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연민
고고학 연구실의 사람들이 또 단체로 깁스와 붕대를 했다는 소문을 듣고 학과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미술사학을 가르치는 50대 여교수는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실부터 들이닥쳤다. 테이블에 모여 유물을 관찰 중이던 조교들이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 교수님. 안녕하세…”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오른팔에 깁스를 한 우선과 뺨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동주와 건우, 마지막으로 소파에 앉아 링거를 맞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혜령을 보고 그녀는 뒷목을 쥐었다.
“너희들 도대체 밖에서 무슨 연구를 하면서 돌아다니는 거니!”
“별 건 아닌…”
학과장은 우선의 멀쩡한 팔을 잡아당겨 구석으로 끌고 갔다.
“우선이 너라도 바른대로 말해. 내가 널 학부 시절부터 얼마나 좋게 봤는지 알지?”
“아… 그게….”
“솔직하게 말해봐. 혹시-”
잠시 사무실 쪽을 곁눈질로 확인한 여인은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한 교수님이 너희 때리니…?”
“…네?”
그때 예고 없이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기겁하며 숨을 집어삼킨 것은 학과장뿐이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학과장님.”
신후가 문턱에 기대선 채 느릿하게 말했다.
“하, 하, 한 교수님. 사무실에 계셨군요.”
“놀라서 찾아오신 모양이네요.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전에 더 주의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잠시 이상한 의심을 했던 학과장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절레절레 털었다. 애초에 학교에서 크게 투자해서 스카우트해 온 인재다. 설마 미친놈을 데려왔을까.
“도대체 이게 몇 번째예요? 총장님께 변명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명심하겠습니다.”
“학생들 치료 제대로 시켜주세요. 어디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으휴! 하여간.”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문가로 향하고, 다섯 사람은 서로 싱거운 눈빛만 교환할 뿐이었다. 그런데 학과장과 거의 동시에 문을 연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신라였다.
“어머, 신라야. 학부 연구생으로 들어왔다더니, 시험 기간에도 출근하는 거니?”
“안녕하세요, 교수님. 잠깐 가지러 갈 게 있어서 들렀어요.”
“그래, 공부 잘… 어머! 너는 손이 또 왜 그래!”
이번에 학과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붕대를 감고 있는 신라의 오른손이었다. 신후도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라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무거운 거 들다가 근육이 놀라서요. 괜찮아요.”
“정말이지?”
“네.”
학과장은 새침한 눈초리로 한 교수 쪽을 흘겼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애들 치료 똑바로 시켜요!’라는 마지막 당부만 남길 수밖에.
졸지에 모든 이의 시선을 받게 된 신라가 어색한 걸음으로 본인의 자리로 갔다.
“다들 괜찮…으시죠?”
“신라~”
혜령이 우는 목소리로 신라를 불렀다. 몸이 성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끌어안았을 것이다. 건우가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는 다쳤단 소리 없었잖아. 손은 또 언제 다친 거야?”
“아… 정말 저 혼자 다친 거예요. 걱정 마세요.”
신라는 전공 서적을 크로스백에 챙겨 멨다. 우선이 그녀에게 다가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해.”
“선배가 훨씬 많이 다치셨잖아요. 선배야말로 괜찮으세요?”
“우리야 다쳐도 금방 나으니까. 어제 같은 일은 사실 드물어. 우리가 방심하기도 했고. 너한테 급박한 상황에서 귀력을 쓰게 만들고 말았어.”
동주도 미안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어제 많이 놀랐지. 후유증은 없어?”
“괜찮아요. 조금 피곤한 것밖에는 없어요.”
사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잠이 들었다면 이 정도로 기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자 동이 트기 직전인 새벽이었다. 그가 다녀간 것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없었다. 벽에 부딪혔던 손등에 통증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정말 꿈이라고 치부했을지도 몰랐다.
조용히 신라를 응시하던 신후가, 연구실을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먼저 교수실로 들어갔다.
신라는 그가 자신에게 다녀갔던 일을 잊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깨어있는 동안 보았던 신후는 이성이라곤 거의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다가와서 묵묵히 붕대 감은 손을 살피는 그로 인해 그 생각이 깨졌다.
“많이 아파?”
“…아뇨.”
“아팠어?”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내가 낸 상처는 되돌리는 게 가능하지만, 단순히 물리적으로 입은 상처는 치유할 수 없어.”
“금방 나을 거예요.”
신라는 신후의 허벅지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가 공격성을 주체할 수 없어 스스로 상처 입힌 자리였다.
“다리는요?”
“난 치유가 빠르니까. 이제 통증은 거의 없어.”
“보름밤일 때면 항상 그런 모습인가요?”
신라의 물음에 신후는 자조적으로 미소 지었다.
“어떤 모습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실망했어요.”
신후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신라는 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놀라서 기절할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그냥 딱 당신이더라고요.”
그 말에 신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안도, 허무함이 버무려진 웃음이었다.
“겁도 없이 아무에게나 문 벌컥벌컥 열어 주는 걸 혼내고 싶은데, 쳐들어간 게 나니까 스스로 반성해야겠지.”
“마음만 먹으면 문 정도는 간단히 열고 들어올 수 있었잖아요. 그 이성을 믿은 거죠.”
