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접근
“교수님! 드릴 말씀이-”
붙어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건우의 눈이 커졌다.
“어~ 이따가 다시 들어올까요?”
“……”
신라는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신후는 건우를 조용히 노려보다가 이내 신라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아니. 얘기해.”
“우선이가 어제 불가살한테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요.”
신라의 눈빛이 살아났다.
“이상한 소리요?”
“그만.”
신후가 신라의 앞으로 손을 들며 말했다.
“여기부터는 시험 끝나고 와서 듣도록 해.”
“네?”
“괜한 데 신경 쓰다가 성적 떨어지면 안 되니까. 알지 모르겠지만 이 방 석박사들은 모두 과 수석, 차석이었어. 학부생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와 주지 않으면 곤란하겠지?”
“윽….”
이럴 때만 교수 모드라니. 약이 오른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못 할 줄 아세요?”
“말했잖아. 믿는다고. 다만 이런 속담이 있잖아.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방금까지 궁금한 것을 묻기를 종용하던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속담은 아니었다. 신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신후를 쳐다보다가 미련 없이 목례만 남기고 교수실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신후가 큭큭 목으로 웃음을 삼킨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뒤이어 들어온 우선이 말했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네. 마치 누군가에게 우리의 존재에 대해 미리 들은 것 같았어요.”
동주와 혜령도 교수실로 들어섰다. 동주가 연구실과 통하는 문을 닫으며 말했다.
“제가 그 녀석을 제령 하기 직전 우선이가 듣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지 말렸었는데, 이미 멈추기에는 늦은 시점이었어요.”
“우리의 존재를 아는 귀신들은 꽤 많아. 어떤 점이 특이했다는 거지?”
우선은 잠시 할 말을 골라냈다.
“‘우리’라고 지칭했어요. 귀신들에게는 무리를 짓는 습성이 없어요.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사회성을 가졌지만, 그쪽은 아니죠. 특별한 이유로 인간과 계약을 맺었다면 모를까.”
“귀신과 계약을 맺었다…라. 아주 영력이 강하면서 겁 없는 인간이거나, 혹은 이쪽과 비슷한 존재일 수도 있겠군.”
동주가 신후의 말을 받았다.
“귀신들을 어떤 말로 홀렸든, 그쪽의 목적은 우리를 해치려는 거였겠죠.”
“그래. 후생에 속죄를 하고 있는 자들이 우리뿐이라는 법은 없지. 다만 그쪽은 영악하게도 다른 은밀한 목적을 가진 것 같지만 말이야.”
신후가 사뭇 위험한 느낌의 미소를 내지었다. 즐거워 보였다. 신라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었지만 말이다.
“과연 우리의 환생이 먼저일까, 신들이 저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뭔가 대책을 세운 것이 먼저일까. 고민 좀 해보자고.”
다들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한 다음 연구보고서로 제출해.”
“망할.”
건우가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조교들은 한숨을 내쉬며 연구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 명은 할 말이 남았는지 교수실에 남았다.
“뭐지, 민 조교?”
신후가 소파에 몸을 앉히며 물었다.
“눈치채셨죠? 제가 신라에게 당신 얘기를 했다는 걸.”
“그래. 별로 감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제가 뭘 걱정하는지 아시죠.”
아직 문가에 서 있는 채인 우선은 사뭇 무거운 눈빛으로 한 교수를 바라봤다.
“넌 늘 걱정을 사서 해.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랩장 자리를 줬지만.”
“전 두려워요. 제가 받고 있는 벌이 가끔 너무 버겁거든요. 이 이상 어깨에 뭔가 지워진다면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버릴 겁니다.”
“내 죄가 네 쪽에 가중되는 일은 없어.”
“아뇨,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끝없는 원망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아니에요.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느끼게 되는 자괴감과 자기혐오죠. 내가 당신을 잘 모시지 못해서 또 다른 벌로 고통받는 걸 보게 된다면 내가 날 더이상 용서할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이미 우리 관계는 그렇게 됐습니다. 당신이 날 구해준 그 날부터.”
가만히 우선을 바라보던 신후가 조용히 말했다.
“넌 신이 가장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있어. 잘된 일이지.”
“당신도 그렇게 돼야 합니다. 더이상 금지된 뭔가를 바라지 말고 죗값을 치르고 속죄의 생을 끝내세요.”
“죄…라.”
신후가 작게 웃었다.
“널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 한 가지만 말해줄게.”
