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믿지 못해
화창한 주말. 아르바이트도 그만뒀겠다, 오랜만에 늦잠에 빠져 있던 신라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근처 편의점에서 레토르트 식품을 사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문 근처에 다다라 도어락에 번호를 입력하려는데, 비틀대는 그림자가 어른어른 다가온다. 그녀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아… 안녕하세요.”
아랫집 남자다. 몽유병으로 고생할 무렵, 무의식중 큰 소리를 냈는지 몇 번 쫓아 올라와 불만을 토로했던 고시생이었다.
“혹시 제가 또 소음을 일으켰나요?”
“……”
답이 없는 사내는 뭔가 초조한 듯이 계속 손을 꼼지락거렸다.
“저기…요?”
“그 안에… 뭐가 있어?”
남자의 손가락이 소심하게 신라의 집을 가리켰다.
“네?”
“네 집이 이상해서.”
“뭐가….”
“갑자기 이상한 게 가득 차서…. …가 없잖아.”
“뭐라고요?”
신라가 되묻자, 이리저리 불안하게 움직이던 남자의 시선에 갑자기 분노가 담겼다.
“갑자기 이상한 게 가득 차서, 들어갈 수가 없잖아!”
“들어갈 수 없다니, 여기는 제집인데-”
“맛있는 기운으로 가득했는데 왜 들어가지 못 하게 했어-!”
남자의 목소리가 한순간 굵게 바뀌었다. 신라는 아차 싶어 몇 걸음 물러났다. 이 남자의 몸에 지금 ‘무언가’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대낮에 위협을 받게 될 줄 몰랐던 신라는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계단 쪽 길은 남자가 차단하고 있었고, 무기가 될 만한 것이라곤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뿐이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험한 꼴 당할 수 있어.”
남자가 기괴하게 턱을 까딱이며 신라를 비웃었다.
“너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25년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걸 우습게 보면 큰코다쳐.”
“얌전히 내 밥이 돼. 내가 자상하게 해줄 테니까, 응?”
남자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신라와 점차 거리를 좁혔다. 손이 징그럽게 움직이며 올라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찡그린 그녀는 편의점 봉투를 휘두른 다음 그의 몸을 밀쳐냈다. 그가 계단 밑으로 떨어질까 봐 난간에 부딪히도록 힘 조절을 한 게 화근이었는지, 계단으로 도망쳐 내려가던 그녀의 후드 티 모자가 붙잡혔다.
“윽!”
“이 계집이 어딜 도망쳐!”
“이거 놔!”
이럴 때를 대비해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해온 그녀였다. 날카로운 돌려차기가 남자의 턱에 적중했다. 모자에서 남자의 손이 떨어진 틈을 타 그녀는 쏜살같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허억, 허억!”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4층에서 뛰어 내려갔는데, 다섯 층, 여섯 층을 뛰어 내려가도 계단이 끝나지 않는 것이다.
‘큰일이네.’
생각보다 귀력이 강한 귀신인 모양이다. 하긴, 신후가 잡귀는 이 집 근처에도 오지 못할 거라고 했었으니, 문 앞까지 접근할 수 있다면 보통 귀신은 아닐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신라는 뛰는 것을 포기하고 잠시 멈춰 섰다. 뚜벅, 뚜벅,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남자가 괴상하게 미소 지으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게, 얌전히 잡아먹히면 편하잖아. 응?”
“얌전하지 않으니까 여태껏 살아있는 게 아닐까?”
“급격히 허기가 지는군. 어디부터 씹어 먹어 줄까?”
“내 밥은 못 먹게 만들었으면서, 넌 배를 채운다고? 너무하네.”
말은 호기롭게 하면서도, 속으로 적잖이 난감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여기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핸드폰도 방에 두고 와 연구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러게. 당신 좀 너무한 거 아니야?”
그때 다른 목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귀신 들린 남자가 서 있는 곳보다 아래쪽 계단에서 들린 목소리였다. 신라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그쪽을 쳐다봤다.
