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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빼앗긴 삶 (8/126)

7장. 빼앗긴 삶

쪽지 시험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여학생들은 두근거리며 한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서길 기다렸다. 반면 신라는 여느 때와 같이 서영과 세 번째 줄 끝자락에 앉아 핸드폰을 했다.

10시 반 정각, 문이 열리고 한 교수가 그림 같이 걸어 들어온다. 오늘은 수트 차림이 아니라 적당한 근육질의 몸매가 드러나는 감색 셔츠에 모직 팬츠를 입었다.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아마도 저 옷은 해외 브랜드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체격을 감당할 수 있는 국내 브랜드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여학생들은 기쁨의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궁금해할 시험 점수부터 불러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은 너도나도 부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 반응을 마치 즐기듯이 미소를 머금고 출석부를 연 한 교수, 그도 조교들이 채점한 시험 성적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잠시 성적을 훑어보던 한 교수는 한 이름에 시선이 고정되어 눈썹을 들썩였다.

“만점자가 한 명 있군요.”

학생들은 두근대는 마음으로 호명될 이름을 기다렸다. 한 교수는 고개를 들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음을 알았다는 듯이 정확하게 신라를 쳐다봤다.

“유신라 양.”

핸드폰을 보고 있던 신라가 흠칫 놀라 시선을 들었다.

“…네.”

“유일하게 만점입니다.”

하나둘 부러움을 삼키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쪽지 시험이라고 해도 꽤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신라는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유신라 양은 재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준비 기간은 많았지만, 그래서 더 어려운 문제들로 준비했었죠. 그리고 우리 연구실의 유일한 학부 연구생이기도 하니까 더더욱 어렵게 냈다만…. 기대 이상으로 해주었군요.”

신라가 한 교수 연구실의 학부 연구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학생들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웃사이더인 그녀의 근황은 서영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야! 조교님들이 정답 알려준 거 아니야?”

서영이 농담조로 속삭였고, 신라는 민망한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

강의가 시작되고, 학생들이 필기를 할 동안 한 교수는 천천히 강의실을 돌아다녔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신라의 옆에서 멈춰 섰다. 신라는 당황해서 필기를 하다 말고 그를 올려다봤다. 나름대로 눈에 띄지 않게 다가온 것일 테지만, 그는 본인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미 몇몇 학생들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힐끔대고 있었으니.

“잘 돼?”

어딘가에서 펜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잘 돼?’라고 자상하게 물었다. 저 한 교수가 말이다. 신라는 다급하기까지 한 얼굴로 ‘저리 가요’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음? 어디가 궁금하다고?”

“아니요…!”

“이따가 연구실로 와서 물어봐. 자세히 설명해줄 테니까.”

큰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장난스레 헤집어 놓았다. 신라는 유유히 강단 위로 돌아가는 한 교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째려봤다. 쿡쿡대며 목 안으로 웃는 남자는 이제 보니 작정하고 놀린 게 틀림없었다.

“신라야….”

“왜.”

“너 아무래도 아싸는 포기해야 될 듯싶다?”

“뭐?”

무심코 서영을 돌아본 신라는, 강의실 안 모든 이의 시선이 본인에게 쏠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죽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그녀를 괴롭히는 존재는 원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그 범위가 인간으로도 확장될 것 같아 적잖이 심란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우르르 몰려들려는 움직임을 눈치챈 신라는 누구보다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곧장 한 교수의 사무실로 쫓아갔다. 조교들이 있는 연구실도 거치지 않고 바로 문을 두드린 것이다.

“안에 없어요? 이 해로운 옴므파탈을 진짜…!”

“안 들어가고 뭐 해?”

꾹- 정수리를 뾰족한 무언가가 눌러왔다.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리는 걸 보니 그가 턱으로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신라는 약이 올라 그 턱을 밀어내고 뒤로 돌아섰다. 신후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모르겠군.”

“강의실에서요! 지나치게 친한 척하시던데요?”

“섭섭하네. 우리의 유대가 그것밖에 안 되다니.”

“유대는 인정하지만, 친밀함은 분명히 그리 없었던 걸로 아는데요.”

“친밀함이라. 사실 육체적인 친밀함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신라는 기겁해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꾸 그런 식으로 놀리면 학부 연구생 안 할 겁니다.”

“누구 손해지?”

“그야…!”

보호받지 못하는 그녀의 손해일 것이다.

“…아무튼, 부탁드립니다.”

“그럼 빨리 들어가는 게 좋겠네. 네가 그렇게 쑥스러움이 많을 줄은 몰랐지.”

뒷말에 부정하기 전 불길함이 든 신라는 복도 쪽을 쳐다봤다. 한 교수의 강의를 같이 듣는 과 여학생들이 무리 지어 이쪽을 훔쳐보고 있었다. 한 여학생은 손톱을 초조하게 뜯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시죠.”

신라가 먼저 도망치듯 교수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신후는 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따라 들어갔다. 교수실에 들어오자마자 연구실로 통하는 문 쪽으로 향하는 그녀의 손을 신후가 붙잡았다.

“나한테 용건이 있어서 온 거 아니었어?”

“할 말 다 했잖아요.”

“매정하게 굴지 마. 네가 그러면 하루 종일 우울해.”

신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심을 뒤흔드는 말을 내뱉는 신후가 당황스러웠다. 본능적으로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하는 행동들일 테지만, 그의 패턴에 익숙해지려면 아마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어둑시니는 사람의 두려움을 먹을 때 가장 강해진다면서요. 차라리 저한테서 두려움을 가져가시는 게 어때요?”

“널 두렵게 만들라는 소리야?”

“에너지가 필요해서 지금 절 뒤흔드시는 거라면요.”

