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 수호신 (14/126)

13장. 수호신

딸랑, 차임벨 소리가 울리고 존재감 강한 남자가 작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선글라스를 벗어 가슴께에 꽂아 넣은 그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카페의 주인을 바라봤다. 분명히 기척을 느꼈을 테지만 카페 주인은 등만 보이고 있었다.

“손님 왔습니다만.”

손을 멈춘 사장은 잠시 후 카운터로 걸어 나왔다. 초점 없는 흐릿한 시선이 무성의하게 신후 쪽으로 향했다.

“미안하지만, 이 가게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카페라서요.”

신후는 작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럼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아닌 존재이니 사 마실 수는 없겠군요.”

“……”

준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아메리카노 샷을 추출했다. 신후는 아무도 없는 카페 안을 거닐다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두 남자는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그러나 서로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만나면 자칫 복잡해질 수 있는 존재였기에, 서로의 위치를 알아도 의식적으로 피해갔던 것이다.

신후는 준호가 갖다준 진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머금었다.

“몇 번째 생이지?”

맞은편에 앉은 준호의 물음에 신후가 대답했다.

“네 번째.”

“죄를 갚는 마지막 생이군. 네 번의 생 모두 인간으로 사는 사람들도 겨우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자네는 어떻지?”

“깨달음이라…. 애초에 나는 내 존재를 잘 알고 있고,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은 ‘죄’를 저질렀을 거야.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기에 순순히 죗값을 치르고 사는 거지.”

“그럼 깨달음이 아닌 무얼 위해 그리 살고 있지?”

“……”

신후는 꼬아 올린 다리 위에 걸쳐 놓았던 손으로 두어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사람의 것이 분명한 온기 있는 손이다.

“인간으로 살면 어쨌건 만나질 테니까. 이 세상에 있는 한.”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

“동시대에 태어나도록 ‘설계’를 한 것까지 신의 영역이라고 하지는 않겠지?”

준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만나서 무엇을 할 작정인지, 지켜봐야겠지.”

“그 ‘무엇’을 할 수 없도록 빼앗아갔으면서, 또 잔인하게 구는군.”

신후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4대 수호신 중 권선징악의 ‘지국천왕’이 왜 이런 평범한 모습으로 고작 한 명의 인간을 감시하고 있는 거지?”

준호의 미간이 불편함을 담고 일그러졌다.

“‘감시’는 어감이 좋지 않군. 난 그 아이를 지키고 있을 뿐이야.”

“단순히? 영력이 강해 귀신에게 잘 노려지는 것 빼고 수호신의 구미를 당길 만한 점은 없어 보이는데.”

“거기까지밖에 보이지 않으면 조용히 그 아이에게서 떨어져 줬으면 좋겠군. 앞으로 닥칠 위기에 그 아이는 꼭 필요해.”

신후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싸고도는 것치고 보호가 허술해. 나에게 먹힐 뻔했을 때 당신은 뭘 하고 있었지? 그딴 낡아빠진 주술로 어설프게 날 자극하기나 했어.”

탕-

준호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놨다.

“선을, 지키는 게 어때.”

카페가 미세하기 진동하기 시작했다. 식기들이 소리를 내며 부딪치던 수준에서 시작해 천장이 무너질 듯이 흔들렸다. 탁자 위에 있던 신후의 커피가 모두 흘러넘쳤다.

“어둠을 부릴 줄 안다고 신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고 착각하지 마라….”

단조로운 어조로 얘기하는 준호의 목소리는 점차 사람의 것이 아닌 마냥 굵어졌다.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기이하게 에메랄드빛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내가 네 죄를 다루었다면 권선징악의 신으로서 어설프게 속죄하며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을 것이다. 애초에 어둠은 빛의 존재를 더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 신이 만든 것- 어둠으로 또다시 신의 행세를 하려 한다면 이번에는 나의 빛으로 널 집어삼켜 버릴 것이다….”

딸랑-

금방이라도 카페가 무너져 내릴 듯한 위태로운 상황은, 작은 차임벨 소리로 인해 허무하게 종료되었다.

“준호 오…! 빠…”

반가운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던 신라는 여진을 느끼고 문 앞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지진…인가.”

그녀는 진동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다가, 자신에게 꽂혀 있는 두 시선에 이차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뭐야, 이 당황스러운 조합.’

준호의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신후는 곧바로 일어나며 선글라스를 꼈다.

“그럼 이만.”

아는 체도 없이 자신을 지나쳐 가게를 나서려는 신후에, 신라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갔다.

“교수님!”

“사장님과 친한 관계인가 보군. 신기하게도 나도 알고 있던 사람이라서 말이야.”

“그런…가요?”

- 옅게 커피 향이 나는군. 그 카페는 당분간 삼가도록 해.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난 신라는 천천히 준호 쪽을 돌아봤다. 언제나처럼 어렴풋하게 미소 짓고 있는 유약해 보이는 청년이 있다. 자상한 이웃 오빠, 그 평범함이 좋아 늘 안식을 얻어가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누구도 아닌 한신후와 알던 사이다…?

“신라.”

“…네.”

어느새 다가온 신후가 조금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눈 옆으로 살짝 쓸어 넘겼다. 가라앉은 그녀의 눈빛이 신후의 손길을 따라갔다.

“커피 맛이 좋더군. 여기에 오면 가끔 테이크아웃해서 가져다줘.”

“아… 네.”

