청하러 다가올 테니까.”
“……”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젊은 의사는 구체적인 상황을 몰랐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만일, 아주 만일에 그 얘기의 주인공이 신라 씨라면 해결책이 달라지죠.”
“왜죠?”
“신라 씨가 그렇게 잠도 못 이루고 피곤해할 정도로 고민할 일이라면, 분명히 상황이 아주 심각하고 급박한 일일 거예요. 그럴 경우에는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대한 빠르게 갈등을 해결해보라고 조언할 것 같군요.”
“……”
신라가 고민에 잠긴 사이, 강 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지나 귀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흑발과 잘 어울리는 보랏빛 장신구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것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도울 일이 있을까요?”
신라는 예의상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뇨, 나중에요.”
“대신 의사가 필요한 일에는 꼭 저부터 부르기예요.”
“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라는 다시금 고민해보았다. 아영이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머무를 만한 곳이 어디일지를.
“아, 신라 씨.”
“네?”
“비밀을 공유한 다른 친구도, 이 상황을 알고 있나요?”
“아뇨, 아직….”
“제가 토라진 친구였다면 그쪽에도 자랑하러 갔을 것 같은데 말이죠.”
“…!”
신라는 아차 싶어 입을 탁 벌렸다. 형철을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 의식적으로 그의 존재를 뒤로하다 보니, 그런 기본적인 추측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봐야겠어요. 도움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차나 한잔 사 줘요.”
“알겠어요.”
신라는 그대로 가방을 메고 카페를 뛰쳐나갔다.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강 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오랫동안 머물렀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조교들 중 마지막으로 커피를 물고 들어온 혜령이 연구실 안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신라는? 웬일로 늦네?”
막 문자를 확인한 우선이 대답했다.
“급한 사정이 생겨서 못 들어온대요. 무슨 일일까.”
교수실 문이 열리고 신후가 들어왔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 조교. 그때 그랬었지. 불가살이 어떤 이름을 말했다고.”
“네. ‘비’와, ‘랑’이 들어가는 이름이었어요.”
신후는 조연사에서 빌린 퇴귀록을 펼쳐 보였다.
“갑자기 기억에 스쳐 지나가는 이름이 있어서 이 고서적을 뒤져보니 나오더군. 이 이름이.”
그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비 형 랑(鼻 荊 郞)
건우에게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신후가 건우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는 건 다른 조교들도 마찬가지였다.
혜령이 먼저 반박했다.
“비형랑이라면 전생에 교수님과 건우, 두 사람이 함께 제령 시켰다는 그 인물 아닌가요?”
신후가 정정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령도 하지 않고 영혼 자체를 결박시켜 신들에게 가져다 바쳤지. 신들은 놈을 환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 영을 지하 감옥에 가둬버린 거였고.”
“도대체 어떤 자이길래 신들이 그렇게까지….”
어느새 건우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그는 양팔을 꽉 움켜쥔 채로 허공을 노려보며 한 단어 한 단어 짓씹듯이 얘기했다.
“도깨비로 살았을 때 놈에게 속아 넘어가 계약을 맺고 노예처럼 부려졌어. 인간 세계 왕의 종노릇을 하라고도 했지. 도저히 천성에 맞지 않아서 여우로 둔갑해 달아나는 날 추적한 놈은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나머지 조교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건우에게 직접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들도 처음이었다.
“나뿐만이 아니었어.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없애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었어. 난 신이 주신 자비로 얼마 되지 않아 인간으로 환생했어. 고삐가 완전히 풀려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어지럽히는 놈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웃 나라에 있는 어둑시니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어.”
신후는 조소를 머금으며 그 말을 받았다.
“결과야 이쪽의 승리였지만 덕분에 귀기가 쇠약해져 수백 년을 죽은 듯이 살았었지.”
묵묵히 듣고 있던 동주가 입을 열었다.
“왜 그 녀석이 돌아왔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다른 놈일 수도 있잖아요. 혹은 사칭이거나.”
신후가 답했다.
“동방 수호신인 지국천왕이 이승에 내려와 있다. 그것도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모두 처음 듣는 얘기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놀랐다.
“만나신 건가요?”
