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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불가살(不可殺) (10/126)

9장. 불가살(不可殺)

대부분이 잠든 어두운 새벽녘.

그르륵… 그르륵…

쇠끼리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조용한 공터를 울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반대편 컨테이너 뒤에서, 고고학 연구실 조교들과 학부 연구생 신라는 숨죽인 채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최대한 보는 눈이 없도록 미끼는 도시 외곽의 미개발지에 설치됐다. 자신의 미끼에 보기 좋게 걸려든 불가살을 보고 기분 좋게 방망이를 휘두르다가 컨테이너 벽을 쳐버린 건우는 깜짝 놀라 방망이를 사라지게 만들었고, 근처에 서 있던 혜령이 그런 건우의 뒤통수를 올려붙였다.

“쉿. 온다.”

이번 작전의 지휘는 우선이 맡았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신후는 자택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신라는 그가 왜 오지 않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밤하늘에는 유난히 큰 보름달이 떠 있었으니까.

그르륵… 그르륵…

어둠 밖으로 요괴가 형체를 드러냈다. 분명히 그림자는 집채만 한 물소의 형상이었건만, 걸어 나오는 건 웬 남자 인부였다. 그것을 보고 조교들은 곤란함에 신음했다. 그냥 요괴였다면 그대로 속박해 성불이나 제령을 시켜버렸을 텐데, 인간의 육신에서 빼내는 일까지 해야 해서 상황이 두 배는 복잡해진 것이다.

우선은 그의 무기인 쌍검을 허리 뒤춤에 꽂아 넣은 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먼저 이유를 알아야겠어. 왜 자제력을 잃고 폭주하고 있는지.”

“혼자 괜찮겠어?”

동주가 염려를 표하자, 우선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홀로 공터 쪽으로 걸어 나갔다.

불가살에 빙의 당한 남자 인부는 무아지경으로 쇠붙이를 깨물어 씹고 있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쇠붙이의 환각에서 진짜 쇠붙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선이 바로 근처까지 다가갔지만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흠, 흠.”

우선은 일부러 크게 기침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 상황에 매너를 차리는 우선을 보고 건우는 그만 웃음이 터져 배를 접고 끅끅댔다. 금방 혜령에게 등허리를 두들겨 맞아 웃음이 아닌 비명을 삼켜야 했지만 말이다.

“안녕. 불가살 맞지?”

이름이 불리자 행동을 뚝 멈춘 인부가 고개를 갸웃하며 치켜든다. 흰자가 지워진 새까만 물소의 눈. 그걸 본 신라는 그만 소름이 돋아 팔뚝을 쓸었다.

“오랜만이야. 식사하는데 미안하지만, 잠깐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광…철?”

신라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환생을 했어도 요괴끼리는 풍기는 기운으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최근에 여기저기서 쇠붙이를 많이 먹고 다녔더라고. 그런데 건축물에 있는 쇠붙이를 먹으면 위험해. 건물이 무너지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인간들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거든. 공사 과정에서는 네가 몸을 빌리고 있는 그 인부도 굉장히 위험하고. 그걸 몰랐던 거야?”

“……”

“몰랐던 거라면 그냥 넘어가 줄 수 있다만.”

“모르지… 않았다면?”

그르륵… 그르륵… 쇠가 긁히는 소리가 왠지 음산한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알고도… 그런 곳만 노렸다는 거야? 어째서?”

“예전에도… 네가 말했다…. 쇠붙이 먹으면… 이 나라 인간들은 죽고 말아…. 그래서 쇠붙이 안 먹었다…. 근데도 전쟁은 났다… 인간들 많이 죽었다….”

“……”

“너는… 거짓말했다… 사람들도 똑같이… 거짓말했다… 난 굶었다… 배 많이 고팠다… 슬펐다….”

“아…. 그건 오해야, 내가 차근차근 설명할게.”

“필요… 없다…. 너희 말… 다 거짓말…‘그’가 그랬다….”

“그?”