“보답은 근사한 식사로 할 테니. 그럼 남은 시간 시험공부 잘하고.”

신후는 신라 너머로 보이는 준호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을 던진 후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걸어왔다.

“뭐 마실래, 신라야. 오늘 원두 향이 좋은데. 한 잔 진하게 내려줄까?”

“아…. 네, 그렇게 줘요.”

“그럼 앉아서 기다려.”

준호는 평소처럼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신라였다.

* * *

공부에 하루 시간을 모두 쓸 수 있다는 게 이 정도로 유리할 줄이야. 신라는 몰라보게 여유로워진 스케줄 덕분에 오전에는 조깅을 하고 공부를 끝마친 저녁에는 모두가 실습을 나간 빈 연구실의 청소까지 했다.

일주일에 걸친 시험이 거의 끝이 나고, 드디어 마지막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마지막 과목은 한 교수가 가르치는 고고학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평범한 복장에 크로스백 하나를 멘 채 강의실로 들어섰다. 시험 15분 전쯤이라 이미 몇몇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서영도 있어 반갑게 인사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5분 전. 민우선, 차동주 조교가 문제지가 담긴 서류 봉투를 들고 강의실로 들어섰다. 우선의 팔에서 깁스가 사라지고 붕대가 둘러진 것을 발견한 신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가살에 당한 상처가 거의 나은 모양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신라 쪽을 쳐다본 우선은 작게 웃어 주었다.

“야!”

서영이 몸을 옆으로 숙이며 신라에게 속삭였다.

“응?”

“복 받은 기지배. 어떻게 저 방은 조교들도 저렇게 훈남이냐? 애인 있대?”

“아, 아니. 모르겠어.”

“좀 물어봐봐. 특히 저쪽, 짧은 머리 조교님. 어?”

동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서영이 너, 살면서 불의를 보고 못 참은 적 있어?”

“어? 갑자기 웬 불의? 그런 건 모른 척하는 게 상책 아니냐?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됐다.”

동주가 칠판에 응시자, 결시자 수, 그리고 시험 시간을 적었다.

“시험은 10시 반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됩니다. 시작하고 20분이 지나면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가실 수 있습니다.”

시험지가 분단마다 나누어져 뒤쪽으로 한 장씩 전달됐다. 총 세 장의 시험지였다. 5지선다형 객관식부터 주관식, 서술형까지 시험 유형 중 정석이었다. 한 교수답다고 생각하며 신라가 피식 웃었을 때였다.

슥-

갑자기 시험지가 먹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라….’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 학기에도, 저저번 학기에도 이렇게 장난질을 당해서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었다. 어떤 귀신인지 모르지만 왜 유난히 시험 때만 되면 이렇게 괴롭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30여 분이 지날 때까지 볼펜만 쥔 채 문제를 풀지 않는 신라를 보고 동주가 시험장을 돌아다니는 척 그쪽으로 다가갔다. 신라는 다가온 동주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시험지를 내려다본 동주는 단번에 상황을 눈치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래서 못 풀었군.’

그는 반지를 낀 손으로 시험지 위 허공에 복잡한 한문을 적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시험지를 쿵 내리찍었다. 그러자 시험지에서 먹물이 점차 빠지고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우선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닿아 오자, 동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의실에 웬 거미가 돌아다니지?”

신라는 나중에 고마움을 전하기로 하고 일단 시험 문제부터 풀었다. 이미 반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집중해서 풀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11시 반, 시험이 종료됐다.

“휴….”

정말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서술형 문제까지 답을 적을 수 있었다. 서영은 다음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 종료 10분 전 시험지를 먼저 제출하고 나갔다.

“수고했어, 신라야.”

우선이 단상으로 올라온 신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주 선배 덕분에 무사히 치렀어요. 이번에는 성적 잘 받고 싶었는데, 또 못 봤으면 울 뻔했어요.”

“무슨 일이었어?”

학생들이 모두 나간 걸 확인한 동주가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잡귀였어. 시험을 못 치르게 방해를 하더라고.”

“저런, 억울할 뻔했네. 교수님이 수석, 차석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셨잖아.”

큭큭 대는 두 사람을 보고 신라는 이미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선배들이 너무 잘하셔서 그런 거잖아요!”

“우리야 역사 과목은 잘할 수밖에 없지. 흐릿한 기억이긴 해도 모두 겪었는걸.”

“아, 조선 시대부터는 아니야. 그때에는 쭉 재판을 받고 있었으니까.”

“그랬지. 그때 얼마나 지루했던지.”

현실감 없는 우선과 동주의 대화에 신라는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전 그럼 가볼게요. 주말 지나고 다시 출근하겠습니다.”

동주가 인사하며 덧붙였다.

“혜령 누나가 신라 신라 노래를 부르더라. 다음 주에 아마 지나친 사랑에 곤욕을 당할 수도 있어.”

“풋, 네.”

신라는 강의실을 빠져나가 복도를 걸었다. 걸음에서도 피곤함이 풍겼다. 목을 두어 번 주무른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기 전 자판기에 들렀다. 뭘 마실까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먼저 지폐를 넣었다.

그녀는 잠시 비켜서 주었다. 그런데 돈을 넣은 이는 한참이 지나도록 음료를 고르지 않았다. 신라는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채고 옆을 돌아봤다. 상앗빛 팬츠에 푸른 계열 셔츠를 깔끔하게 갖춰 입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