“정기 점검 왔습니다, 유신라 씨.”
계단을 올라와 모습을 드러낸 이는 신라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이 상황에서 특히나 반가운.
“박형철-!”
형철이라 불린 계량한복 차림의 청년은 씨익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긴 막대기로 신라를 위협하던 남자의 어깨를 내리쳤다.
“크악!”
형철은 중얼거리며 불경 같은 것을 외웠다. 불경의 힘은 귀혼이 날뛰지 못하도록 속박했다. 계속되는 매질에 남자 몸속에서 괴로워하던 귀신은 결국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귀혼이 떠나간 충격에 남자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꼼짝하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유신-”
달려와 와락 끌어안는 신라 때문에 형철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그는 어색하게 신라의 등을 몇 번 두드려주었다. 그의 뒷목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지금 신라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마워, 형철아. 오랜만인데 아주 나이스 타이밍이었어.”
“이…런 걸 가지고 뭘. 오히려 늦게 와서 미안하다. 어디 다쳤어?”
“아니, 덕분에.”
형철은 신라의 오랜 소꿉친구였다. 그는 대대로 이름 있는 승려를 배출한 영험한 절에서 자라났다. 신라와 같은 고교를 졸업했지만, 큰아버지가 주지 스님인 절을 함께 관리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친구가 된 것은, 어린 시절 신라가 잡귀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형철의 절 불당에 숨어 들어간 것이 계기였다. 그때도 형철은 용감하게 잡귀를 쫓아 주었다.
“진짜 다친 데 없지?”
“그렇다니까.”
귀신이 쳐놓았던 결계가 자연히 풀리자, 바닥에 널브러진 레토르트 식품이 보였다. 형철은 그것을 묵묵히 주웠다.
“이건 버리자. 아직도 이런 거 먹고 다녀?”
“주말이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못 말린다니까. 따라와.”
“어?”
때마침 신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형철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네가 좋아하는 절밥 먹여줄게. 다른 데 가서 든든하게 먹이고 싶지만, 오래 절 비우면 큰아빠한테 혼나서 말이야.”
* * *
목기(木器)를 들고 따뜻한 김이 나는 잡곡밥을 허겁지겁 먹는 신라는 며칠 굶은 사람으로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반찬이라고는 싱거운 나물뿐이지만 번번이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형철은 밥을 먹는 것도 잊은 채 그런 신라를 넋 빠진 얼굴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어?”
“몰라, 난 전생에 스님이었나 봐. 나물 더 없어?”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라.”
그렇게 말한 형철은 본인도 못지않게 우걱우걱 밥을 먹기 시작했다. 주지 스님인 백부께 백 번은 넘게 발우공양에 대해 배웠지만, 신라의 앞에서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쩝쩝, 집에는 무슨 짓을 한 거야?”
신라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집에 놨던 부적의 기운은 여전한데, 왠지 다른 기운이 덧씌워진 기분이 들어서. 다른 부적이라도 쓴 거야?”
“…뭐, 비슷해.”
가만히 신라를 바라보던 형철은 입에 있던 것을 다 삼키고 말했다.
“몽유병은 아직도야?”
“어느 정도 나아졌어.”
“다행이네. 그래도 조심해. 대낮에 그렇게 달려드는 미친놈들도 있으니까.”
“왜. 또 같이 살자고 그러게?”
풉- 형철의 입에서 밥풀이 터져 나왔다. 쿨럭거리던 그가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내, 내가 언제?”
“네가 지켜주겠다고, 이 절에서 살라고 했잖아. 우리 어릴 때.”
“…그랬나?”
“응.”
형철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망설이던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신라, 나는…”
그때였다. 문밖에서 형철의 큰아버지인 영선 스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절에 드물게 귀한 손님이 찾아온 것 같았다.
“누구지?”