“믿어서 결과가 어땠지?”
신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제 그 키스의 흔적으로 상처가 남은 아랫입술에 무의식적으로 혀를 대었다. 신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그는 엄지로 그 자리를 훑어냈다.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나며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믿어주는 건 좋지만 보름밤에는 아니야. 귀걸이는 다시 줄 테니, 그날에는 차라리 빼고 다녀.”
“평소에는 자제력이 더 없는 건가요?”
“내가 쳐놓은 결계 안에 있지 않으면 주변의 모든 존재가 이성을 잃고 혼절하거나 반 정신이 나가게 되지.”
“……”
끊임없이 살의와 욕정, 분노, 휘몰아치는 감정들을 억지로 가두느라 발버둥 치던 가엾은 짐승. 차라리 타인을 해친다면 그 감정이 해소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신후는 스스로를 고문하는 길을 택했다.
“그 괴로움을 항상 홀로 견디나요?”
“…어제는 아니었지.”
나지막이 말하는 신후의 얼굴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신라는 차분히 내리깐 시선으로 그의 입술을 응시했다. 지금은 이 건물 내에 있는 누구보다도 이성적인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네가 날 무서워하길 바라지 않아.”
지혜로운 어둑시니는 알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이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바람을 입 밖으로 꺼내놓는다는 것은….
‘어리광.’
한신후는 답지 않게 떼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신라는 가감 없이 사실만을 말했다.
“무섭지 않아요. 지켜준다고 했잖아.”
“그래. 지킬 거야.”
두 사람은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않던 두 입술은 이내 안타까운 숨을 내쉬며 멀어졌다. 더이상 다가가는 것은 껍데기뿐인 애정, 그저 욕(慾)일 뿐이란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신라는 한 걸음 담담하게 물러났다.
‘당신과 나, 같다고 했어. 그러니 먼저 앞서가거나 헛된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겠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그 주인이 따로 있을 수도 있잖아.’
신후도 마찬가지로 돌아서서 책상 쪽으로 걸어가 기대섰다.
“귀신의 능력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된 건 대단한 수확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상대도 네 몸을 이용해서 세상에 능력을 쓸 수 있다는 말이 돼.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선 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야.”
“명심할게요.”
처음에 한신후는 단순히 신라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생각이었다. 제자 중에 귀력의 화수분이 있다니,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힘은 생각보다 컸고, 누군가는 악한 마음을 품고 그녀에게 접근할 것이라는 기분 나쁜 확신이 들었다. 이쪽 눈에 먼저 띄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는가.
“널 다치게 했으니 대가로 네가 궁금해하던 걸 알려줄까?”
“뭐든지요?”
“뭐가 제일 궁금한데?”
신라는 선뜻 질문을 골라내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당신이 증표를 남겨놨다는 사람을 찾게 되면, 속죄하느라 빼앗겼던 그 두 가지를 되찾을 수 있는 건가요?”
신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제일 궁금한 거야? 감동인데.”
“그냥 정말 별 뜻 없이 궁금해서요.”
“글쎄. 자세한 걸 세세히 말해줄 순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되찾을 수 있지.”
“한 가지….”
신라는 그것이 ‘사랑했던 기억’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면 그 감정은, 되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는 소리인가?
‘원래 존재하고, 이해했던 감정들을 모두 잃었다가 하나씩 되찾아야만 했던 사람의 심정은 어땠을까. 상상조차 가지 않아.’
신라는 자칫 동정하는 표정을 지을까 봐, 부러 고개를 숙였다. 그때 한신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묘해.”
“…뭐가요?”
처음으로 신라에게서 시선을 거둔 신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영원히 빼앗길 것이라고 말했던 감정 외에 나머지 감정들을 되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어. 똑같이 웃고, 똑같이 분노하고, 슬퍼하고.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항상, 이게 정말 내가 느끼는 감정일까, 학습되어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거든.”
“……”
“그런데 네 앞에서는 그게 의심할 바 없이 정답이라고 채점이 된 기분이야. 이건 다른 누구에게서도 관찰한 적이 없었던 느낌이거든. 오롯이 내 거야.”
만일 근처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저 남자를 쓰다듬고 말았을 것이다. 신라는 움찔한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런 동태를 눈치챈 신후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칭찬해줘. 인간은 긍정적인 강화물이 있어야 그 행동을 또 하게 되잖아.”
교수다운 해석에 신라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건 동물 전반에 걸친 이론 아니었나요?”
“보름마다 짐승이 되기도 하니까. 어서.”
신라는 못 이긴 듯이 손을 뻗었다.
“어떡할까요. 잘했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야 할까요?”
“네가 원하는 것으로.”
“나중에 하극상이라고 혼내는 건…”
참을성이 바닥 난 신후가 그대로 신라의 팔을 잡아당겨 코앞에 다가오게 만들었다.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자에게서 신라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어서.”
신라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깔끔하게 면도가 된 턱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좀 더 나아가 손 전체로 뺨을 쓰다듬어 올리니, 신후의 옅게 쌍꺼풀진 눈이 자연스럽게 감겼다. 그르릉, 하며 기분 좋은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문이 두드려지고 누군가 벌컥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