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약점 (7/126)

6장. 약점

조연사(組戀寺)에서 내려온 신라와 형철은 곧장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신라를 따라 뛰느라 땀을 뻘뻘 흘린 형철은 창가에 서서 옷깃을 펄럭거렸고, 신라는 방바닥에 앉아 「퇴귀록」을 정독하는 중이었다.

형철이 생각을 정리하고 신라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아까 그 남자가 너희 대학교 고고학 교수인데, 알고 보니 귀신의 피를 받은 어둑시니인가 뭔가 하는 귀태란 말이지?”

“응.”

“지켜준다고 해서 학부 연구생으로 들어가게 됐지만, 아직은 백 프로 믿을 수 없어서 네가 지금 이러는 거고?”

“응. 날 귀신으로 착각했을 때는 잡아먹으려고까지 했었어. 그런 자가 도대체 뭘 알고 싶어서 굳이 너희 절까지 찾아와 이 책을 손에 넣으려고 했는지 알아야겠어.”

‘잡아먹으려고까지 했다’라는 말에 형철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잠시 후, 천천히 움직이던 신라의 눈동자가 한 구절에서 멈췄다.

“어둑시니에 대한 얘기가 실려 있어.”

“어디?”

두 사람은 낡은 종이에 적힌 글씨를 동시에 읽어 내렸다.

“「어둑시니」라는 이름은 본디 ‘어둑다’와 귀신을 뜻하는 ‘시니’가 합쳐져 만들어졌다. 그는 어둠에 대한 공포심 자체가 형상화된 요괴다. 공포를 갖고 어둑시니를 지켜보면 한없이 강해져 숨을 짓누르고 주위가 어둠으로 둘러싸여 영원한 암흑에 갇히게 되고 만다. 보름달이 뜨면 그의 귀력은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며 사람이고 귀신이고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울 수 있다.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약점은 간단하다. 그것은-”

화악-

그때 방의 불이 꺼진 것처럼 시야가 깜깜해졌다.

“뭐야, 정전인가?”

형철이 중얼거렸다. 신라만이 어둠 속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정전이라 해도 분명 창문은 열려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화창한 오후에 이렇게 갑작스런 암흑이 되어버렸다는 건….

“…장난 그만 치시죠, 교수님.”

신라가 나지막이 얘기하자, 신기하게도 어둠이 스물스물 걷히면서 도로 방 안이 환해졌다. 두리번거리던 형철은 바로 옆에 새로운 기척이 나타난 것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당신은…!”

책상에 기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는, 아까 절에서 보았던 그 양복 차림의 남자였다. 신후는 미묘한 웃음을 입가에 띤 채 신라와 고요히 시선을 맞교환하는 중이었다.

“먼저 장난을 친 건 어느 쪽이지? 유신라 양.”

신후의 손에는 어느새 퇴귀록이 들려 있었다. 신라는 그걸 보고 조금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맞받아쳤다.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비과학적인 현상을 일으키시면 어떡해요?”

“그 비과학적인 현상을 수도 없이 보고 자랐을 친구니까. 그러니까 유신라 양의 말을 믿고 함께 이 도둑질에 가담한 거겠지?”

형철이 발끈해서 발을 굴렀다.

“도둑질은 말이 좀 심하네요. 엄연히 우리 절에 있던 물건입니다.”

“그리고 난 그 책을 넘겨받기로 그 절의 ‘주인’과 약속이 되어 있었고.”

“어디까지나 큰아버지가 당신의 정체를 모른다고 가정했을 때겠지.”

“내가 내 정체를 숨긴 것이 가장 큰 배려라는 걸 깨달아줬으면 싶은데.”

“우리 집안을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걸.”

형철이 위협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아니, 그 반대야.”

신후는 미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퇴귀록을 들어 보였다.

“여기에는 물론 내 약점도 들어 있지만, 그보다 수많은 악귀들을 제령할 수 있는 술법들도 적혀 있거든. 조연사의 오래된 비술들은 쓸 만하다는 게 정설이지.”

“그런데 왜 이제야 가지러 온 거죠?”

신라가 물었다.

“예전에 한 번 이 책을 빌리러 왔던 적이 있었지. 그때는 단번에 내 정체를 들키고 창고는 강력한 주술로 봉인됐었어. 얼마 전 다시 찾았는데, 세월이 흐르니 역시 봉인은 희미해져 있더군.”