신후가 손을 펼쳤다. 금방 교수실 안이 새까만 암흑으로 변했다.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갈 수 없도록 그들만의 공간을 만든 것이다. 우선은 조금 당황했지만 움직이지 않고 신후만을 응시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은 맞아. 인정했기 때문에 환생하는 것에 동의했지. 하지만 그들의 뜻에 완전히 따른 것은 아니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들이 당신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아무리 어둠으로 차단했어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신들에게는 들리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후는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조소까지 머금으며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신도 내게 죄를 지었거든.”
* * *
정기검진 문자를 받은 신라는 오랜만에 익숙한 병원을 찾았다. 그곳은 조모(祖母)가 생전에 데리고 다녔던 정신과 진료 병원이었다.
어렸을 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공포로 불안증세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의사와 오랜 상담을 하면서 얻게 된 것은 ‘괜찮다’라고 말하고 최대한 숨기는 것이 살아가는 데 편하다는 달관이었다.
신후를 만나고 몽유병의 이유도 알았고 거의 해결했으므로, 오늘을 마지막 진료 날로 삼기로 한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진료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갔다.
“유신라 환자, 이리로 와 앉으세요.”
신라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웬 낯선 젊은 의사가 진료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의 가운에는 ‘강 현’이라는 외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선생님이 바뀌셨네요.”
“원장 선생님이 몇 달간 긴 여행을 떠나신다고 해서, 제가 잠시 이곳을 책임지게 됐습니다. 진료 기록을 보니 상담을 받은 지 꽤 오래됐네요? 앉아요.”
어색한 기분을 최대한 감춘 신라는 일단 진료실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몸을 앉혔다. 곧 젊은 의사가 차트를 들고 다가와 건너편에 앉았다.
‘와….’
상당히 멀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평소와 달리 평일임에도 환자 수가 많다 싶었는데, 이미 이 병원에 잘생긴 젊은 의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왠지 잘생긴 남자를 봤을 때의 두근거림은 없었다. 거의 매일 붙어 지내는 상사이자 스승에게 적응이 되기라도 한 모양이다.
“남자친구가 있나 봐요?”
“네? 아뇨.”
“이런. 민망하네. 꽤 미인이시기도 하고, 절 돌 보듯 보시길래. 자랑하는 건 아니고 그런 시선 오랜만에 받아보거든요.”
너무 뻔뻔해서 뻔뻔한 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게 만드는 화법이었다. 더군다나 의사가 하는 말이라 쓸데없이 믿음이 갔다.
“그러…시구나.”
“처음 만남이라 농담 좀 해본 겁니다.”
“네…. 원래 연애에 관심이 없어서요. 잘생기셨다고 느끼고는 있었어요.”
“보통은 진짜 그렇게 느꼈으면 대놓고 그렇게 말 안 하거든요. 두 번 민망하네요. 하하. 그런데 연애에는 관심을 가져보는 게 좋을 거예요. 신라 양이 겪었던 증상들은 주위에 살뜰히 보살펴주는 사람들이 많아야 빨리 낫거든요.”
“그렇군요.”
괜한 질문이 아니었던 거다. 신라는 의외로 날카롭고 영민한 젊은 의사의 이름을 다시 봤다.
“강 현… 선생님.”
“강 선생으로 불러주세요. 요즘 말로 줄여 불러도 되고.”
“강 선생님. 사실 오늘은 마지막 진료라고 말씀드리려고 왔던 거예요. 증상들이 거의 사라졌거든요.”
‘역으로 그 증상들을 이용 중이긴 하지만.’
민망함에 속으로만 중얼거리는데, 의외의 말이 들렸다.
“아쉽네요.”
“네? 뭐가….”
“사실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아, 나쁜 뜻은 없으니까 기분 상하지 말아요. 신라 양이 어렸을 때부터 겪었다는 비과학적인 현상들…. 원장님 소견과는 다르게 판단했어요. 마냥 정신 착란에 분열증이라고 보기에는 앞뒤 맥락도 있고, 과장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가요.”
신라는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는 의사는 여태껏 없었다.
“또 이렇게 명문대에 잘 다니고 있는 친구가 심신이 불안정할 것 같지는 않아요. 잠깐 얘기를 나눠봤지만 남자 못지않은 강인함이 느껴진달까.”
신후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 네가 왜 학생들 틈에서 특별히 단단해 보였는지 좀 알게 된 것 같군.
그녀는 기분이 묘해졌다. 좀 더 젊은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그런 친구가 두려움을 호소했으니, 겪었던 일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이었겠어요. 아마 일반인이었다면 구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이 나가버리고 말았겠죠. 안 그래요?”
“그러니까, 강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강 현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탁자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빙의’… 되는 거죠?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