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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수상한 움직임 (9/126)

8장. 수상한 움직임

오후 수업을 마치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물결을 이룬 캠퍼스를 거닐던 신라는 산책을 나왔던 동주와 만나 함께 연구실로 향했다. 동주는 사학과 건물에 들어가기 전 신라를 잠깐 세우더니 자판기에 들러 그녀에게 음료수를 하나 사 주고 자신은 생수를 세 병 샀다.

“물은 왜 사세요? 정수기가 있는데….”

“아…. 자주 없어지거든, 연구실 안의 물은…. 혹시 몰라서.”

신라는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그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짐작되는 것이 있어 더는 묻지 않았다. 아마도 우선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그는 가뭄의 요괴였다고 했으니까.

“…많이 괴로운 거겠죠? 전생의 기억이라는 게….”

신라가 조교들에 대해 어느 정도 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동주는 뺨을 긁적이다가 잠깐 얘기를 하기 위해 벽에 기대섰다.

“환생을 빨리 시작한 교수님과 달리 몇백 년 동안 재판만 받은 우리는 구체적인 기억이 자연스럽게 지워졌어. 속죄의 삶을 살려면 자신의 죄를 떠올리며 살아야 하는데 이미 기억은 희미해져 버렸으니, 형체 없는 귀신들에게서 그나마 가장 뚜렷했던 것을 끌어안고 살게 한 거야.”

“‘감정’이군요.”

“그래. 우선이의 경우에는 그 감정의 대부분이 원망이었지. 일생에 가장 바랐던 소원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을 때의 원망. 그건 갑자기 불안 증세처럼 찾아오는 거라서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늘 괴로운 일이야.”

“선배는, 괜찮으세요?”

“나?”

동주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덤덤히 말했다.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탐관오리를 골라 잡아먹었던 요괴였어. 탈춤에서 곧잘 보이는 사자의 형상을 한 탈, 알지?”

“네, 알아요. 이름이 ‘비비’였죠.”

“아무리 탐관오리라 할지라도 인간을 잡아먹은 건 죄질이 컸지. 게다가 그건 정의감이 아니라 거의 본능 같은 거여서, 탐관오리만 보면 살의를 주체할 수 없었던 거야.”

“살의….”

동주는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신라에게 피식 웃어 보였다.

“걱정 마. 누굴 죽이고 싶다, 까지는 아직 가본 적 없어. 다만 불의를 보면 잠깐 분노 조절 장애가 오는 것뿐이지.”

“건우 선배는-”

그때 유리문이 벌컥 열리면서 건우가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그를 돌아봤다.

“건우 형, 왜…”

“도, 도, 도망쳐야 돼. 나 여기 있다고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아… 그래요.”

거의 혼비백산해서 어딘가로 줄행랑을 치는 건우를 보고, 신라는 아마도 그가 혜령에게 뭔가 잘못을 해 도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각해진 얼굴로 쯧쯧 혀를 차는 동주를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건우 선배가 왜 저러는 거예요?”

“예전 기억 때문에. 저건 말하기가 좀 기네. 하지만 옳은 일을 하려고 하다가 저렇게 된 거니까 보면 딱하게 생각해주면 돼.”

“네….”

신라는 건우가 사라진 쪽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신후에게 듣기로, 건우는 신후처럼 귀태로 태어난 누군가의 심부름꾼으로 살았던 도깨비였다고 했다. 그 뒤에 어떤 구체적인 사연이 있을지는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다짐했다.

사학과 건물 쪽으로 시선을 확 사로잡는 여인이 모델 포스를 풍기며 걸어왔다. 살짝 컬이 들어간 검은 단발은 세련되기 그지없었고, 짧은 가죽 재킷에 긴 부츠는 그녀의 기럭지를 더 길어 보이게 만들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넋을 놓고 쳐다볼 정도였다.

“신라야~!”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모두가 예상했다. 그녀가 달려가 안기는 품은 훤칠한 남자 쪽일 거라고. 그러나 남자는 깜짝 놀라며 물러났고, 애초에 여인이 뛰어든 품은, 아니 와락 품에 안은 것은 긴 생머리의 여대생 쪽이었다.

“윽!”

“보고 싶었어~!”

“네, 저, 저도요….”

“으이구, 귀여워!”

신라는 혜령이 왜 애교도 없고 후배로서 살갑지도 못한 자신을 이렇게 예뻐라 해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번번이 더 부끄러울 뿐이었다.

“어디 다녀오세요?”

“응. 약속 있어서. 오늘 패션 죽이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만나고 왔거든~”

“네, 엄청 예쁘세요.”

“그치? 그런데 걔는 예쁘다는 말은 절대 안 해주더라. 언젠가는 말하게 하고 말 거야!”