이번에는 형철이 대꾸했다.

“그래요. 우리도 창고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럼 도대체 언제 찾아왔었다는 겁니까?”

“이전 생에.”

그의 대답에 두 사람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왜 그런 반응이지?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나이는 먹어야지.”

형철이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신라는 신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신후의 덤덤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나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고 싶기 때문에 이 책을 먼저 ‘빌려 간’ 거겠지?”

“도대체 몇 번째 생을 살고 있는 거죠?”

“네 번째.”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저 책을 다 읽을 수 있었을 것을. 신라는 아쉬움에 퇴귀록만 빤히 쳐다봤다. 그에 대한 베일이 걷히긴커녕 더 수상한 점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단순히 친구 사이인가?”

신후의 물음에 형철이 답했다.

“단순하다고 하기에는 굉장한 절친입니다만.”

그때 신라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 더는 엮이지 마, 형철아.”

신후가 피식 웃으며 자세를 바꿨다.

“섭섭한데. 사람을 괴물 취급하는군.”

“이상하네요. 표정은 하나도 안 섭섭하신데요.”

“내가?”

“교수님 말대로, 약속됐던 물건을 중간에 슬쩍한 건 죄송해요. 원하던 물건을 찾으셨으니 이만 돌아가 주세요.”

“지도교수가 집까지 찾아왔는데 차 한 잔도 없이 내쫓는 건가?”

이럴 때만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는 신후가 얄미워 신라는 발끈하고 말았다.

“저번에는 물 한 잔도 안 마시고 갔었잖…!”

아차 싶어 형철을 돌아봤지만, 소꿉친구의 표정에는 이미 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보호막 같은 걸 두르러 오셨을 때, 그러셨었잖아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신후가 가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지금은 그렇게 늦은 밤이 아니잖아.”

‘늦은 밤’이라는 단어에 형철의 미간이 더 깊게 팼다.

“유신라, 너 겁도 없이….”

“오해야!”

두 사람이 티격대는 걸 즐겁게 구경하던 신후가 상황을 정리했다.

“두 사람이 돈독한 건 잘 알겠고. 박형철 군은 제대로 퇴마 일을 배워볼 생각은 없나?”

“글쎄요. 배운다 해도 인간의 방법을 배우고 싶은데요.”

일부러 도발하는 형철에 신후는 그저 입꼬리를 당겼다.

“유감이군.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경계하는 두 사람을 배려해서인지, 신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문을 나섰다.

‘안 돼, 이대로는….’

잠시 고민하던 신라는 결국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한 교수에게 아직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날렵한 몸으로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 내려가는데, 난간을 붙잡고 돌자마자 단단한 것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읏!”

퍽, 부딪혀 뒤로 넘어지려는 신라를 신후가 여유롭게 잡아챘다.

“그새 ‘친구들’ 중 하나한테 몸을 뺏긴 건 아닐 테고. 궁금한 게 아직 남은 건가?”

“이유…요.”

신후는 난간을 짚으며 되물었다.

“무슨 이유? 퇴귀록을 가져가는 이유?”

“아니요. 교수님이…”

잠시 말을 멈춘 신라는 고개를 내젓고 다시 얘기했다.

“당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 이유요. 보아하니 다른 조교들과 달리 그 ‘속죄’의 삶이라는 걸 빨리 시작한 모양인데, 그 정도로 큰 죄를 지었던 건가요?”

“그게 궁금해서 그렇게 뛰어 내려온 건가?”

‘그래, 맞아. 당신에 대해 참을 수 없이 궁금해. 인정해.’

신라는 꾸밈없는 표정으로 신후를 빤히 바라봤다. 신후는 미소를 짓는 듯, 무언가 아리송한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신라를 쳐다봤다.

‘경계심과 두려움이 더 짙어졌을 텐데도,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쳐 온다라….’

분명한 건 이 상황이 그에게 평소와 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에너지가 요동치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스스로 달려든 발칙한 토끼를 겁주고 싶지 않았다.

“딱히 속세의 누군가에게 큰 죄를 지었던 건 아니야. 다만 내 행동을 보기 불편했던 ‘위’에 계신 분들이 그걸 죄라고 판단한 거지.”

“그 행동이 뭔데요?”

신후는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신라를 바라봤다. 신라는 그의 시선의 끝에 자신이 아닌 과거의 어느 순간이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사람의 명운을 건드린 죄.”