“그래. 처음에는 날 감시하러 내려온 건가 싶었지만 나에게는 별 관심이 없더군. 달리 이승으로 내려와 있을 만한 이유라면, 뭔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추측했지. 혹은 감시하거나. 신들이 그렇게까지 경계할 만한 인물은 몇 없어. 만약 직접 가둬뒀던 영혼이 탈출한 거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재미있는 건….”
신후는 뜸을 들인 뒤 얘기를 이었다.
“지금 지국천왕이 지켜보고 있는 인물이 바로 우리 학부 연구생이라는 거야.”
“예? 신라를 왜….”
“글쎄. 귀력의 화수분인 인간을 언젠가 써먹으려는 속셈일지도 모르지.”
정황상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추측을 금할 수 없었다. 조교들은 심각해진 얼굴로 깊은 고민에 잠겼다. 특히 건우는 아직까지 몸의 떨림이 멎지 않고 있었다.
“맥락은 맞아. 교묘한 언변으로 온갖 요괴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건 놈의 특기야. 놈이 돌아와 다시 한번 날 죽이는 꿈을 수도 없이 꿨어. 본능적으로 느낀 건지도 몰라. 가까이에 와 있다는 걸.”
동주가 다가가 건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곰곰이 생각하던 우선이 신후에게 말했다.
“비형랑이든 다른 자든, 놈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면 앞으로 어떤 일을 크게 벌일지 몰라요. 저희 쪽에서도 뭔가 조치를 빠르게 취해야겠군요.”
“그래. 일단은 아는 자의 입부터 열어야지.”
“지국천왕께서 순순히 모든 걸 알려주실까요?”
“그래야 할 거야. 우리를 좋은 전력으로 부려 먹고 싶다면 말이야.”
신후는 입꼬리를 천천히 비틀었다.
* * *
형철이 전화를 받지 않아 신라는 무작정 조연사까지 뛰어 올라갔다. 숨을 헐떡이며 사찰 쪽으로 달려오는 신라를 발견하고, 형철의 큰아버지인 영선 대사가 다가왔다.
“아니, 신라야. 왜 그렇게 급한 모습이니?”
“영선 스님, 형철이는 지금 어디 있나요? 전화를 안 받길래….”
“형철이는 아까 아침에 뒷산에 산책을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구나.”
“혹시 아영이도 이곳에 오지 않았나요?”
“아니, 아영이는 못 본 지 오래되었는데?”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라는 형철이 갔을 만한 길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정신 수양이 잘 된다며 소개해 줬던 대나무 숲, 왠지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왜 이렇게 춥지….”
대나무 숲이 보일 때 즈음, 팔을 감싸 쥐게 할 만한 한기가 느껴졌다. 신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형철의 모습을 찾았다.
“형철아-! 박형철!”
점점 안개까지 발아래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등산객이 있을 법도 한 산책로에서 사람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신라의 걸음이 천천히 멈췄다. 가빠진 숨을 조용히 고르고 있을 때, 어딘가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지직… 지직…
두꺼운 끈으로 뭔가를 조이고 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 눈이…”
겨울에나 볼 수 있는 흰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졌다. 자연히 하늘을 올려다본 신라는 놀라서 두 눈을 부릅떴다. 인영(人影) 하나가 대나무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그 인물을 고정하고 있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움직이는 나무줄기였다. 줄기는 멈추지 않고 인영의 사지를 단단히 묶었다.
“형철아!”
신라의 외침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형철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다.
“신…라?”
“괜찮아!?”
형철은 고통에 눈가를 찌푸리다가, 초조하게 올려다보고 있는 신라에게 외쳤다.
“어서 여기에서 피해! 얼마 멀어지지 않았을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그런 거야!”
“가서 큰아버지를 불러줘! 아니, 일단 멀리 도망쳐야 돼!”
“도대체 무슨…”
저벅, 저벅. 신라의 뒤쪽으로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먼저 발견한 형철이 이를 악물며 팔을 비틀었다. 그러나 그를 단단히 얽맨 나무줄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길, 신라! 뒤를 봐!”
순간 전신에 소름이 끼친 신라는 천천히 뒤쪽을 돌아봤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누가 서 있을지는.
“안녕, 신라.”
봄기운을 풍기던 산자락에 때아닌 한기를 마구 흩뿌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소꿉친구 아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