동주가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누나. 거짓말을 억지로 시키는 건 저 안 보이는 데서 하세요.”

혜령은 분명히 상큼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니 이마에 핏줄이 서는 소리가 들린 건 착각이다, 라고 신라는 생각했다.

“동주야. 그러고 보니 우리 따로 할 얘기가 있었지?”

“아하하, 전 우선이한테 가봐야 해서….”

“우선이 챙기기 전에 네 명줄부터 챙겨야 할 것 같은데?”

“알아서 챙기겠습니다. 호의 감사합니다.”

투닥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신라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전생이 어떠했든 모두들 서로를 아끼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 * *

한 교수가 사무실에서 직접 연구실로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가 호출하면 조교들이 그를 방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벽 너머로 통화하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더니, 그가 문을 열고 직접 연구실로 들어왔다.

“잠시 모여보지.”

세 명의 조교와 신라가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신후의 앞으로 모였다. 그들을 둘러본 신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건우는.”

동주가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또 그거죠, 뭐.”

“앞으로는 어디로 도망치거든 묶어놔서라도 붙잡아두도록 해. 어쨌건 가장 안전한 건 이곳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혼자 영문을 모르는 신라는 뒤로 손깍지를 낀 채 애꿎은 발을 구를 뿐이었다. 신후의 시선이 그런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때 비밀 아닌 비밀을 털어놓고 난 후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상태였다. 딱히 신라가 피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핑계를 만들어 사무실로 불러들이던 것을 멈춘 것은 그였으니까.

“다 모이라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이야. 최근에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들이 간밤에 이유 없이 무너지는 사건들이 많았어. 대부분 목격자가 없어서 그저 부실 공사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넘어갔지만, 한 일용직 노동자가 잔해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어.”

신후는 사진을 한 장 내밀었다. 그것을 보기 위해 모두 얼굴을 들이밀었다.

“쇠로 된 지지대가… 녹아 있네요?”

“그것도 끝부분은 이빨 모양이 난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신라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런 의뢰를 도대체 어디에서 하는 거예요?”

우선이 사진을 관찰하며 대답했다.

“교수님은 경찰 쪽에도 인맥이 많아서, 간혹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의뢰를 받거든. 기자 쪽 인맥도 많고.”

“그렇구나.”

무심결에 신후를 올려다본 신라는, 그의 시선이 언제부터인지 자신에게 향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 얼굴이어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편 신후는 신라의 시선이 자신에게 똑바로 고정되는 것만으로 심장이 더욱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유신라 양.”

“…네.”

“곧 중간고사 기간이지?”

“아…. 네.”

“시험 기간에는 연구실에 출근하지 않아도 돼. 현장실습도. 공부에 집중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일까지만 참여하고 시험공부 시작할게요.”

사진 관찰을 마친 조교들이 서로 토론을 시작했다. 쇠붙이를 저렇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답은 의외로 빨리 나왔다.

“불가살(不可殺)이네요.”

우선이 단언하듯 말했다. 동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냥 쇠만 먹고 도망친 걸 보면 그렇게 볼 수 있겠네.”

혜령이 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돌아봤다.

“본 적 있는 거야?”

우선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고려 중기 즈음이었을 거예요. 귀주대첩이 있고 얼마 후 사람의 모습으로 대장간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쇠붙이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먹고 있는 녀석을 발견했었죠. 철갑을 두른 것 같은 몸집에 물소의 눈을 하고, 호랑이 같은 발톱에 코끼리 같은 꼬리를…”

신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을 발견한 우선은 뒤늦게 표정을 풀면서 웃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악한 녀석은 아니야. 그때 쇠를 먹어 치우고 있었던 것도 더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순수한 마음에서였거든. 내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려서 그만두고 도망쳐버렸지만.”

“그런데 왜 하필 사람이 다치기 쉬운 건축물에 손을 댔을까. 뭔가 이상해.”

동주의 발언에 묵묵히 서 있던 신후가 입을 열었다.

“그 마음이 변질된 거지.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다들 진지해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즉, 이제는 적이 되었을 확률이 크다는 소리였으니까.

때마침 연구실 문이 열리고 녹초가 된 건우가 걸어 들어왔다. 동주가 씨익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건우 형, 이번 건은 도깨비의 활약이 필요한 것 같은데요.”

그 말에 귀가 쫑긋한 건우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달려왔다.

“내 힘이 필요해? 무슨 일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신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환각….”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쇠붙이가 잔뜩 모인 환각을 일으켜서 그걸 미끼로 불가살을 유인하겠다는 말인가요?”

정답인지 아닌지는, 신후의 만족스런 미소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혜령은 기특하다며 신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 내 힘이 필요한데 왜 신라만 칭찬하는 거야?”

건우의 억울한 목소리는 허공만 맴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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