신후가 눈가를 찡그리며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에너지를 얻자고 널 갖고 노는 것 같아?”

“갖고 논…다기보다….”

“아무리 귀태라지만 시도 때도 없이 상대를 유혹하는 저급한 취미 없다고 했을 텐데.”

씁쓸해 보이는 신후의 표정을 보고 신라는 왠지 실수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왜… 오해를 살 법한 말을 자꾸 하는 건데요.”

“사실이니까. 네가 날 피하거나 아예 잊은 것 같으면 종일 기분이 가라앉아서 아무런 힘도 안 나.”

놀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라고 하면 더 문제 아닌가? 신라는 다소 혼란스러운 듯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내 마음을 먹고 신후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한신후 교수님.”

“응.”

“교수님은 분명히 지금 인간이고 인간의 삶을 살고 있지만, 분명 태생은 귀신에 가까웠고 또 그 기억을 갖고 있으니,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요.”

“음?”

“지금 저랑 연애 비슷한 걸 하고 싶으세요?”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대화의 흐름을 보자면 당황해야 하는 것은 신후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 너무 변화가 없어 오히려 질문한 신라가 더 민망해지고 있었다.

“…실언을 했어요. 연구실로 돌아가 볼게요.”

“멈춰봐. 나도 내 생각을 정리해서 얘기해 볼 테니까.”

신후는 신라가 자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그녀의 뒤쪽 벽을 짚어 가뒀다. 신라는 도망치기 위해 주춤주춤 반대편으로 걸었다. 자세를 바꿔 다른 쪽 손으로 벽을 짚는 신후 때문에 금방 퇴로가 차단당했지만 말이다.

할 말을 고르던 신후가 이윽고 말했다.

“신이 나에게서 뺏어간 게 두 가지 있어.”

그 두 가지가 무엇인지 들은 신라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지워졌다. 그것은 앞선 민망함쯤 단번에 잊게 만들 정도로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교수실을 통해 연구실로 들어오는 신라를 발견하고 조교들이 눈인사를 건넸다. 어쩐지 풀이 죽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혜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신라, 어디 아파?”

“아…, 아니에요.”

“교수님이 무슨 짓 한 거 아니지?”

당장에 교수실로 쳐들어가려는 혜령을 신라가 붙잡아 말렸다.

“아, 그냥…. 의외인 얘기를 들어서요.”

“의외인 얘기? 그게 뭔데?”

신라는 말하기를 망설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건우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데, 사람 궁금하게 할 거야?”

“여러분은 혹시… 알고 계셨나요? 신이라는 존재가 저 사람한테서 빼앗아간 게 뭔지….”

“아….”

보아하니 다들 아는 눈치였다.

건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기를 꺼리는 분위기 속에, 랩장인 우선이 신라를 불렀다.

“신라야, 잠깐 커피 한잔할까?”

우선은 신라를 데리고 캠퍼스 밖에 있는 카페로 갔다. 커피값을 계산한 그는 자리를 잡고 앉은 뒤 연구생 생활이 처음이라 힘들지, 하는 말부터 운을 뗐다.

신라는 맞은편에 앉은 청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한 사내일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도 옛날 옛적에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요괴였다.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원망으로, 인간 세상에 가뭄을 일으켰던 「광철」.

“궁금한 게 많았을 텐데, 오늘 들은 얘기부터 간단히 설명해주자면…. 한신후라는 남자는 꽤 오랜 세월을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왔지만 아직은 반쪽짜리라는 거야.”

“…신이 그 사람한테서 뺏어간 두 가지 때문인 건가요?”

“그래. 정확히는 사천왕 부처 중 한 명인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내린 벌이었어. 사람의 명운을 멋대로 늘렸으니 신의 영역에 도전했다고 여기고 분노하신 거지. 그리고 그 이유가 귀신이면서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인간이 좋다면 인간으로 살아라, 하신 거야.”

“사랑했던 ‘기억’과… 인간의 ‘감정’을 빼앗은 채 말이죠.”

신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증표를 남겨놓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쉬이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신이 내린 벌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아 있는 기억도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감정이 전혀 없다고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제 착각이었던 건가요?”

“요괴의 감정은 남아 있으니까. 다만 귀태이기에 할 수 있었던 ‘사랑’의 감정은 이제 없지. 그건 인간에게만 허락된 감정이거든.”

“……”

“그가 우리와 다른 점이 그거였어. 우리는 오랜 재판 끝에 인간의 삶을 허락받았지만, 그는 아직 인간의 감정까지는 허락받지 못한 거야. 또 사랑하게 되면 죄를 반복할까 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요괴의 감정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거군요.”

“맞아. 뭐, 우리도 가끔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괴롭긴 하지만 말이야.”

“……”

우선은 갑자기 떨려오는 손끝에 신라가 보지 못하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커피가 마시지도 않았는데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깐 ‘광철’의 감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주받은 능력을 가두는 것이 힘들었다.

“돌아갈까? 너무 걱정 마. 교수님도 인간의 삶을 반복하면서 제법 많이 되찾았거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느끼는지 배우면서.”

그 말에 신라는 마음이 더 가라앉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은 아무리 주먹을 꽉 쥐어 보아도 쉽게 떨쳐질 리 없었다.

- 익숙하니까. 기다림은.

덤덤히 얘기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과연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단순히 한 사람일까? 그때 잃어버렸던 모든 것일까? 인간의 모습을 주되 인간의 감정을 빼앗고 여지조차 없애버리다니, 자비라는 게 있는 신일까?

우선의 시선이 신라가 차고 있는 귀걸이에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신라를 향한 한신후의 관심이 조금 지나친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자신이 염려하는 것을 신라에게 말하진 않았다. 이미 신들이 내린 벌로 인해 한신후는 같은 비극을 반복할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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