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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친구 (16/126)

15장. 친구

“신~라야~”

신라가 연구실로 들어서자마자 혜령이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오늘은 봄에 어울리는 화사한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어 더욱 돋보이는 사학과 패셔니스타였다.

“윽, 숨 막혀요, 혜령 선배.”

“너무 보고 싶었어. 우리 없을 때 연구실 청소하고 간 게 너였지? 바보 같긴.”

“2주 가까이 아무것도 안 하고 월급 받기가 양심에 찔려서요. 대신 시험도 잘 치렀어요. 선배는 상처 어떠세요?”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어서, 거의 다 나았어.”

건우가 실실 웃으면서 시험지 뭉치를 꺼내 왔다.

“어디, 고고학방 학부 연구생 유신라의 점수를 한번 들춰볼까?”

“안 돼요!”

“왜~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열심히 풀었다며?”

“왜 그랬는지 아시면서…!”

키가 비슷한 두 사람이 쫓고 쫓기는 장면을 연출하자 다들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선은 말리면서도 웃는 표정이었고, 혜령은 그 장면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키가 가장 큰 동주가 불쑥 끼어들어 신라의 시험지만 쑥- 빼 갔다.

“중간고사 채점은 교수님이 직접 하셔서 우리도 처음 보는 거거든. 어디 잡귀를 쫓아 준 보람이 있나 볼까?”

“진짜, 하지 마세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

여자치고 큰 키였지만 동주 앞에서는 일반 여자일 뿐이었다. 폴짝거리며 어느 때보다 필사적인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여, 동주는 쉽게 시험지를 내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

신라의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눈동자도 하늘색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얼결에 시험지를 낚아챈 그녀는 자신의 점수를 먼저 읽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네 사람, 아니 다섯 사람이 일시 정지됐다.

소란스러움에 연구실로 들어섰던 신후는 코앞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몸을 한 팔로 끌어안아 다시 땅에 발을 딛게 만들었다.

“이건 또 무슨 재주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그녀의 손에 들린 시험지에는 100이라는 숫자가 깔끔하게 적혀 있었다.

“그렇게 날아갈 것처럼 기뻐할 줄 알았으면 전화로라도 알려주는 거였는데.”

신후의 농담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부끄러워진 신라가 시험지를 다시 건우의 손에 떠넘겼다.

“저 놀리는 게 다들 그렇게 재밌으세요?”

사실 그냥 웃어넘길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의식하지 않는 중에 귀신의 힘을 부린다는 것은 자칫 일반인들 눈에 띄기 쉽다는 것이었다. 귀신의 존재를 확실히 느끼는 것, 그 능력을 인지하고 사용하는 것, 늘 그 경계가 뚜렷해야 했다.

“귀력을 다루는 자는 특히 이성을 유지해야 해. 이성 없는 갈망은 영(靈)의 문을 열어 주는 것과 다름없거든. 사악한 요괴는 인간의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신 그 육체를 지배해버리지. 특히 네 주위에는 그런 녀석들이 기회만 엿보고 있다는 걸 명심해.”

신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후의 당부를 곱씹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신라는 퇴근하기 위해 짐을 챙겼다. 오늘은 실습이 없는 날이라 조교들도 모두 일찍 퇴근했다. 폭풍전야인 건지 이상하게 요괴들의 움직임이 잠잠하다고 했다.

똑똑.

퇴근을 알리기 위해 교수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퇴근한 건가?’

그녀는 문을 살살 열어보았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고 잠들어 있는 신후의 모습이 보였다. 석양빛에 물든 그의 모습에서 퍽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렇게 자는구나.’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한신후 교수는 도대체 언제 자는 걸까,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낮에는 기운이 약해지니까 낮잠을 자는 걸지도.’

책상 근처까지 걸어가도 평온한 숨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잠을 깨우고 싶지는 않은데 왜 손은 멈추지 않는 걸까. 신라는 온기 있는 손을 신후의 이마에 가져갔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와 있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같은 인간일 뿐인데.’

신에게 미움을 사 지긋지긋한 속죄의 삶을 연명하고 있는 남자.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증표를 남긴 여인을 만날 기회도 이번 생이 마지막이다.

희미해진 기억 탓에 찾아야 한다는 목적의식만 남아버린 그의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이것도 그가 인간의 관심을 갈망하는 어둑시니이기 때문에 드는 감정일까.

“어쩌면 동질감이 든 걸지도 몰라. 어렸을 때부터 곁에 친구를 두지 않았으니까. 외롭다는 감정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신후의 입이 날숨과 함께 천천히 벌어졌다.

“외로움을 적으로 둔 나와 반대로, 너에게는 그 감정이 어떤 상황이든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됐겠지.”

그는 자신의 이마에 닿아있는 신라의 손을 쥐었다.

“나도 연민을 느껴. 잃어버린 것이 되돌아오기를 묵묵히 기다리는 나 자신보다, 외로움을 방패로 여기고 살아온 네 삶에 더 심장이 움직이고 있어.”

“……”

“하지만 이제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작은 함을 꺼냈다.

“저번에 줬던 귀걸이가 쉽게 부서지는 걸 보고 지인에게 좀 더 튼튼한 보석을 구해달라고 했어. 구미호의 뼈를 가공해서 만들었으니까 쉽게 부서지지 않을 거야.”

뼈로 만들었다는 보석은 신기하게도 보랏빛이 났다. 신라의 귀에 귀걸이를 끼워준 신후는 그녀의 흑발과 보석이 꽤 어울려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예쁘군.”