그가 그동안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어, 신라는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슬픈 표정을 지을 것만 같은 남자의 얼굴을 그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때. 네가 보기에도 큰 죄 같아?”

“……”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말이 어떻게 나오든 그를 흔들어 놓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데에 내 의지가 없는 건 아니야.”

“당신이 원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거라고요?”

“그래. 반은.”

신후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손을 달라고 하는 표시였다. 신라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손을 내어주었다. 지금의 그는 어떤 수상한 짓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이상해, 너는.”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쥐고 있었다.

“널 보고 있으면, 잊고 있었던 뭔가가 떠오르려고 하거든.”

“당신도 잊을 수 있는 게 있나요?”

“그래. 게다가 점점 흐릿해져 가지.”

그녀의 생기 있는 손이, 바스러질 것 같아 마음대로 쥐지도 못했던 예전의 한 창백했던 손과 겹쳐 보여, 신후는 마른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기다리고 있어.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도록 증표를 남겨놨으니까.”

여인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했던 날 밤, 늙은 여종의 꿈에 나타나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여종은 모든 말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홀린 듯이 그 말을 따라 주인댁 아씨의 장례를 성실히 치렀다. 그리고 간밤에 누군가 툇마루에 놓아두고 간 비단 수의를 아씨의 몸에 입혀 무덤에 안치했다.

“누구를 기다리는데요?”

신후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하지 못했다. 자신조차 선명히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것은 신에게 받은 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신라는 잠시 후 천천히 그에게서 손을 빼냈다. 차가운 손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쫓다가 이내 멈췄다.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렸어요.”

“그랬다면 다행이군.”

“따라올 줄 알고 일부러 천천히 내려가고 계셨던 건가요?”

“아니. 그새 날파리들이 꼬였던 것 같아서. 집뿐 아니라 건물 전체로 내 기운을 묻히는 중이었어.”

“아….”

“왜 전화하지 않았지?”

왠지 민망해진 신라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핸드폰이… 없었어요. 경황도 없었고.”

“더 강한 녀석이었으면 너뿐 아니라 네 친구도 잡아먹혔을 수 있어. 앞으로는 꼭 전화 들고 다녀. 내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어둠이 존재하는 밤의 시간뿐이니까.”

안색을 살피듯 빤히 쳐다보는 한 교수 때문에, 신라는 숨을 작게 내쉬었다.

“대답.”

“…저한테 집중하느라,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을 못 만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에 신라는 뒤늦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질투하는 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후는 가볍게 웃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만나지 못할 운명인 거겠지. 널 탓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오래 기다렸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시네요.”

“익숙하니까. 기다림은.”

그렇게 말하며 신후는 안주머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의 기운을 불어넣은 보석이 박힌 귀걸이였다. 그는 신라의 귓불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이미 뚫려 있는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남들이 만질 일 없는 부위가 만져지자 신라의 눈이 살짝 경련하다 감겼다.

‘이건….’

신후의 손이 떠나가자 차가운 감촉이 귓불에 남았다. 신라는 손으로 그것을 만져 확인했다. 아마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남긴 것 같았다.

신후는 귀걸이를 바라본 채 말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잃지 않으면 돼.”

무엇을-? 마음속으로 한 그 질문의 답은 신후의 눈동자에 누가 담겨 있는지를 보고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신라는 그녀답지 않게 금방 달아오르는 얼굴에 당황해서 급히 시선을 돌렸다. 살면서 이성 때문에 얼굴을 붉혀본 적이 한 번도 없었건만, 이전에도 그랬듯 한신후 앞에서는 확실하게 예외였다.

그런 신라를 바라보던 신후의 눈가에도 금방 열꽃이 피어났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또다.’

신후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너는 뭐지? 유신라.’

금방이라도 손이 뻗어나가 이 알 수 없는 생명체를 꽉 끌어안고 무슨 짓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괜찮아요?”

그의 상태를 눈치챈 신라가 긴장한 상태로 물었다.

“이만 가야겠어.”

신후는 짧게 말하고는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신라는 그를 다시 불러세울 수 없었다. 힘줄이 선명히 보일 정도로 그의 주먹이 꽉 쥐어져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저렇게 인내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보다 귀신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손을 들어 아직 어색하게 느껴지는 귀걸이를 찬찬히 매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