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보름밤
우선과 혜령을 먼저 택시에 태운 동주는 건우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조수석에 올랐다. 그들이 탄 차는 곧장 병원으로 떠났다.
건우는 신라에게 ‘따라와’ 중얼거리듯 말하더니 더 큰 차도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왠지 평소보다 어색한 모습이라 신라는 말없이 그를 따랐다.
택시 기사가 라디오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건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가… 왔다 간 거냐?”
“네?”
“불화살 말이야. 어떻게 쏜 거야?”
“저도 잘은…. 여러 목소리 중 하나가 그랬어요. 자기는 불을 다룰 줄 아니까 해결해주겠다고. 그래서 고민할 새 없이 이용한 거예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도 모르고.’
건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신라를 쳐다보다가 이내 소심하게 얘기했다.
“…했다.”
“네?”
“잘했다고. 하지만 앞으로 조심해. 그 힘을 쓰는 대가로 네 귀력을 빨리는 걸 테니까.”
본인이 칭찬해 놓고, 민망한 모양인지 창가로 고개를 돌리는 건우였다. 그런데 이미 그의 귓불이 터질 듯이 달아올라 있어서 신라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씨, 왜 웃어?”
“아뇨, 그냥. 좋아서요. 칭찬받아서.”
“…싱겁긴.”
건우는 신라를 빌라 앞까지 데려다줬다. 현관문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사양한 신라는 고맙단 말과 함께 급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건우도 상처를 많이 입었을 것이기 때문에 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하아….”
그녀는 방에 들어와 현관문을 닫고서야 힘이 풀린 다리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몇 시간 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돌이켜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문득 떠올랐다. 유독 깁스나 반창고를 많이 하고 다니는 한 교수 연구실의 조교들을 보고, 그들이 오지 탐험을 하며 보물을 긁어모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돌았었던 것이.
“뭐, 실상은 더 허무맹랑하지만….”
그때 덜컹, 하며 기대 있던 현관문이 움직였다. 깜짝 놀란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분명 기척이 느껴졌지만, 평범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 잘 알고 있었다.
“누구세요!”
잠시 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나야.
“…교수님?”
신라의 손이 당장 문을 열기 위해 뻗어졌다.
- 안 돼, 열지 마.
신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찾아와 놓고, 문을 열어 주지 말라니? 하지만 늘 여유롭던 목소리가 왠지 버거운 것을 견디듯 떨리고 있어 일단 그의 말을 따랐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밤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괜찮…으세요?”
- 내가 물을 말이군.
“…전 다친 데 없어요. 조교님들이 많이 다쳤죠.”
- 생각이 짧았어. 내가 없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빨리 해결해야 인명 피해가 없었을 테니까요.”
- 그래….
그의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게 느껴졌다. 신라는 자꾸만 튀어 나가려는 손을 꽉 쥐었다.
“정말 괜찮아요? 힘들면 돌아가세요, 어서.”
-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 그 보석은 물리적인 힘으로는 부서지지 않으니까.
신라는 그제야 손으로 매만져 귀걸이의 보석이 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고작 이게 깨졌다고, 괴로운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제가 이 문을 열면 어떻게 되죠?”
- 하지 마.
“많이 괴로운 거죠.”
- …….
“뭐가 그렇게 괴로운지 궁금해.”
-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절대 열지 마.
‘열어줘. 제발 열어줘. 그렇게 들리잖아.’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신라는 결국 도어락을 풀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검은 아지랑이가 밀려 들어와 그녀를 벽으로 밀쳤다.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 입안을 마구 헤집었다. 뜨거운 숨, 손을 깍지 껴 벽에 밀어붙이는 체온을 느끼고서야 신라는 자신이 잡아먹힐 듯이 키스를 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읍-”
“추읍….”
시야가 온통 칠흑으로 가득 찼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지랑이가 요동치며 그의 감정의 격동을 나타냈다.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너무나 절박해서 오히려 하고 싶은 대로 둬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크윽…”
검은 털을 가진 짐승의 모습이 언뜻 겹쳐졌다가 사라진다. 아마도 귀력이 제어가 안 되는 보름밤에는 전생의 모습마저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휘몰아치는 감정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만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 게 아닐까. 부족한 감정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다른 감정들이 폭주하는 게 아닐까.
‘불쌍한 사람.’
신라는 자신도 모르게 신후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반사적으로 튕겨내진 손이 벽에 부딪혀 신음이 터졌다. 제어되지 않는 악력에 신라의 셔츠가 뜯어져 단추가 튕겨 나갔다.
가슴팍의 살결이 그대로 드러났다. 신후는 고개를 숙인 채 주억거리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손에 긴 짐승의 발톱이 돋아나, 신라는 포기하고 눈을 꾹 감아버렸다.
콰직, 발톱이 박혀 들어간 것은 신후 자신의 허벅다리였다. 깊이 팬 살에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허억… 허억….”
“……”
겨우 두 눈에 초점을 잡은 신후가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완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보통 사람의 형상이 아닐 것이다. 짐승과 인간, 그 애매한 경계. 기절하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여인의 눈 속에 두려움은 없었다. 분노도 없었다.
“알고 싶어졌어.”
갈라진 목소리가 붉은 입술 틈에서 흘러나왔다. 신후의 시선이 홀린 듯이 그 입술에 닿았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 어떻게 해야 되찾을 수 있는지.”
“……”
“아무 감정도 없어, 지금은. 그냥 궁금할 뿐이야. 그래서 같아. 우리.”
아까 벽에 부딪혀 피멍이 든 손이 다시 올라와 신후의 뺨을 감쌌다. 이번에는 움찔 떨기만 할 뿐 얌전히 그 손길을 받는다.
“없다고 초조해하지 마. 없다는 걸 아는 건, 분명 있었다는 거니까. 찾을 수 있어.”
“……”
“찾을 수, 있어….”
스륵, 옆으로 무너진 몸이 단단한 팔에 떨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시야가 또렷해지고 호흡이 편해졌다. 신후는 정신을 잃은 신라의 얼굴을 보면서 거짓말처럼 이성을 되찾았다. 다리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없다는 걸 아는 건, 분명 있었다는 거라고….’
신후는 그녀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흐트러져 있는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가라앉은 눈빛이 작은 얼굴 곳곳에 흩뿌려졌다.
“그래…. 없네.”
분명 있었을 텐데. 여기에.
그는 신라를 끌어당겨 가까이에서 조금 더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이마에 입을 맞췄다.
* * *
제석천은 신(神)과 귀신(鬼神)의 경계가 뚜렷해야 한다고 늘상 강조하던 자였다. 때문에 어둑시니가 멋대로 인간의 명을 빼앗아 다른 인간의 명을 늘린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며 직속 수하이자 사천왕 중 하나인 다문천왕(多聞天王)에게 직접 어둑시니를 벌할 것을 명했다.
- 너에게서 인간의 칠정(七情)(*불가에서 일컫는 일곱 가지 감정)을 빼앗아 빈껍데기로 속죄의 삶을 살아갈 것을 명한다. 희(喜) 노(怒) 우(憂) 구(懼) 애(愛) 증(憎) 욕(慾), 네 번의 삶을 회귀해야 비로소 그 감정들을 차차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그중 애(愛)- 사랑의 감정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