예상 밖의 말을 듣고 우선이 인상을 찌푸렸을 때였다. 대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몰래 다가오던 조교들이 점점 공터를 뒤덮을 듯이 커지고 있는 불가살의 그림자를 먼저 발견하고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민우선, 피해!”

동주가 외친 찰나, 인부의 팔이 거대한 쇠방망이로 변하며 우선을 향해 휘둘러졌다. 처음 공격은 용케 피했지만, 또 한 번 날아드는 칼날은 검을 뽑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카강- 묵직한 마찰음이 울리고 우선의 몸이 몇 미터 뒤로 붕 떠 날아갔다. 날렵하게 착지한 그의 뒤로 다른 조교들이 달려왔다.

“괜찮아?”

“응.”

우선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얼얼한 손목을 몇 차례 돌렸다. 쇳덩이 그 자체로 이루어진 요괴라 그런지 공격의 무게감은 차원이 달랐다. 뒤로 물러나는 반동으로 뛰어올랐기에 망정이지, 정통으로 부딪혔다간 그대로 팔뼈가 아작 날 뻔했다.

“혜령 누나는 뒤쪽에서 엄호해 주세요. 나랑 건우 형이 저 녀석을 속박시키고, 동주가 제령하는 걸로. 제대로 맞았다간 뼈가 부러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 테니 다들 조심해.”

“오케이.”

건우가 환각술로 불가살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틈을 타 우선이 검과 부적을 이용해 움직임을 속박하려 했다. 그러나 모든 공격을 오로지 힘으로 깨부숴버리는 불가살의 괴력에 다들 속수무책으로 몸을 피하기 바빴다.

설상가상 흥분하고 만 불가살이 날카로운 쇠침을 뿜어내 조교들의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었다면.’

멀리서 활을 쏘는 혜령의 뒤에서 신라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댔다. 이대로 선배들이 다치는 걸 구경만 하고 싶지 않았다.

“신라, 더 뒤쪽으로 물러나 있어!”

혜령이 소리치며 신라를 돌아본 순간, 그녀의 쪽으로도 쇠붙이가 날아들었다.

“박혜령!”

“혜령 선배!”

혜령은 뒤늦게 몸을 피했지만 이미 옆구리 살을 베고 간 쇠붙이가 컨테이너 벽에 그대로 박혔다.

“윽….”

그녀의 손에서 활이 떨어졌다. 신라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혜령에게 달려갔다.

“선배, 괜찮으세요? 얼마나 다친 거예요? 구급차를…”

“구급차는 안 돼. 사람이 얽혀 있잖아. 기억도 없는 저 사람 감방에 갈지도 모른다고.”

“그치만 피가…!”

피투성이가 된 건 동주와 우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끝까지 불가살을 놓아주지 않았다. 남들보다 괴력을 가진 동주가 부적을 이용해 불가살을 잠깐 속박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선이 재빠르게 검을 거꾸로 들어 인부의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그 위로 칼의 손잡이를 내리찍었다.

“큭-!”

그 충격으로 불가살의 영(靈)이 인부의 머리 뒤로 뛰쳐나왔다. 정신을 잃은 인부는 그 자리에서 널브러졌다.

“지금이에요, 혜령 누나! 활을…!”

동주가 뒤쪽을 쳐다보며 외쳤다. 그러나 아차 하는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쓰러져 있는 혜령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 그르륵… 역시 너희… 우리의 적… ‘비…랑…’말대로….

‘우리? 누구의 말대로?’

이번에는 분명히 들은 우선이 욱신대는 팔을 감싼 채 불가살에게 다가갔다.

“누군가가 너에게, 우리가 적이라고 말한 건가?”

- 나뿐 아니야… 우리 모두… 너희를 알지…. 그르륵….

“그게 누구지? 그건 사실이 아니야. 우린 속세를 어지럽히는 귀신들만 쫓는다고.”

- 속세… 어지럽혀도… 우리가… 이긴다.

‘틀렸어.’

