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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고백 (15/126)

14장. 고백

“교수님….”

뜻밖의 만남에 신라는 잠시 사고가 멈췄다. 며칠간 쉴 새 없이 공부를 한 탓 같기도 했다.

“시험은 잘 봤고?”

신후는 원하는 음료를 고르라며 자판기를 턱짓했다. 신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캔 커피를 선택했다. 신후가 대신 허리를 숙여 음료를 꺼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신후도 신라와 똑같은 캔 커피를 뽑았다.

“한국에 커피가 처음 들어오게 된 건 1890년대 무렵이었지. 고종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마신 커피에 반해서 환궁한 뒤에도 덕수궁에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집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마실 정도였어.”

얼추 알고 있었던 얘기이므로 신라는 고개만 끄덕였다.

“위협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단조로운 생활 패턴을 유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노릴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아지니까. 결국 누군가 황제의 커피에 독을 타 암살을 시도했었지.”

“그렇다고 좋아하는 걸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잖아요.”

“물론이지. 반대로 무언가에 흠뻑 빠지면 누구보다 그것에 대해 세밀하게 알게 돼. 커피의 향을 즐길 줄 알았던 황제는 커피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마시지 않았으니까.”

신라는 커피 캔의 뚜껑을 따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마시기 전 잠시 향을 맡았다.

“이상한 점은 없네요.”

“정말로?”

왠지 뼈가 있는 질문 같았지만, 당장의 갈증이 급했기에 그녀는 캔 입구에 입을 댔다. 시원한 액체가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기 전, 신후의 손이 그 캔을 뺏어갔다.

“무슨…!”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요.”

“내가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

그러니까, 세밀하게 알아야 할 대상은 커피가 아니고 커피를 쥔 남자라는 소리였다. 평소와 다른 걸 눈치챘다면 이런 장난에 걸리지 않았을 테니까. 신라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그의 손에서 다시 커피를 뺏었다.

“놀리세요?”

“자주 마시면 건강 해쳐.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어떤 분이 차석 이상을 하지 않으면 학부 연구생 자격이 없다는 무서운 소리를 해서 말이에요.”

“괴롭혔다고 생각하지 마. 넌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말이야.”

“네, 네.”

신라는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 사학과 건물을 나섰다. 바로 자췻집으로 돌아가 눈을 좀 붙일 생각이었다.

벚꽃으로 물든 캠퍼스를 거닐고 있자니, 신후가 자연스레 옆으로 따라붙었다.

“시험이 끝났으니 이제 얘기해줄 수 있으시겠네요? 불가살이 했다는 이상한 말이 뭐였죠?”

“사실 아직 고민 중이야. 얼마나 위험해질지 모르는 일에 널 끌어들여야 하나 싶어서.”

“혜령 선배도 순수한 인간이잖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

그날의 일은 조교들이 상세히 묘사해 주었다. 불가살의 약점을 알아낸 신라가 불 요괴의 힘을 빌려 불가살을 퇴치했다고 말이다. 그 뒤 극심한 피로감을 드러내긴 했지만, 별다른 후유증은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잠깐 힘을 빌려 쓴 것 정도는 견딜 만한 일이지. 그날 밤 결국 기절해버리기도 했고.’

신후는 옆에서 걷는 신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물론 신라의 능력은 큰 전력이 될 것이다. 애초에 그래서 데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를 위험한 일에 쓰고 싶지는 않았다.

― 우(憂)

‘이런 느낌이었지. 불안함, 초조함.’

생각에 잠긴 신후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신라가 대답을 재촉했다.

“안 말해주실 거예요?”

“별건 없어. 귀신들 사이에서 우리를 안 좋게 소문내고 다니는 존재가 있다는 것뿐. 또 무리를 지어 행동하고 있다더군.”

“무리를 짓는다고요….”

“멋대로 행동하기 좋아하는 천성을 지닌 요괴들은 보통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아. 그래서 지금으로선 그쪽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환생한 인간이 주축이 되어 행동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어.”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짓을….”

“네가 열심히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 우린 그걸 조사하고 있었지.”

“그랬군요.”

멍하니 대답하는 신라에게 다가간 신후는 마침 이마 위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아직 단서를 잡는 중이니까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 없어. 오늘은 가서 푹 쉬도록 해.”

“네.”

문득 주위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신라는 신후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학생들 중 꽤 많은 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교수님.”

“응.”

“죄송한데 손 좀 떼 주시죠.”

신후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여유롭게 캠퍼스를 둘러봤다.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는 게 숙명이요, 그래서 눈에 띄는 외모를 갖고 태어난 것은 당연지사였지. 경멸도 상관없었어. 꼽추에 괴상한 얼굴을 지니고 태어나기도 했었으니까.”

“…연예인이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그것도 나쁘지 않았겠군. 하지만 이미 늦었어. 마지막 생이니까.”

“……”

신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신후를 돌아봤다. 신후가 기다렸다는 듯이 멈춰 섰다.

“이번에는 또 뭐가 궁금하지?”

“요즘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당신이에요.”

“……”

흡사 고백과 같은 말에 신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한 여인의 얼굴에는 일말의 쑥스러움도 후회도 없었다. 신후는 짐작했다. 이것이 다른 의도가 있는 말이라고.

“계속해봐. 일단은 기분이 좋으니까.”

“네,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에요. 조깅을 하다가도, 시험공부를 하다가도 문득문득 당신의 과거가 어땠을지 궁금해하고 또 미래에는 어떤 결말을 맺을지 짐작해 보곤 했어요.”

한차례 강한 바람이 불면서 나무에 매달려 있던 벚꽃이 춤을 추며 흩뿌려졌다. 신라는 흩날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 얘기를 계속했다.