어색한 말이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신라는 그쪽 귀 뒤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감사합니다. 잘하고 다닐게요.”

“보름달이 뜬 날에는 빼고. 그땐 아무 생각 말고 집에만 있어.”

“알겠어요.”

할 말이 사라졌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뒤늦게 마음을 추스른 신라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데려다주지.”

“아뇨, 천천히 걸어가고 싶어요.”

신후는 작게 웃었다.

‘틈을 안 주는군.’

목례를 남긴 신라는 교수실을 나갔다. 신후는 천천히 멀어져 가는 자신의 기운을 가만히 느껴봤다. 며칠 동안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 * *

집 앞 편의점에 들른 신라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사 들고 나왔다.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조용한 동네에 내려앉았다. 빌라를 향해 걸어가던 그녀는 수상한 실루엣이 근처에서 배회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또 뭐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 성별도 알기 힘들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의 고개가 이쪽으로 돌려졌다. 여차하면 달음박질을 칠 준비를 하고 있던 신라의 얼굴에 갑자기 반가움이 서렸다.

“어? 아영아!”

신라와 또래로 보이는 여인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후드를 벗었다.

“사는 곳이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서.”

“웬일이야? 연락도 없이.”

아영은 신라가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동네의 몇 안 되는 소꿉친구였다. 그 시절의 신라는 더 불안정했고, 친구를 사귀고자 하는 의지도 전혀 없었다. 우연히 신라의 비밀을 알게 된 아영이 그녀의 비밀을 숨겨주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형철도 자연스럽게 무리를 이루어, 세 사람은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됐다.

“편입 준비하느라 핸드폰을 부모님께 맡겨놨거든. 문득 생각나서 왔어. 자랑할 것도 있고….”

“그래? 잘 왔어. 집에 잠깐 들어가자.”

“좋아.”

신라는 편의점에서 산 것과 집에 있는 음식들로 한 상을 차려 아영에게 대접했다. 처음에는 밥을 먹고 왔다고 했던 아영은, 맛이 있다며 오늘 첫 끼를 먹는 사람처럼 맛있게 먹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내가 명절마다 신라 너 굶고 있을까 봐 우리 집에 초대해서 밥 먹게 해주고 남은 반찬도 많이 싸줬잖아.”

“그랬지.”

“요새는 어떻게 지내?”

“고고학 연구실의 학부 연구생으로 들어갔어.”

“학부 연구생? 그게 뭔데?”

“학부생들이 졸업 전에 연구실에서 실습하는 거라고 보면 돼. 실제로 논문을 쓰기도 하고, 적성에 맞으면 석사로 지원하기도 하고.”

“아…. 복잡한 거구나. 넌 늘 복잡한 걸 좋아했어. 사색하는 거, 멀쩡한 길 돌아 돌아가는 거….”

“그랬나?”

“응. 아주 많이.”

아영의 화법이 평소와 달리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신라는 그것이 그녀의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 신라야. 나 자랑할 거 있다고 했잖아. 안 궁금해?”

“궁금했어. 축하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잘 봐.”

아영은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신라의 책상 쪽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책상 위의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신라가 깜짝 놀라 아영을 돌아봤다.

“너…!”

귀력을 지니고 태어난 신라와 영력이 뛰어난 형철과 달리 아영은 귀신을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는 평범한 부류였다. 겁은 많아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두 사람을 늘 부러워하곤 했던 그녀였다.

“어떻게 된 거야?”

아영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냥, 살다 보니 느껴지더라. 너희들만 느끼고 공유했던 존재들이. 나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되잖아.”

“…너, 괜찮아?”

신라가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아영이 노골적으로 언짢은 안색을 내비쳤다.

“뭐가? 왜 그런 얼굴을 해? 내가 이런 힘을 얻게 돼서 기분 나빠?”

“그건 힘…이라기보다, 위험한 일이야. 그 녀석들의 힘을 빌린다는 건. 그렇게 함부로 연관됐다간-”

“시끄러워, 듣기 싫어.”

아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네가 안 반길 줄 알았어. 둘만 비밀을 공유하는 게 재미있었을 테니까. 아니야?”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형철이랑 나는 네가 무서워할까 봐…!”

“내가 진짜 무서워한 게 뭔지나 알아!?”

아영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방의 창문이 파르르 떨렸다. 신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신후가 방어막을 둘러준 이 공간 안에서 아영이 다름 아닌 귀력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그 말은 그녀가 빌려 쓰고 있는 힘의 정체가 보통이 아니란 뜻이었다.

“아…영아….”

“잘 있어, 신라. 이제 네 도움 따위 안 받아도 잘 살아갈 수 있으니까.”

“잠깐… 잠깐만!”

신라가 붙잡기 전 아영은 미련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불길해…. 뭔가 이상해!’

몇 초 간격으로 뒤따라 나갔지만, 아영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뒤였다. 신라는 빌라 앞 골목길에 서서 망연한 모습으로 두리번거렸다.

- 신라야, 이사 가도 나 잊어버리면 안 돼, 알았지?

- 아프면 연락해, 이 기지배야.

- 나도 너희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장 친했던 친구를 신경 쓰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신라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끝도 없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도움을 청해볼까….’

연구실의 선배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접었다.

‘다른 일로도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할 분들이야. 개인적인 친분을 내세워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내가 해보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날카롭게 떠진 두 눈에 친구를 구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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