우선은 불가살의 회유를 포기했다. 이미 악해져 버린 영혼을 귀화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제령 방법이다. ‘불가살(不可殺)’, 죽이는 것이 불가하다고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튼튼했기 때문에 무력으로는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다.

그때 웅크리고 있던 불가살이 몸집과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우선에게 달려들었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우선이 뒤늦게 검을 휘둘렀지만, 불가살의 몸통에 부딪혀 날아가고 말았다. 동주가 재빨리 달려가 우선의 몸을 받으며 함께 바닥을 굴렀다.

“신라! 어서 도망쳐!”

우선이 바닥을 짚으며 가까스로 외쳤다. 하지만 신라는 혜령을 두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혜령의 활을 대신 들고 일어섰다.

“신…라.”

“제가 해볼게요.”

“무리야… 어서 도망쳐….”

“아까부터 계속 시끄럽게 굴고 있었어요.”

“뭐?”

신라는 달려드는 불가살을 노려보며 활을 제대로 들어 올렸다.

“제 머릿속에서요. 그리고 다들 똑같은 소리를 하잖아요.”

거리낄 것이 없어진 불가살은 그녀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건우가 그사이에 끼어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고작 시간을 벌 뿐이었다.

신라는 화살도 없이 천천히 활의 시위를 당겼다. 신라를 지켜보던 조교들의 눈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는 것처럼 커졌다. 당겨진 활시위에서 불꽃이 나타나더니 화살의 형상을 만든 것이다.

“불가살은 죽일 수 없지만(不可殺), 불로 죽일 수 있다(火可殺).”

나지막이 중얼거린 신라가 그대로 깔끔하게 활의 시위를 놓자, 세차게 튀어 나간 불화살이 불가살의 몸통을 훑고 지나갔다. 빗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애초에 목적은 그 몸통에 불만 옮겨붙이는 것이었다.

- 키이익…!

처음으로 고통의 비명을 내지른 불가살이 거대한 몸집을 주체하지 못하며 날뛰었다. 쇳덩이로 이루어진 몸이 점점 달궈져 붉게 변했다.

혜령은 불화살을 쏜 신라가 순간 귀신의 힘을 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의 신라의 눈동자는 붉게 변해 있었으니까.

“허억, 허억….”

신라는 활을 바닥에 내려놓고 기운 빠진 모습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귀신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이토록 피곤한 일인 줄은 몰랐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서 그을린 채 달려 있던 귀걸이의 보석이 파직, 깨지고 말았다. 검은 아지랑이가 잠깐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불가살의 꿈틀대는 움직임이 멎자마자, 동주는 한시름 덜었다는 얼굴로 그의 장검(長劍)을 뽑아 들었다. 우선이 동주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부적을 꿰뚫은 장검은 불가살의 몸까지 관통했다. 거대한 몸체가 껍데기부터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려 사라졌다.

“…끝났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건우는 허무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대자로 널브러졌다.

동주는 아까 불가살에 빙의됐던 인부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사내는 다행히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다들 괜찮지?”

연구실 사람들을 챙기는 것은 랩장인 우선 몫이었다. 신라가 혜령을 부축해 걷는 것을 도왔다.

“혜령 선배 상처가 너무 커요.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이쪽은 깁스야.”

동주가 불시에 팔뚝을 잡아 올려 우선은 억눌린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부러졌지?”

“…알면 놔 줄래?”

그나마 가장 멀쩡한 사람은 신라였다. 신라는 조교들을 이끌고 차도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선배들은 다 같이 병원으로 가세요. 전 따로 택시 잡아서 집으로 갈게요.”

“그건 안 돼.”

단호하게 말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건우였다. 다들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귓불을 붉힌 건우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이 상황도 교수님한테 된통 혼날 상황인데, 얘를 혼자 보냈다가 어떤 경을 치려고?”

“전 정말 다친 데 없어서 괜찮아요.”

“시끄러워. 나도 별로 안 다쳤으니까 데려다준다고 할 때 조심히 따라와.”

답지 않게 멋진 척이라니, 혜령은 웃음이 터졌다가 옆구리가 아파 웅크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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