“착각할까 봐요. 내가 당신한테 별 관심이 없다고. 아니요, 많아요. 거의 집착 수준에 이르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신후의 눈에 열이 올랐다. 강렬한 눈빛에서 언제고 어둑시니의 능력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관심이 없을 수 있겠어요? 첫 만남이 그렇게 강렬했고, 이제는 보호자가 되어준다고 한 사람인데. 지도교수인데다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다시 보고 지나갈 정도로 미남이죠.”

신후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다 마신 커피 캔을 구겨 근처의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그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근사한 곳으로 데려가 식사만 대접하면 되는 건가?”

“왜죠?”

신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럴 타이밍이니까.”

“나는 당신이 오래전 증표를 남겼던 그 여인이 아니에요. 잘 알잖아요.”

“……”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특별한 점도 없어요. 그들처럼 당신에게 관심이 많고, 귀력이 많다는 것쯤은 조교님들에 비하면 별로 특이하다고 할 수 없잖아요. 학부 연구생으로 일하는 만큼만 도움을 주세요. 그 외에 특별대우를 해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에요.”

고작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설명하려고 고백과 같은 말들을 늘어놓다니.

‘그런 점이 특이한 거라고. 유신라.’

신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소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었나요?”

“아니, 없어.”

“앞으로 고고학 학부 연구생으로서 성심성의를 다할 거예요. 당신이 잃어버렸던 것을 찾기 위해 함께 애쓸 거고요. 그러니까 당신도….”

잠시 호흡을 내쉬고 열리는 입술에 신후의 진지한 눈빛이 닿았다.

“당신이 잃었던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두근, 심장 고동이 단 한 번 크게 소리를 냈다. 신후는 환상 같은 그 감각에 잠시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넌 참 이상해. 분명히 이 안에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잖아.’

가볍게 목례를 남긴 신라는 미련 없이 후문을 향해 걸어갔다. 신후는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그녀가 떠난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 * *

병든 여인에게는 은애하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옆 마을의 서책방을 운영하는 양인이었다. 희귀한 서책을 모아 팔고 본인도 가끔 집필을 하는 문학도였다. 문예에 조예가 깊지만 병들어 책 한 권 읽어내기가 힘든 여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친히 서책을 꾸려 그녀를 찾아와 이야기꾼이 되어주었다.

그가 나지막이 읽어주는 서책 속 세상 이야기들은 너무나도 재미있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여인은 그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뒷산에 사는 순한 짐승에게도 들려주었다.

“다음번엔 언제 오실까. 무슨 이야기를 들고 오실까. 너무 기대가 돼.”

그 이야기들은 이미 아는 얘기들이었지만, 여인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아서 짐승은 그저 그르릉거릴 뿐이었다.

여인의 병세가 나날이 악화되어 가던 초봄의 늦은 밤, 조용히 달의 기운을 느끼고 있던 짐승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시끄럽게 만드는 인간들을 멀찍이서 지켜봤다. 정분이 난 처녀, 총각이 밀애를 나누기 위해 헐레벌떡 우거진 수풀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제길, 벌써 벌떡 섰어! 빨리 치마 걷어봐!”

“아이참, 낭군님도 남사스럽게!”

여인은 말과는 달리 치마를 번쩍 들치고 속곳을 단번에 내렸다. 그녀가 나무 기둥을 껴안고 엉덩이를 치켜들자, 정욕으로 물든 눈을 희번덕거린 사내가 침으로 적신 손가락으로 여인의 음부를 지분거렸다.

“아앙~ 좋아요! 어서!”

“음란한 것이 보채기는!”

사내는 당장 여인의 질 속으로 손가락 세 개를 쑥 집어넣었다. 쑤걱쑤걱 안쪽을 긁어대자 여인의 허벅지 사이로 애액이 줄줄 흘렀다.

“아앙! 더! 더!”

“그것참 꿀처럼 흐르는구나.”

침을 닦아낸 사내는 여인의 애액을 게걸스럽게 빨아먹었다. 비명을 지르며 나무에 얼굴을 비비는 여인과 그 여인의 엉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먹어줬으니 너도 내 걸 맛있게 물어보거라.”

사내는 단단해진 성기를 곧바로 여인의 질 속으로 구겨 넣었다. 철퍽철퍽 거친 동작에 체액이 이리저리 튀었다.

‘저속한 것들 같으니.’

정작 짐승인 존재는 인간들의 음란한 행위에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잠에나 들려고 했다. 그런데 밀애 도중 사내가 내뱉는 말에 짐승의 눈이 조용히 떠졌다.

“호족 집안의 병든 여자, 이제 곧 죽을 건가 봐. 슬슬 이야기를 들려준 값을 받아내야겠지? 무슨 자리를 달라고 할까. 개경의 관리? 그게 어려우면 지방의 관리? 큭큭큭! 이야기 좀 들려주고 은애의 눈빛까지 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남는 장사 아니야?”

짐승은 거대한 몸을 일으켜 어둠을 흩뿌리며 벌거벗은 남녀에게 다가갔다. 먼저 짐승을 발견한 여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혼비백산 달아났다. 뒤늦게 짐승을 보고 기겁을 한 남자도 도망치려 했으나 숨구멍이 턱 막혀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제발… 살려…주…, 컥!”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버러지 같은 남자에게 짐승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에게 잠깐이나마 세상을 아는 기쁨과 생기를 선물해준 것을 고려해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짐승은 가여운 여인의 명줄을 늘리는 것을 그만하기로 했다.

이번 생에 못다 한 것을, 부디 다음 생에는 이루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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