신라가 먼저 기어가 문을 살짝만 열어보았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불당의 앞마당이 보이고, 그 가운데 웬 양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형철도 따라와 그녀의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절에 양복 차림으로 오다니, 도대체 누구지? 저런 손님은 드문데.”
모델같이 훤칠한 사내가 까만 선글라스를 낀 채 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그의 정체를 살피던 신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어… 설마….”
“아는 사람이야?”
남자의 시선이 두 사람 쪽으로 향해 온 순간, 신라는 재빨리 형철을 잡아당기며 문을 닫아버렸다.
“쉿! 숨어야 돼!”
“왜 그래? 누군데?”
“교수…! 아니, 귀신? 아니지….”
“뭐야, 교수라는 거야, 귀신이라는 거야?”
“아, 아무튼! 위험한 남자란 말이야!”
“…위험하다고?”
대번에 심각한 표정을 지은 형철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자, 신라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겼다.
“얏! 바지 내려가잖아!”
“잠깐만 숨어 있자니까?”
“위험한 놈이라며! 큰아빠가 지금 위험하다고!”
“아니, 일단은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이니까 안심해.”
“인간 맞는 거지?”
“…일단은 맞아. 나도 얘기하기가 복잡해.”
찝찝한 표정의 형철을 뒤로 하고, 신라는 다시 한번 문밖을 엿봤다.
“…말씀하신… 서적… 습니다…”
멀리서 대화하는 터라 다 들리지는 않았다.
“무슨 서적을 찾으러 온 것 같은데?”
다시 신라의 위로 고개를 들이민 형철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아아, 설마 그 책을 찾으러 온 건가?”
“무슨 책?”
“「퇴귀록」이라고, 아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승려들의 퇴마 지침서 같은 건데, 역사적인 가치로도 어마어마해서 집안의 가보야. 얼마 전에 큰아빠랑 같이 창고를 뒤져서 찾았거든.”
“퇴귀록….”
작게 중얼거린 신라가 갑자기 눈동자를 빛내면서 형철을 잡아당겼다.
“그거, 혹시 지금 어디 있어?”
창고 이곳저곳을 한참 뒤지는 승려를 보고, 신후는 구둣발을 천천히 구르며 시계를 한 번 봤다. 며칠 전 찾아놨다는 서적을 꺼내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일부러 시간을 끌며 자신을 붙잡아두려는 속셈이 아닌가 싶었다. 간혹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아채는 승려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선 스님, 혹시 책이 없어진 겁니까?”
“허, 이것 참. 어제까지만 해도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만. 혹시 조카 녀석이 다른 곳에 치웠을지도….”
“조카가 있으시군요. 이곳에 같이 사십니까?”
“예. 아까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와서 밥을 먹고 있을 겁니다. 제가 가서 한번 물어보고 오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선 승려가 창고를 나서는 걸 보며 신후는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깃에 꽂았다. 그리고 답답함에 포마드로 넘겼던 단정한 머리칼을 살짝 흐트러뜨렸다.
‘거북하군.’
아무리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지만 혼의 태생은 귀태였다. 영험한 기운이 밀집된 이런 장소는 오래 머물기 힘든 곳이었다. 게다가 해가 유난히 환한 날은 체질상 기운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선글라스를 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잠시 후 영선 승려가 돌아왔다.
“이걸 어떡하지요? 조카 녀석이 밥상도 그대로 두고 어디를 간 모양입니다. 전화도 받지를 않고….”
“…누군가 책을 만졌다면 조카분일 확률이 큰 겁니까?”
“예, 이 창고는 보시다시피 열쇠로 여는 구조인데, 열쇠는 우리 두 사람이 갖고 있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찾아오죠. 연락 주십시오.”
“이거, 헛걸음하시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신후는 절을 떠나기 전 돌아서서 영선 승려 뒤로 보이는 절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봤다. 한 방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마도 조카라는 이가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곳일 터다.
밥상 위로 수저는 두 쌍이 놓여 있었다. 그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조카분이… 친구와 함께 있었다고 하셨던가요?”